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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얼마 후 그는 체사레 보르자에게 실망하는데,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보르자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하여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거듭하다가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군주론]에서도 보르자를 직접 거론할 때는 “교황의 아들로 태어난 운에 너무 의존했다”고 차갑게 평가하고 있다. 이밖에 마키아벨리는 교황 율리우스 2세,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 등 각국의 지도자들을 두루 만나보았으며, 그들의 인물됨과 행동방식을 그리스-로마 고전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교해가며 통치술과 국제정세, 정치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차곡차곡 다져갔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관대한 줄만 알았던 운명의 여신(포르투나)은 끝내 변덕을 부리고 말았다. 1512년, 교황이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대결했는데, 이 과정에서 친프랑스적이었던 피렌체가 스페인군에게 유린된 것이다. 스페인군은 단순히 피렌체를 점령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망명해와 있던 피렌체의 옛 지배자 메디치 가(사보나롤라는 이들이 몰락한 틈을 타서 집권했었다)를 복귀시켰다. 메디치 가문은 명목상 공화정부일 뿐 사실상 독재적으로 피렌체를 다스리는 옛 체제를 되살리고, 기존의 공화정부 참여자를 숙청했다. 이 와중에 마키아벨리 역시 해임되었을 뿐 아니라, 메디치 가를 노린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투옥되고 만다. 마키아벨리는 밧줄로 묶어 24시간 매달아 두는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혐의를 부인했으며,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유능한 장관도 촉망 받는 학자도 아니었으며, 재산의 대부분을 몰수당한 채 산트 안드레아의 작은 농장에서 칩거하는 신세가 된다.
'더 큰 도덕'을 위한 '부도덕'
 이처럼 몰락한 마키아벨리였으나, 한편으로 바쁜 공무에서 벗어나 그 동안 갈무리하고 닦은 지식과 지혜를 차분하게 글로 옮길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생전에 출간된 것은 [벨파고르](1515년), [안드리아](1517년), [만드라골라](1518년) 같은 문학 작품과 [전술론](1520년) 등의 군사학 서적 정도였으나, 대표적인 저작은 [군주론]과 1519년에 쓰고 1531년에 출간된 [로마사논고(원제는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논의])]. 그리고 1523년부터 죽을 때까지 집필했던 [피렌체사] 등이다.
마키아벨리는 찬란한 문화를 뽐내던 조국 피렌체가 침략자들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것을 보았고, 체사레 보르자나 사보나롤라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덧없이 몰락하는 것도 보았다. 마키아벨리 스스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 때문에 순식간에 한심한 처지로 전락했다. 그래서 그는 포르투나, 즉 운명의 힘을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다고 한다. 보르자는 너무 오만해서, 율리우스 2세는 너무 성급해서 포르투나의 일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포르투나의 강력한 힘은 아무리 철저히 대비를 하고 노력을 해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비관적 운명론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포르투나는 결국 여자일 뿐이다. 여자는 강한 남자에게 복종한다”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성차별주의자로 매장당할 발언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멋진 비유법이었다. 아무리 불운이 겹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성공한다는 것이다. ‘강한 남성적 힘(vir)’은 비르투(virtu), 곧 덕(德)의 속성이다. 덕을 잘 길러서 남보다 우수한 비르투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의 재목이며, 개인이든 국가든 더 우수한 비르투를 소유할 때 번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비르투에는 성실함, 공평함, 정직함 등 당시의 기독교 문화에서 장려하는 미덕도 포함되지만,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 같은 영웅들이 지녔던 용기, 대범함, 솔선수범함 등의 미덕은 잘 발휘될 수 없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하찮은 존재이며, 제 힘으로 뭘 하려기보다 그저 신에게 빌면 그만이라는 나약한 정신을 배양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로써 성공하려면 먼저 좋은 법과 좋은 군대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전제한 다음 정치와 행정, 외교 등에서 실패하지 않으려면 기독교적인 미덕은 잠시 잊어버리고 고대 영웅들의 비르투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고대의 영웅들은 때로는 거짓말도 하고, 잔혹한 살육도 저질렀다. 하지만 국가간의 중요한 협상을 할 때 정직함에만 얽매여서 자국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에도 적혀 있는 기본적 도덕률이다. 그러나 야심을 품고 쿠데타를 꿈꾸는 무리를 살육하지 않으면 지도자뿐 아니라 전 국민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도 자기 영혼이 지옥에 떨어질 것만 겁내서 손을 쓰지 말아야 하는가? 이처럼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는 마키아벨리의 메시지는 도덕 따위는 의미가 없다는 니힐리즘이 아니며, 더 큰 도덕을 위해서는 세세한 부분에서 악덕을 행할 필요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마키아벨리가 꿰뚫어본 정치의 본질이었다.
근대의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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