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AI시대의 에피소드
김 유 조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은 어떤 분이 자기가 태어난 연대를 억울해하는 탄식을 들은 적이 있다. 한두 해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일본어를 터득했을 텐데 아쉽다는 것이었다. 꼭 친일 성향이라고 매도할 성질은 아니고 외국어를 한둘 알아두는 것은 개인의 의식과 시야를 넓히는 의미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서구에서도 대략 외국어 한두 개를 아는 것은 어지간한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기본이 아닌가싶다.
교과서를 통해서 처음 영어를 익힌 우리세대의 영어(특히 회화)에 대한 한계 같은 것도 아쉬운 생각이 든다. 어릴 때 미군부대에 다니는 사람이 집안에 있었는데 미군을 데리고 와서 놀다가곤 할 때 나를 좀 끼워주었더라면 하는 엉뚱한 원망도 있다. 머리가 굳은 다음에 교과서로 시작한 세대의 푸념이다.
나라가 총체적으로 가난하고 개인의 가계도 어려울 때 부모님은 생계를 타개하는 중대사는 주로 일본말로 나누었다. 심각한 얼굴로 난관 타개를 의논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은 느낌으로 감지할 수 있었으나 내용은 알 길이 없었다. 두 분은 사실 일찍이 만주국으로 가서 가업을 꽤 크게 일구고 심지어 고향의 똘똘한 청년들을 불러와서 일자리도 마련해준 정황을 나중에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만주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아니었고 지금 기준으로 보면 친일 쪽에 기운 혐의도 있다 하겠지만 뒤로는 항일 독립군에게 독립자금도 많이 댔다고 한다. 일종의 보험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논란을 할 계제는 아니다.
만주국에 있다 보니 승승장구라는 일제의 선전과는 달리 패망을 미리 감을 잡고 어머니는 종전 두어해 전에 귀국열차를 탔고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 귀환을 했는데 데려다 쓴 고향의 젊은이들은 공장과 기업을 무상으로 물려받고 남아서 조선족이 된 모양이다. 고향의 일가친척 이산가족 중에는 그런 일로 불평하는 소리를 나도 커서 들었다. 조선족으로 남은 분들은 나중에 또 어엿한 중국공민증으로 고향을 밟기도 하였다.
부모님이 갖고 온 주식에는 ‘미스비시 중공업’ 등이 있었으나 나중에 모두 불소시게로 그 역할을 마쳤고 나라가 어려우니 민심은 각박하여 고향에서 사기를 몇 차례 당하고는 일본말로 신세타령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 분들이 자식에게 언젠가는 요긴할 수도 있는 일본말을 전수하실 여유는 없었고 또 그런 혜안이 있었더라도 일본어를 가르칠 능력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영문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오래 강단을 지키다가 정년퇴임을 가까이 할 때쯤 마지막 남은 연구 년은 미국이 아닌 중국 연변에 있는 대학교에서 보낼 생각을 한 것은 부모님의 발자취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과정에서 글쓰기의 자료를 얻을 수도 있겠다는 계산 같은 것도 있었다. 아니 그런 계산 같은 것 보다는 무언가 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다만 연구 년 일 년을 모두 그곳에 머물지 않고 한학기로 한정하고 나머지는 뉴욕으로 가버려서 소기 한 목적은 달성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연변에 처음 가서는 우선 ‘연변과기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틈나는 대로 부모님이 계셨다는 목단강 시(무단장 시)를 찾고자 했으나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당시의 중국은 교통체계부터 사회 인프라가 만만치 않았다. 야간열차를 밤새타고 찾아간 목단강시에는 마침 교민 조직이 있어서 나이 많은 분들을 만나고 심회를 토로했으나 그들도 만주국 시대는 이미 사라진 전설이 되었고 중국공안에서도 만주국이라는 표현 자체를 ‘위만주국’(가짜 만주국)이라고 하면서 금기시 하는 형편이었다. 삼륜차를 타고 넓은 목단강시를 돌아다녀보아도 옛 고구려, 발해의 유적은 보여도 일제치하의 위만주국 흔적은 눈을 닦아도 볼 수가 없었다.
나를 안내하던 연변의 조선족 교수들도 먼 흑룡강성의 목단강시 보다는 같은 길림성 장춘의 위만주국황제 박물관으로 나의 주의를 돌렸고 나도 두만강 가까이 있는 봉오동 전투지 등을 돌아볼 일에 더 이상 겨를이 없었다.
아쉬움을 남기고 연구 년의 나머지 학기를 채우러 아들이 사는 뉴욕으로 가서는 손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많이 노력을 하였다. 유치원도 비싼 한국어 유치원을 보내고 대화도 우리말을 위주로 했으나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별로 효과가 없었다. 나중 이야기지만 같은 미국의 외손녀들은 우리말을 잘 한다. 남녀 간에 언어의 재능이 조금 다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딸이 먼 여행을 힘들어하는 부모를 보러 바쁜 중에도 짧게 찾아왔다. 함께 시골 고향을 찾으며 내가 여기까지 지난 이야기를 하였더니 재미작가 이민진의 『파친코』 읽은 이야기를 하였다. 『파친코』의 주인공은 1세대가 만주가 아닌 일본으로 갔고 다시 화자인 3세대는 미국으로 가서 서술을 하는 형식인데 참으로 인상적이었다고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딸이 내 이야기를 듣고 다음날 아침에 영어로 단편 소설을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정확하게는 AI가 만든 것이었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 『파친코』의 화자처럼 ‘사가 saga'를 만들고 싶어서 도메인을 설정하였다는 것이다. 딸은 펜실베이니아의 대학병원에 여의사로 오래 있다가 스카우트되어 워싱턴DC 근교 메릴랜드의 글로벌 제약회사에서 인류의 적을 퇴치하느라고 분투노력하고 있는데 지금 AI의 위력을 십분 활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의대에서 배운 바 전혀 없는 코딩 단계를 그간 외주에 의뢰해왔는데 이제는 AI를 조력자로 쓴다고 한다. 하물며 문명의 이기를 어찌 문화(창작)에 활용하지 못하겠는가.
내가 AI시대도 이제 '생성지능시대'로 진입해서 진화의 변곡점을 넘어섰다고 아는 체 했더니 그게 바로 Agentic AI혹은 AI Agent 시대로 진입이 된 현상이며 이제는 프롬트 즉 지시를 받아야 움직이던 AI가 자기 스스로 능동적인 방향을 설정 제시하고 행위의 주체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루 밤 사이에 뚝딱 딸이 만든 '무단장 SAGA'에는 오래전 관동군 사령부의 활동도 들어가 있고 당시의 전황과 생활상도 포함되어서 재미있고도 기이하였는데 이제는 잠시 창작 툴맵에 저장해 놓을 모양이었다. 작가?는 당분간 현업에 바쁠 테지만 AI 에이전트가 새로운 요소들을 스스로 가미 확장하여 대서사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아마존에서 AI에이전트가 출판을 하여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