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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고대 중국의 미인들

작성자이윤재님|작성시간15.11.26|조회수108 목록 댓글 0

 

* 고대 중국의 미인들 


1. 서시(西施):

서시(시쓰, 西施, 생년 미상)는 고대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본명은 시이광(스이광, 施夷光)이다. 중국에서는 서자(시쯔, 西子)라고도 한다. 기원전 5세기(춘추시대 말기)의 사람이다. 현재의 저장 성 사오싱 주지 시 출신이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월나라 구천의 참모 범려의 전략에 따라 패전의 처리에 대한 공물로 오나라 부차의 여인이 된다. 서시가 부차에게 총애를 받자 부차의 후궁 위희부인이 서시를 질투하여 서시를 비밀리에 제거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서시에게 빠진 부차는 월나라를 끝까지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던 오자서를 죽이면서까지 월나라 경계에 소홀하게 되고, 결국 국력을 키운 월나라에 패망하게 된다.

오나라가 패망한 뒤의 서시는 월왕 구천의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지만 구천의 정부인인 월부인에게 비밀리에 제거당한다.

중국의 사가들은 오나라가 망한 후 서시의 일생에 대하여 많은 설들을 만들었다. 그 중 서시는 범려의 연인으로 오나라가 망한 후 그가 월나라를 떠날 때 비밀리에 데리고 갔다는 설이 사가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았다.

다른 설로는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한 후 월의 구천이 서시를 궁으로 부르지만 범려가 그녀와 강에서 만나 그녀를 설득하고 서시가 강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나 오나라가 망할 때 분노한 백성들이 서시를 죽였다는 설도 있지만 모두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2.왕소군(王昭君):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연지(선우의 처)로,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이름은 장(嬙, 출전은 한서)이다. 성을 왕, 자를 소군이라고 하여 보통 왕소군이라고 불리며 후일 사마소(司馬昭)의 휘(諱)를 피하여 명비(明妃), 왕명군(王明君) 등으로도 일컬어졌다. 형주 남군(현재의 호북성 사시) 출신으로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고대 중국 사대 미인의 한 사람에 손꼽힌다.

전한원제 시대,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의 여성을 연지로 달라고 해, 왕소군이 선택되어 그의 장남을 낳았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변방의 세력을 달래기 위해 보냈다는 설도 있다.) 이후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당시 흉노의 관습대로 아들 복주누약제 선우의 처가 되어 둘째 딸을 낳았다. 한족은 부친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꺼려하여, 이것이 왕소군의 비극으로 민간에 전승되었다. 황량한 초원지대가 대부분이었던 흉노의 땅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땅을 그리며 느꼈을 왕소군의 감정을 당의 시인 동방규는 "소군원"이라는 시에서 노래한다. 그 시구 중에 "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라는 구절은 흉노 땅의 봄을 맞이했음에도 고향 땅의 봄같지 않아 더욱 사무치게 고향이 그립다는 그녀의 애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도 이 시구인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그리움의 인용구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후 72세가 되던 해에 병을 얻어 돌무덤에 안장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무덤을 일컬어 소군묘(昭君墓) 혹은 청총(靑塚)이라고 부른다.


 

3. 초선(貂嬋):

초선(貂蟬)175년~199년(소설상 나이)은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 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의 수양딸로 등장해 동탁여포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여포가 동탁의 이름 없는 시녀와 염문을 가졌다는 정사의 기록과 왕윤이 여포를 부추겨 동탁을 죽이게 했다는 사실을 연의에서 각색한 것이다.


 

4. 양귀비(楊貴妃):

양귀비(楊貴妃, 719년 6월 26일 ~ 756년 7월 15일)는 李隆基(이융기)의 후궁이자 식부이다. 성은 楊(양)이고 명은 玉環(옥환)이며, 귀비는 황비로 순위를 나타내는 칭호이다. 당 현종 이융기에게 총애받았지만, 과도해 안사(안록산)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돼서 경국지색이라고도 부른다.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 일인이다.


