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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서양사]에라스뮈스 - 종교개혁에서 온건 노선을 취한 인문주의자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03.01|조회수558 목록 댓글 0

에라스뮈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죄악과 범죄가 양초로 봉인된 작은 종이 조각이나 양피지 조각으로, 여러분이 갖다 바치는 몇 푼의 돈이나 밀랍 조각상으로, 그리고 얼마간의 순례 여행을 다녀옴으로써 단번에 씻겨질 수 있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완전히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에라스뮈스의 [기독교도 병사의 휴대서] 중에서)

 

 

그리스, 라틴 고전의 인문정신과 기독교의 융합을 꿈꾸다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출생 배경을 평생 민감하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어린 시절의 그가 고독했거나 남달리 불행했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에라스뮈스를 성 레빈 문법학교에 보내 교육시켰다. 14살 무렵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후견인은 에라스뮈스를 수도원에 맡겼다. 문법학교와 수도원에서 라틴 고전학과 신학을 공부한 그는 21살 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다. 1492년 사제가 된 에라스뮈스는 이듬해 캉브레 주교 베르겐의 비서가 되었고 1495년 유럽 최고의 학문 기관인 파리 대학 신학부에 들어가 1499년까지 머물렀다.

 

베르겐 주교의 재정 후원이 흔들리면서 에라스뮈스는 부유한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해야 했는데, 가정교사로 맺은 몽트조이 공 윌리엄 블룬트와의 인연으로 1499년 영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영국 방문은 에라스뮈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국에서 토머스 모어, 윌리엄 그로신, 존 콜레트 등 휴머니스트들과 만났고 장래의 헨리 8세와도 만났다. 그는 특히 그리스 문화를 숭배하는 영국 휴머니스트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고전 그리스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여 당대 최고의 그리스 문헌학자가 되었다. 대륙의 분위기와 달리 학문적 관용이 상대적으로 넓은 영국 방문을 계기로, 그는 고전에 담긴 자유로운 인간적 이상과 기독교의 융합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게 되었다.


그 과업은 구체적으로는 그리스 및 라틴 고전과 기독교 문헌의 번역과 편집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성 제롬, 성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의 저작집을 편찬하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대역 성경 번역서를 펴냈고, 라틴 고전과 그리스 고전에서 인용한 격언들을 모아 [격언집](초판 1500년)으로 펴냈다. 단순히 격언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 구절의 의미를 설명하는 일종의 논평을 덧붙이고, 비슷한 구절을 찾아 제시했으며, 당시의 종교, 정치, 사회 상황과 관련 있는 논평도 덧붙였다. [격언집]은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휴머니스트들의 중요한 참고서 역할을 했고, 에라스뮈스의 명성을 유럽 전역으로 퍼뜨렸다.

 

 

금서가 된 베스트셀러, [우신예찬]


1504년부터 유럽 각지를 여행하던 에라스뮈스는 이탈리아에서 상당 기간 머무르다가 헨리 8세가 즉위한 1509년 영국으로 향했다. 영국행 도중 알프스를 넘으면서 그는 수도원 생활을 풍자한 작품을 구상했다. 영국에 도착한 뒤 토머스 모어의 집에 머무른 일주일 동안 그는 작품을 완성했다. 바로 1511년에 출간된 [우신예찬](Moriae Encomium)이다. 1515년에는 한스 홀바인 2세가 이 책에 삽화를 그려 넣기도 했다. 어리석음의 여신인 모리아가 화자(話者)로 등장하여 어리석음을 통해 진정으로 현명한 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글이다.

 

 

“아마도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지나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거만하고 화를 잘 내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600개에 달하는 논거를 한 조(組)로 묶어 내 주장을 취소하도록 몰아세울 것이다. 내가 그것을 거절하면 그들은 즉각 나를 이단자로 선언할 것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방법은 난해한 것들 가운데 가장 난해한 것을 더욱 난해하게 만들 뿐이다.”

 

에라스뮈스는 어리석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광대 같은 부류의 바보와, 가장 똑똑한 체하는 지식인이나 현자 부류의 바보가 있다 말하면서, 똑똑한 체 하는 부류의 바보들을 풍자한다. “광대들은 군주에게 진실을 받아들이게 하고, 군주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그들을 즐겁게 하는 놀라운 일을 해치운다. 신들은 오직 이런 광대들에게만 진실을 맡겨 놓는다.” 에라스뮈스는 문법학자, 시인, 법학자, 신학자, 군주, 궁정인, 교황, 추기경, 주교, 수도사, 신부 등 그 시대의 지식인과 지도층을 모두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우신예찬]이 금서(禁書)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대 유럽의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은 불온하다고 지목될 수 있는 부분이 삭제되거나 저자의 이름이 지워진 상태로 널리 유포되었다.

