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편운과 혜산 문학관을 둘러보며
지역문인협회의 특강 초청으로 얼마 전 문학기행에 동반한 적이 있었다. 먼저 들린 곳은 편운 조병화 시인의 오래된 생가와 문학관이었다. 안성 초입의 전원마을 근처의 야산 자락에 자리한 문학관은 오래전 한 번 들렀던 곳이었다. 그때만 하여도 주변은 논밭에 농가만 몇 채 있었던 기억인데 지금은 가내공업공장과 창고, 그리고 식당과 같은 서비스업 등이 들어선 농촌 부락을 형성하여서 산천의구의 감상이 일어났다.
편운의 문학관은 예전에는 사립 문학관으로 넉넉하고 부유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간 많이 세월의 때가 묻으며 대부분의 한국 문학관들이 겪고 있는 일처럼 사정이 녹록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 전 한국의 문학관 지원사업 공모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곳이 선정되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우리가 찾았던 날은 상주 큐레이터도 없는 이곳에 미리 약속이 되었던지 자원봉사자이자 편운을 연구하는 연구원이 따뜻하게 맞이하여 설명에 정성을 쏟았고 최근에는 너무 낡아서 위험해진 편운재도 특별히 문을 열고 개방해 주었다. 생각해 보니 오래전에는 마음 놓고 들어가 보았던 기억이 난다.
문학관의 어제는 한 시인의 체취가 살아 있는 사적인 공간이었다. 조병화 시인이 직접 쓰고, 그림을 그리고, 제자와 문인들을 맞이하던 장소였다. 특히 시인의 삶과 창작의 중심에는 편운재 가 있었다. 어머니 묘소 곁에 세운 작은 묘막에서 출발한 편운재는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그의 문학적 수도원이었다. “살은 죽으면 썩는다”라는 어머니의 말을 벽에 새겨둔 채, 그는 그곳에서 고독과 허무를 시로 길어 올렸다. 수많은 시집과 산문, 그림들이 그 작은 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과거의 편운동산은 문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정호승, 허영자 등 후배 문인들이 찾아와 술잔을 기울이고 문학과 인생을 논하던 자리였다고 한다. 문학은 살아 있는 교류였고, 문학관은 아직 박제되지 않은 인간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조병화문학관은 조금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시설은 더 정돈되고 전시 역시 체계화되었다. 시인의 유품과 육필원고, 그림과 훈장들이 정갈하게 배열되어 있고, 편운문학상의 역사도 한눈에 볼 수 있다. 관람객은 조용한 전시실에서 시인의 생애를 따라가며 한국 현대시의 한 시대를 만난다.
하지만 동시에 세월의 그림자도 느껴진다. 사립문학관이 지닌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많은 사립문학관들이 그렇듯, 운영은 대부분 유족이나 소수 관계자의 헌신에 기대고 있다. 지방의 외진 위치, 부족한 운영 예산, 전문 인력의 부재, 제한된 홍보는 늘 어려움으로 남는다. 문학관이 살아 있는 문화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기획전과 교육 프로그램,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이 필요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방문객 수가 줄어들면 유지 자체가 부담이 되고, 결국 “보존”만 남은 채 “현재의 문학”과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여전히 특별하다. 대형 공공박물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체온이 있다. 편운재 마루 앞에 서면 들판의 바람 소리가 들리고, 청와헌 앞에서는 개구리 울음이 상상된다. 문학은 결국 거대한 담론 이전에 한 인간의 외로움과 꿈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이곳은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문학관을 나서는 길, 나는 생각했다. 사립문학관은 단지 한 작가를 기념하는 장소가 아니라 한국 문학의 마지막 인간적 보루일지도 모른다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보다 적극적으로 보존과 운영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젠가 이런 공간들을 하나둘 잃게 될 것이다.
얼마전 심사를 맡았던 문학관 지원 사업에는 24 곳이 신청하여 12곳이 선정되고 각각 2000만원이 배정된다고 하였다. 대상도 적었고 금액도 적었다. 편운동산에는 아직 시가 살아 있었다. 다만 그 시를 오래 지켜낼 사람들의 손길이 앞으로 더 필요해 보였다.
편운재를 뒤로하고 우리는 혜산 박두진 문학관으로 버스를 한참타고 이동을 하였다. 박두진 시인의 가계와는 인연이 따른다. 시인의 생전에 나는 그분을 개인적으로 상면한 적이 없었는데 친구의 소개로 맏 자제를 교유하게 되었다. 사업을 하는 맏자제는 중견 기업인이었는데 문학예술과는 관련이 없었고 듣기로는 둘째가 예술가인데 해외에 이민을 나갔다고 하였다.
아무튼 신촌 연세대학교 정문 건너편 높은 지대에 자리한 시인의 고택에는 그 맏이가 살며 지키고 있었는데 막역한 사이가 되고 보니 유명문인의 아들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시인의 기일이나 명절이면 제자와 문우들이 잊지 않고 찾아오는데 그 접대가 예사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시절이 달라져서 사람을 쓰며 손님접대를 하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고 그분이 수집한 동서고금의 희귀본들을 정리하는 일들도 보통이 아니었다. 특히 시인이 수집한 2000여점의 수석을 관리하는 일도 개인으로서는 과한일이라고 하는데 과연 넓은 안채를 가득채운 수석은 마루까지 넘쳐나고 있었다. 개인이 문학관을 지으려고 해도 건립은 감당하겠는데 사람을 쓰고 유지하는 일은 감당이 될듯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때만 하여도 시비하나 건립을 못하고 있는데 당시만 하여도 법령이 꽤 까다로웠던 것 같다.