 

5. 조비연(趙飛燕):

한(漢)나라 성황제(漢成帝)의 부인이며 효성황후(孝成皇后)가 되었다. 고대 중국 한나라를 대표하는 미인상으로 일컬어지지만 악행과 문란한 행위로 오점을 남겼다.

성양후(成陽候) 조임(趙臨)의 딸이며 원래 미천한 신분이었다. 한(漢)나라 성황제(漢成帝)의 첩(?)으로 들어갔다가 용모가 뛰어나고 춤과 노래를 잘해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성황제의 부인으로 효성황후(孝成皇后)까지 올랐다. 본명은 조의주(趙宜主) 였으나 "날으는 제비"라는 뜻의 별명 조비연(趙飛燕)으로 불리었다.

갸날픈 몸매와 뛰어난 가무(歌舞)는 당대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일화에 의하면 황제가 호수에서 베푼 선상연(船上宴)에서 춤을 추던 도중 강풍이 불어 갸냘픈 몸이 바람에 날리자, 황제가 그녀의 발목을 잡아 물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비연은 그 상황에서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았고 임금의 손바닥위에서 춤을 추었다하여 "물 찬 제비 또는 날으는 제비"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때 임금이 조비연이 물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의 발목을 급히 붙잡다가 치마폭의 한쪽이 길게 찢어지게 되었는데 이렇게 찢어진 치마는 오늘날 중국 여인들의 전통 의상인 유선군(留仙裙)의 유래가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해 궁녀들에 대한 횡포가 심했는데 자식을 낳은 궁인들을 모두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고 스스로는 성적으로 문란하여 궁중에서 온갖 음탕한 짓을 일삼았다.

조비연은 황제가 살아있는 10년간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다가, 황제가 죽자 탄핵되어 서인(庶人)으로 전락하였고 이후 걸식으로 연명하다가 자살하였다.

이후 조비연의 미모를 두고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로 상징되었다.


 

6. 무측천(武則天):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 1월 23일 ~ 705년 11월 2일)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자 무주(武周)의 황제(당나라 제 7대 황제)로, 중국 역사에 나타난 두 번째 여성 군주이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중국어: 武則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음탕하고 간악하여 황위를 찬탈한 요녀(妖女)라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걸(女傑)이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무조(武照)이고, 아명(兒名)은 무미랑(武媚娘)이다.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曌)로 개명하였다. 무사확(武士彠)의 차녀이다. 태어난 날짜는 정확하지 않고,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설도 있다. 정식 시호는 측천무후여황제(則天武后女皇帝)이다.


 

7. 탁문군(卓文君):

전한 촉군() 임공() 사람. 탁왕손()의 딸이다. 거문고를 잘 연주했고, 음률()에도 정통했다. 사마상여(如, BC 179-118)가 아버지 탁왕손과 술을 마시는데, 그 때 탁문군은 막 과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처지였다. 사마상여가 주위의 권유 때문에 거문고를 들어 「봉구황()」이란 음악을 연주하니 그녀의 마음이 동요되었다. 마침내 함께 몰래 달아나 성도()로 갔다가 다시 임공으로 돌아왔다. 주점을 열어 술을 팔았는데, 아버지가 부끄럽게 여겨 재물을 나누어준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 사마상여가 나중에 부인을 들이려고 하자 「백두음()」을 지은 뒤 절교를 선언하자 사마상여가 뜻을 포기했다. 채문희(), 이청조(), 상관소용()와 더불어 중국 ‘고대사대재녀()’로 일컬어지고, 또 설도(), 화예부인(), 황아()와 더불어 ‘촉중사대재녀()’로 일컬어진다.