 

 

마르틴 루터와의 관계, ‘격렬한 언동보다는 정중한 중용’ 지켜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의 논제를 못 박아 걸었다. 교회의 면죄부 판매 행위를 규탄하면서 루터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펼친 이 논제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역사적 계기로 일컬어진다. 루터는 에라스뮈스를 비롯한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을 자신의 지원 세력으로 확보하려 했다. 그래서 1519년 3월 에라스뮈스에게 공개적인 지지를 당부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이에 대한 에라스뮈스의 답장의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그리스도 안의 내 소중한 형제여! 당신의 책들이 이곳 루뱅에서 얼마나 큰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당신의 저작들이 저의 후원으로 쓰였다고도 하고, 또는 내가 당신 파당의 지도자라 하기도 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증언하기를, 당신의 책은 읽은 적도 없고, 당신의 주장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중립을 지킬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할 수 있는 한 학문의 부흥에 기여할 생각입니다. 나는 격렬한 언동보다는 정중한 중용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에라스뮈스는 루터가 박해 받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루터의 안전을 위한 진정서를 대주교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루터가 온건한 태도를 취하기를 바랐다. 그는 교회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옳다고 보았지만, 은총, 자유의지, 예정설 등의 중요한 교리에서 루터와 의견을 달리했다. 무엇보다도 에라스뮈스는 루터의 격렬한 언동이 교회 내 강경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게 되리라 우려했다. 1520년 여름 교황은 루터를 이단자로 선언했고 루터는 교황의 칙서와 교회법을 불태워버렸다. 이후 에라스뮈스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교회 측은 루터에 반대하지 않는 것이 곧 루터에 동조하는 것이라 보았고, 종교개혁 진영은 그가 보다 분명하게 루터 편에 설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루터가 [노예의지론]과 함께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귀하의 오만하고 무례하고 반골적인 본성으로 인해 온 세상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귀하는 폭풍이 잠잠해지는 것을 저지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라도 되는 듯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루터파와 기성 교회의 보수적 입장 사이에서 설 자리를 잃은 ‘관용과 타협의 정신’


 

에라스뮈스는 루터파로 살지도, 기성 교회에 종속되어 살지도 않았다. 에라스뮈스의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휴머니스트들이 루터파에 가담했고 에라스뮈스는 고립되어 갔다. 교회와 보수파는 에라스뮈스가 루터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고 교회의 물질주의와 부패를 지적한 것을 두고 에라스뮈스를 공격하고 탄압했다. 에라스뮈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지독한 이상주의자였다. 보편적 인간성에 기초한 미덕에 대한 믿음, 중용과 관용을 통한 개혁이 가능하다는 믿음, 위대한 고전 저작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통해 인간이 좀 더 사려 깊고 선해질 수 있다는 믿음. 이보다 더 이상적인 믿음, 그래서 실현되기 힘든 믿음이 또 있을까.

 

이것이 에라스뮈스의 비극이다. 엄청난 학식, 예리한 비판 정신, 보편적 인간성과 기독교의 미덕에 대한 드높은 이상, 온건하고 합리적이며 타협과 관용을 중시하는 태도. 이러한 것들은 루터를 비롯한 급진파와 기성 교회의 보수적 입장 사이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에라스뮈스의 만년은 좌절감으로 깊게 물들어 있었다.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이 공개 석상에서 소개될 때, “이 분은 에라스뮈스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는 분”이라 소개되는 것이 큰 영광일 정도였지만, 그렇게 큰 명성도 서로를 적대시하는 배타적인 두 진영의 극단적 대립 앞에서는 무색해졌다.

 

이러한 에라스뮈스의 비극이 과연 그 시대만의 비극일까? 이것은 일종의 자유주의 지성(知性)이 겪는 보편적 비극이 아닐까? ‘최초의 의식 있는 세계주의자이자 유럽인.’(슈테판 츠바이크), ‘최상과 최대’(멜란히톤), ‘비할 데 없는 인간이자 불멸의 박사.’ 에라스뮈스에 대한 많은 당대 및 후대인들의 칭송은 대단하다. 이러한 칭송의 요인에 대해서는 에라스뮈스 전기를 쓴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정답일지 모른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이상만이 영원한 회귀성을 갖기에, 에라스뮈스의 이상은 평가절하 되지 않는다.” 1536년 7월 12일 스위스 바젤에서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그의 마지막 말은 “하느님이시여!”였다.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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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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