이런저런 사연을 나누며 교유를 하다가 최근에는 연락이 없었는데 고향인 안성시에서 시립 문학관으로 건립을 하여 문학단체를 마지한다고 하니 내 가슴은 뛰고 궁금증도 더하였다.
아무튼 지나간 기억을 반추하며 멀리 산등성이가 흐릿하게 겹쳐질 때쯤, 나는 박두진문학관 에 닿았다. 청록파 시인 박두진 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문학관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 규모에 비해 내부는 깊었다. 육필원고와 시집 초판본, 생전 사진들 사이를 걷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해야 솟아라”를 외치던 한 시인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의 시는 자연을 노래했지만 단순한 목가가 아니었다. 생명과 신앙, 민족과 우주의 기운이 뒤섞여 있었다. 전시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조차 마치 그의 시어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문학관에서 내 발길을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앞에서 말한 인연 때문이랄까 ‘수석’이었다.
시인은 말년에 수석에 깊이 몰두했다. 그 돌들은 장식품이 아니었다. 어떤 것은 산맥 같았고, 어떤 것은 파도 같았으며, 또 어떤 것은 오래된 수행자의 얼굴 같았다. 그는 강가와 산길을 다니며 돌을 주워왔고, 그 안에서 우주의 형상과 신의 흔적을 읽어내려 했다. 박두진에게 수석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창조된 시”였던 셈이다.
그의 수석론은 단순한 애석(愛石)의 차원을 넘는다. 돌 속에서 자연의 영성과 조형미를 발견했고, 시와 돌이 하나 되는 ‘시석일여(詩石一如)’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해진다.
나는 유리장 안에 놓인 한 수석 앞에서 오래 멈추었다. 검푸른 돌 하나가 마치 풍랑 속의 섬처럼 서 있었다.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 평생 붙들고자 했던 것은 언어 이전의 침묵이 아니었을까. 시는 말이지만, 결국 말할 수 없는 세계를 향해 가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돌 앞에 앉았는지도 모른다. 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문학관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유족들은 지금도 문학관과 시인의 자료 보존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다만 자녀분들의 구체적인 근황은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이름은 세상에 남았지만, 가족들은 조용히 그의 시간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생각해보면 문학관은 단순히 죽은 문인을 기념하는 장소가 아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시대를 견디며 자기 언어를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삶의 박물관이다. 특히 박두진문학관은 자연과 신앙, 시와 돌이 한 공간 안에서 묘하게 공명하고 있었다.
문학관을 나오는 길에 마당의 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 없는 작은 돌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아마 박두진이라면 그 돌 속에서도 산과 바다와 하늘을 읽어냈을 것이다.
자료를 살펴보니 박두진문학관은 경기 안성시가 건립한 시립 공공문학관으로, 2018년 11월 개관했다. 단순한 전시시설이라기보다 안성이 낳은 대표 시인인 박두진의 문학세계를 를 지역 문화자산으로 보존하고 시민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박두진은 안성 출신이라는 지역적 상징성이 매우 큰 시인이었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청록파의 한 축을 이루었고, 자연과 생명, 신앙과 민족정신을 노래한 대표 시인이었기에 안성시에서는 오래전부터 시비 건립과 문학길 조성 사업 등을 추진해 왔다. 실제로 1998년에는 안성 시립 보개도서관 앞에 박두진 시비가 세워졌고, 이후 문학적 기념사업이 점차 확대되었다.
그러다 2010년대 들어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 문인을 활용한 문화관광·문학진흥 사업을 본격화하면서, 안성시 역시 박두진문학관 건립을 추진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한 문인을 추모하는 차원을 넘어, 지역 정체성과 문화 인프라를 강화하려는 정책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안성맞춤랜드와 남사당 문화권, 금광호수 일대 관광자원과 연계하려는 구상도 있었다.
이 문학관은 단순 전시 기능에 머물지 않고, 현재도 안성시가 운영하는 공공 문학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시민 대상 문학 프로그램, 체험 행사, 문학 산책, 지역 문인 지원 사업, 학교 연계 교육 등이 꾸준히 열리고 있으며, 한국문학관협회 공모사업에도 여러 차례 선정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박두진문학관이 ‘기념관’보다 ‘살아 있는 지역 문학관’을 지향한다는 데 있다. 대도시의 거대한 국립문학관과 달리, 이곳은 지역성과 인간적 체온을 유지하려 애쓴다. 박두진문학길, 시비광장, 금광호수 주변 풍경까지 하나의 문학적 공간으로 연결해 놓은 것도 그런 이유다. 시인의 시가 책 속이 아니라 실제 자연 속에서 읽히기를 바랐던 셈이다.
하루해가 뉘엿거릴 때쯤에야 문학행사는 끝이 났다. 오랜만에 이런저런 인연이 긷든 문학행사를 마치며 버스에 몸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