 


8,상관완아(上官婉兒):

당(唐) 초기의 문인(文人)이자 궁인(宮人)으로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으며 중종(中宗) 때에도 권세(權勢)를 누렸지만 정변(政變)을 일으킨 현종(玄宗)에게 살해되었다. 섬주(陝州, 지금의 河南省 三門峽) 사람으로 당(唐) 고종(高宗, 재위 649∼683) 때의 재상(宰相)인 상관의(上官儀, 608~664)의 손녀이다. 상관의는 육조(六朝)의 화려함을 이어받아 섬세한 기교를 구사한 시풍(詩風)인 ‘상관체(上官體)’를 유행시키며 태종(太宗, 재위 626∼649) 때부터 널리 이름을 떨쳤지만, 664년 고종을 도와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폐위(廢位)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상관의의 가족도 모두 처형되었지만, 갓난아기였던 상관완아와 어머니 정씨(鄭氏)만이 외가쪽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관완아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고, 시서(詩書)를 깊게 공부하여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677년(儀鳳 2년) 측천무후에게 발탁되어 입궁(入宮)하여 궁중(宮中)의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당시 측천무후가 아버지를 죽인 자신을 미워하느냐고 묻자, “원망하면 불충(不忠)이요, 그러하지 아니하면 불효(不孝)가 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시문(詩文)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측천무후가 시제(詩題)를 내어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면 상관완아가 심사를 맡았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그녀를 매우 총애하여 696년부터는 조서(詔書)를 담당하는 일을 맡겼다. 무주(武周) 시대 대부분의 조칙(詔勅)이 그녀의 손에서 나와, 사람들은 그녀를 ‘내사인(内舍人)’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이나 《신당서(新唐書)》 등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가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측천무후는 그녀를 죽이지 않고 얼굴에 매화 문양을 새기는 경형(黥刑)만을 내리고 조서(詔書)를 작성하는 일에 계속 참여토록 했다. 얼굴에 매화 문양을 새긴 상관완아가 더욱 아름답게 보여 이 문양을 본떠 화장하는 것이 당대에 널리 유행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상관완아는 시적 재능만이 아니라 정치적 수단도 뛰어나 측천무후의 조카인 무삼사(武三思, ?~707)와 애인(愛人) 관계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가까이 지냈으며, 698년 다시 황태자가 된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705년 장간지(張柬之, 625~706)가 정변을 일으켜 당(唐) 왕조가 부활하고, 중종(中宗)이 복위(復位)를 한 뒤에도 중종(中宗)과 위황후(韋皇后, 660?~710)의 신뢰를 받으며 황제의 명(命)을 전담하며 대부분의 조칙(詔勅)을 기초(起草)하였다. 그녀는 중종의 후궁(後宮)으로서 소용(昭容)의 지위에 올랐으며, 위황후(韋皇后)와 무삼사 등과 연합하여 장간지를 견제하여 측천무후(則天武后) 통치기 때의 중신(重臣)들과 무씨(武氏) 세력이 회복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종에게 서관(書館)과 학사(學士)를 늘릴 것을 건의하고, 조정(朝廷)을 대신하여 천하의 시문(詩文)을 품평(品評)하였다.

710년 중종이 죽고 위황후가 측천무후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황위(皇位)에 오르려 하자, 상관완아는 측천무후의 딸인 태평공주(太平公主)와 연합하여 이를 견제하였다. 결국 예종(睿宗, 재위 684~690, 710~712)의 아들인 임치왕(臨淄王) 이융기(李隆基)가 태평공주와 힘을 합하여 정변(政變)을 일으켜 위황후를 제거하고 예종(睿宗)을 다시 황제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뒤에 현종(玄宗, 재위 712∼756)이 되는 이융기는 위황후에 대립했던 상관완아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황후(韋皇后), 안락공주(安樂公主) 등과 함께 처형하였다. 뒷날 현종은 상관완아의 글들을 모아서 20권의 문집(文集)으로 편찬하였다. 청(淸, 1636∼1912)에서 18세기에 당시(唐詩)를 모아 편찬한 《전당시(全唐詩)》에도 상관완아의 시 32수가 실려 있다.  


