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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소리 없는 지휘자

작성자이윤재님|작성시간16.10.22|조회수321 목록 댓글 0

* 반주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소리 없는 지휘자

 

성악가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등을 반주하면서 ‘반주’를 하나의 예술 영역으로 격상시켜 놓은 영국의 거장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Gerald Moore)는 그의 저서 <부끄럽지 않은 반주자(The Unashamed Accompani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 년 정도 지나자 이 어색한 나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느낌은 완전히 사라지고, 피아노 반주자란 ‘말없는 지휘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연주 무대에서 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든, 박수를 받든, 혹 인사조차 할 기회를 못 갖게 될 때이든, 이런 것들이 ‘훌륭한 음악을 만드는 일’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음악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야

 

국내 반주계의 대모, 반주의 명인 등의 수식어 다음에 늘 오르는 이름, 피아니스트 임헌원. 그녀는 아직 한국에 ‘전문 반주자’라는 영역이 생소한 시절이었던 1979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한양대 음대에서 반주법 강의를 시작하였고 서울대, 중앙대, 경희대, 서울시립대 출강, 1982년부터 성신여대 교수로 재임하면서 성신여대 대학원에 반주전공 석사과정을 국내 최초로 신설하여 본격적으로 전문 반주자들을 교육, 사회에 배출하였다.

“제가 서울대 음대 재학시절, 집이 지방이어서 어차피 멀었기 때문에 주로 연습실에서 많은 시간을 지냈어요. 연습하고 있다 보면 성악과, 기악과 학생들이 반주를 부탁하는 일이 많이 생겼지요. 그러다 입소문이 나서 국립오페라단 반주자 오디션을 보게 되었어요. 당시 지휘자이셨던 임원식 선생님 앞에서 토스카의 오페라 반주곡을 연주했는데, 선생님께서 제 연주를 들으시고는 “내일부터 당장 나오라.”고 합격점을 받아 대학 1학년의 어린 나이에 국립오페라단 반주자로 선임되었습니다.”

그 후 임헌원은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합창단과 김자경 오페라단 반주자로 활동하였으며 KBS, MBC, 동아방송, 기독교 방송 등 각종 미디어 매체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려 당시 독창회, 독주회 포스터가 나붙으면 ‘반주자 임헌원’이라는 글자는 쉽게 눈에 띄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KBS 합창단반주자로 있을때 ‘새마을 운동’ 노래를 녹음했어요.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직접 쓰신 사보를 보면서 반주를 했죠. 둘째 따님께서는 피아노를 부전공했는데 제가 피아노를 가르쳐주기도 했어요. 반주 활동을 하면서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나고 덕분에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반주자라고 하면 그림자처럼 솔리스트의 뒤에서 보조하는, 수동적인 역할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곡 하나를 반주할 때도 성악가만큼 연구하고, 악보를 분석하며 준비하는 임헌원에게 반주는 더 큰 세계였고, 문화적 배경이 다른 예술성의 실체를 접하고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전문적인 종합예술이었다. 자신이 느끼는 것과 사회적 인식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던 임헌원은 결혼 후, 성악가 이규도, 오현명, 박인수, 김청자와 함께 뉴욕, 시카고, 샌디애고 등 미국 주요도시 순회공연을 했던 ‘제1회 한국가곡의 밤’에 반주자로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면서 유학에 대한 마음이 더욱 커져만 갔던 임헌원은 뉴욕 맨해튼 음대 대학원 반주과에 한국 학생으로는 최초로 입학, 반주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김자경 오페라단에서 반주 활동을 했을 때 김자경 선생님께서 저에게 반주를 본격적으로 공부해보라고 처음으로 권유해주셨는데, 결혼하고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시도를 하게 되었지요. 당시 저에게는 세 살, 네 살, 다섯 살의 어린 자식들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유학에 대해 전혀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공부에 대한 저의 열망이 강했기에 남편도 쉽게 이해를 해주었습니다. 맨해튼 음대에 반주과 석사 과정이 신설된 지는 10년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우리나라 보다는 반주에 대한 연구가 많이 정립되어 있을 것 같았어요. 또한 유학을 통해 제가 반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요.