 

9. 사도온(謝道蘊):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 동진(東晉) 여류시인. 생몰년 미상. 동진(東晋)의 재상이었던 양하사씨(陽夏謝氏) 사안(謝安)이 그녀의 숙부이며, 안서(安西) 대장군 사혁(謝奕)의 딸.

당시 동진의 대귀족이었던 낭야왕씨 가문의 왕응지(王凝之)와 결혼하였는데 그는 중국 최고의 대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둘째아들이었다. 383년에 일어난 비수전투에서 동생 사현(謝玄)이 적을 물리치며 공적을 세우자 동진 최고의 가문을 이루었다.

399년 손은(孫恩)이 오두미도(五斗米道) 교단을 이끌고 난을 일으켜 회계(會稽)로 쳐들어오자 회계태수(會稽太守)였던 남편 왕응지가 반란군에게 사망하였다. 사도온은 반란군에게 생포되어 손은에게 끌려갔으나 당당하게 맞서 논쟁을 벌였으며 이에 감탄한 손은은 결국 사도온을 방면(放免)하였다.

 


10. 채문희(蔡文姬):

채염(蔡琰, 177년? ~ 239년?)은 중국 후한말의 시인이다. 채문희라는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문희(文姬)는 이다. 진류(현재의 허난 성 치 현) 출신으로 후한의 중신 채옹의 딸이다. 시재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왕이, 장춘화, 보연사와 함께 이름이 정확히 역사서에 기재된 몇 안되는 삼국시대 여성이다.

하동의 위중도(衛仲道)의 아내가 되지만 사별하였다.

195년(흥평 2년), 동탁의 잔당에 의해서 난이 일어나면서, 친가에 돌아간 채염은 흉노의 기마병에게 납치되어 마침내 남 흉노의 좌현왕 유표에게 측실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좌현왕 유표와 사이에 쌍둥이를 낳았다. 12년 후의 207년, 채옹의 후계자가 없는 것을 아까워한 조조가, 재보를 몸값으로 흉노 측에 지불하는 것에 의해서 귀국했다(그 때, 아이를 흉노에게 남겼다). 그 후, 동향 출신의 동사(董祀)에 시집간다. 아버지 채옹의 잃어버린 저서를 암기하여 채옹의 저서들을 복원했다. 현존하는 시로서 「호가십팔박」과「비분시」2수가 전해지고 있어 스스로의 파란의 인생을 엮은 작품이다. 호가십팔박에 대해서는, 후세의 산물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또한 채염의 인생을 소재로 한 작품에, 북경의 이화원의 장랑에 그려진 「문희귀한도」, 곽말약의 희곡 등이 있다.


 

11.반소(班昭): 

반소(45-115)는 중국의 유명한 문인이며 역사학자.
유수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14세에 결혼했으나 일찍 남편이 죽었다. 그녀는 재혼하지 않은 채 문학과 자녀교육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아버지 반표(班彪:3~54)가 전한(前漢:BC 206~AD 8)의 역사를 쓰다가 죽자 오빠인 반고(班固:32?~92)가 사관(史官)으로 임명되어 이 작업을 완수할 것을 명령받았다. 그결과로 나온 것이 〈한서 漢書〉인데 이는 중국의 유명한 사서로서 후대 역사서술의 모범이 되었다. 반소는 반고의 생존시에 그를 도왔고, 반고가 죽자 황제로부터 사서를 완성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정숙한 사생활과 학자로서의 명성 덕분에 반소는 황후의 시종이 되었다. 101년 황제에게 자신의 작은 오빠 반초(班超) 장군을 집에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려 귀향시켰다. 반초는 중앙 아시아에서 30년이 넘도록 특별 군사업무와 식민지업무를 보면서 귀향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소는 아름다운 시와 수필들을 지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여계 女誡〉이다.

중국 고대 10대 미녀중 재주가 가장 출중한 미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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