저는 한국에서 워낙 많은 반주 활동을 하였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유학시절 반주학 공부는 꽤 수월했습니다. 교수님들께서도 졸업하기 위한 2회의 연주를 1회로 줄여주실 만큼 제 경험치는 인정받았지요. 하지만 아침마다 세 아이의 도시락을 싸고 지하철 타고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집안 살림에 제 공부까지 병행했어야 해서 많이 힘들었어요. 공부하느라 바빠서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해서 아이들한테는 늘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학을 통해 그녀가 궁금했던 것들에 대한 해답은 얻지는 못했다. 오히려 자신이 하고 있는 음악에 대한 해답은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음반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국내 반주학을 정착시키고자 달려온 세월

 

유학 시절 교수로부터 메트 오페라의 오페라 코치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임헌원은 국내에 반주학을 정착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귀국하여 반주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과 연주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임헌원은 바리톤 프란츠 뮐러 호이저, 장-크리스토프 베노아(Jean-Christophe Benoit), 테너 에밀리오 놀리(Emilio Noli), 플루티스트 피에르-이브 아르토(Pierre-Yves Artaud) 내한 독창회 반주를 비롯하여 휴고볼프 리사이틀(Italiensch Lieder Buch 46곡 전곡), 한국예술가곡연주회, 대한민국 음악제 실내악의 밤, 아시아 성악가의 밤, 88 서울올림픽 해외 홍보를 위한 미주 순회 공연, KBS 콘서트 오페라 아리아의 밤, 한·일 친선 합동 연주회 등에서 반주자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녀는 스승격인 오현명, 안형일, 이경숙, 이정희교수들의 반주를 시작으로 젊은 세대인  박성원, 박수길, 김성길의 반주를 하다가 그들의 제자들을 반주하기에 이르렀다.

“솔로이스트와 반주자간의 완벽한 협력을 통해서만 만족할 수 있는 예술적 경지에 달하는 연주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반주자는 솔로이스트가 선택한 작품에 대해 때때로 매력을 못 느끼더라도, 훌륭한 연주회를 위해서라면 솔로이스트의 예술적 특징과 작품에 대해 올바르게 파악하고 항상 공감할 수 있어야 해요. 이 점을 실패하면 솔로이스트는 불리한 위치에 있게 되고 예술성 추구는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반주자가 연주에 필요한 모든 기교적, 음악적 섬세함을 중요하게 지켰다 할지라도 상상력이 부족하면 생동감이 사라져버린 음악이 되어 진정한 예술의 높은 경지까지 갈 수 없지요.

예를 들어 바흐의 작품 중에는 18명의 오케스트라에 의해서, 그리고 작은 인원의 합창단에 의해서 연주되었지만, 오늘날 대형 콘서트홀에서는 현대적 오케스트라와 거대한 합창 소리로 구현되기 때문에, 바흐 작품의 음악 스타일을 우리 시대의 스타일로 바꿀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반주자는 음악 자료를 꾸준히 수집하면서 스타일 면에서 자신의 비중을 연구해야 해요. 즉, 작품의 내재적 스타일, 작곡 당시 시대적 연주 스타일, 그리고 오늘날의 연주 스타일 간의 적절한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반주에 대한 임헌원의 오랜 세월 노력이 열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성신여대 대학원 음악학과에 반주 전공을 개설한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해외에서 반주 전공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연주자들이 있었지만, 순전히 국내에서 공부한 반주 전공 석사학위 소지자를 배출한다는 의미에서 당시 음악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 후 임헌원은 한국반주협회와 한국반주음악연구소를 설립하고 해마다 정기연주회, 기획 공연을 통해 기악 연주자, 성악가들과 함께 현재까지 100여 회 이상의 음악회를 주최와 주관을 하였으며, <Schubert Lieder Vol.1, 2>, <슈만 ‘Liederkreise’ Op.39 전곡 반주>, <슈베르트 & 볼프 ‘괴테의 시’ 반주>, <한국예술가곡 피아노 반주>, <이탈리아 예술가곡 피아노 반주> 등을 레코딩하였다.

“한국반주음악연구소는 2003년 설립이후, 청소년 음악회, 세계음악축제, 오페라 콘서트, 러시아 Artiada 세계음악축제 참가, 차이코프스키 가곡 페스티벌 104곡 전곡, 세계연가곡페스티벌 등을 열어왔으며 지난 2014년에는 세계예술가곡 페스티벌을 개최하여 성악가들과 함께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스페인, 한국 가곡 등의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한국반주음악연구소 연구생들은 세계 유수 음대 석사 과정에서 교육하고 있는 커리큘럼에 따라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있고,석사과정 이후에도  반주자로서 역량을 갖추어 성악가, 기악가와 다양한 연주를 하는 사회인으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반주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필수요소들에는 지적 배경, 능숙한 기교, 그리고 타고난 음악적 이해력이 있어요. 일각에서는 음악적 통찰력이 부족하거나 기교적으로 뛰어나지 못하다는 이유로 솔로이스트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반주자의 길을 권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권고는 음악에 대한 해를 끼치는 것뿐만 아니라 음악도들의 발전과 앞으로 그들의 직업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죠. 따라서 훌륭한 전문 반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피아노 정규 교육과정을 높은 수준으로 이수하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임헌원은 이와 같은 음악계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러시아 국제 예술위원회로부터 러시아 국민 감사장을 받았고, 한국음악협회 주최 한국음악상, 한국음악평론가 협회가 수여하는 서울음악대상, 예총 예술문화상 음악부문 대상과 함께 제43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한국반주음악연구소 소장과 한국반주협회 명예회장, 수원대 음악대학원 피아노반주 전공, 일반대학원 반주전공 박사를 담당하는  객원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반주자 스스로 역량을 키워서 자신의 음악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언젠가 부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6명의 성악가들과 함께 한 ‘가곡과 아리아의 밤’에서 반주를 맡아 연주하고 있었는데, 공연 도중 갑자기 정전이 된 적이 있었어요. 순간 눈앞의 악보가 보이지 않고 무대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변했지만, 솔로이스트는 계속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저도 함께 반주를 했어야 했지요. 당시 ‘세빌리아 이발사’에 나오는 ‘만물박사의 노래’의 빠른 부분을 반주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악보를 대부분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솔로이스트들이 리허설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가 실제 공연에서 몇 페이지를 뛰어넘어 부르기도 해요.

저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반주자는 솔로이스트처럼 외울 정도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과 함께, 연주회에서는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지만 반주자가 모든 것을 대비하여 연주회를 이끌어갈 의무가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어요. 따라서 노련한 반주자는 지휘자와 같은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며, 이들의 차이는 반주자의 경우 지휘를 하지 않는 것처럼 지휘를 해야 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플 시간도 없이, 슬럼프도 모르고 바쁘게 달려온 그에게 드디어 인터미션 같은 휴식이 강제(?)로 주어졌다.

“3년 전, 천안 하늘샘아트홀에서 공연이 있었어요. 세계예술가곡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온 공연이었는데, 전반부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다 넘어졌는데 팔목이 브러져서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요. 게다가 그동안 받아왔던 한국문화예술진흥기금 신청이 통과되지 못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이제 그만 쉬라고 하시나보다.’ 하는 생각에 오히려 행복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1년후 다시 팔을 회복하게되서 꾸준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에 대한 행복감, 반주가 즐거웠기 때문에 계속 해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각 나라의 언어로 된 시를 피아노로 표현하는 묘미, 몸의 각 부분에 힘이 걸리지 않도록 릴렉스 하면서 호흡을 던지듯 피아노와 대화는 것이 너무 좋았죠. 저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전달하는 사명을 가진 것 같아요. 앞으로 한국반주음악연구소의 비전도 ‘반주자들의 역량을 키워서 자부심을 갖고 사회활동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처음의 목표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연주회를 기획하고 만들어 내는 것은 이제 후배들이 물려받아서 했으면 하네요.”

50여 년의 시간을 ‘반주’ 하나만 바라보고 연구해 온 세월. 그간 국내에서는 반주자에 대한 인식이 솔로이스트와의 ‘두오’ 연주라는 타이틀이 붙을 만큼 반주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된 것이 아닐까? 뜻밖에도 임헌원은 그런 명칭의 변화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반주자 스스로가 역량을 키워서 자신의 음악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발전이 있습니다. 자신이 반주하는 작품에 대해 솔로이스트만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하모니를 이루어서 하나로 표출되어 나올 때 청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요.”

임헌원은 지난해 바리톤 정 경과 함께 오페라마 이탈리아 가곡 앨범 <Claudio Jung ITALIA>를 출시하였는데, 이들이 함께 한 ‘Caro mio ben(내 사랑)’을 들어보면 피아노 반주가 솔로이스트를 든든하게 받쳐주면서도 함께 2중창을 하듯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따뜻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반주하는 작품에 대해 성악가만큼이나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녀만의 분명한 철학이 음악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오는 11월 27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는 임헌원과 바리톤 정 경이 함께 하는 흥미로운 무대가 열린다. ‘바리톤 정 경, 제주해녀 한국 미국 투어 리사이틀’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문화유산인 ‘제주해녀’의 가치를 뉴욕의 심장부에서 공연함으로써 세계에 알리려는 취지로, 카네기홀을 시작으로 텍사스 트레드어웨이홀, 그리고 11월 대전 공연으로 이어져 임헌원 교수와 함께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된 것. 특별히 제주해녀를 위한 창작헌정곡 A. Aldo의 ‘바다를 담은 소녀’ 연주에서는 발레리나 이은선과 한유진이 함께 출연할 예정이다.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가곡을 피아노로 노래하며 살아가고 있는 임헌원. 그녀의 인생은 한 편의 시로 승화되어 다음의 연(聯)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피아모 음악 (2016년 10월호) 글·윤정훈 편집장 | 사진·조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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