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세계 인물사

[동양사]샤 자한 - 무굴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이룬 제5대 황제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04.01|조회수654 목록 댓글 0

샤 자한

아내 뭄타즈 마할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낳은 타지마할로 유명한, 무굴제국 황제 샤 자한. 그의 치세에 무굴제국은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다. 그의 궁정에 온 외국 사절들은 궁정의 화려함에 크게 놀라고, 고도로 체계화되고 질서 잡힌 통치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는 황위 계승을 둘러 싼 골육상쟁의 비극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총애를 받은 셋째 아들

무굴제국 4대 황제 자항기르의 셋째 아들로 라호르에서 태어난 샤 자한(쿠람 시하브 웃 딘 무함마드)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다. 쿠람이라는 이름은 할아버지 악바르 대제가 직접 지어 준 것으로, 페르시아어로 ‘기쁘게 한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부터 샤 자한은 폭넓은 교양을 쌓았고, 10대 중반부터 원정에 참가하여 군사적 능력도 보여주었다. 16살 때 그는 무굴제국 건국자 바부르가 세운 카불의 요새에 군사시설을 짓는 일을 이끌고, 아그라 성의 건물들을 새로 축조하면서 건축에서도 일찍부터 재능을 나타냈다.


무굴제국의 황위 계승은 장자에게 당연한 권리를 주는 방식이 아니었다. 전공(戰功)을 세우고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황자(皇子)가 황위를 차지했다. 황위 계승을 둘러싼 음모와 반란은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이었다. 샤 자한의 황위 계승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자항기르 치세 말기에는 자항기르의 스무 번째 아내 누르 자한(재혼)과 그 오빠인 페르시아계 귀족 압둘 하산 아사프 칸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아사프 칸은 샤 자한의 장인이기도 했다. 샤 자한은 15살 때 아사프 칸의 14살 난 딸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뭄타즈 마할)과 정혼하고 1612년 혼인했다.

 

 

음모와 반란의 세월.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황제가 되다


샤 자한은 1617년 데칸 지역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어 제국의 남쪽 변경을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자항기르는 그런 아들에게 ‘세계의 용맹한 왕’(샤 자한 바하두르)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로써 쿠람이라는 본래 이름 대신 샤 자한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자항기르가 노약해진 사이 권력 투쟁이 치열해졌다. 자항기르의 장자 쿠스라우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눈을 멀게 하는 벌을 받았고, 둘째 아들 바르비즈는 병약한데다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리고 셋째 아들이 샤 자한, 넷째 아들은 샤야르였다. 누르 자한은 처음에 샤 자한을 지지했지만 샤 자한보다 만만한 샤야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누르 자한은 첫 번째 혼인에서 나은 딸을 샤야르와 혼인시켜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려 했다. 결국 1622년 샤 자한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자항기르는 마하바트 칸을 보내 이듬해 아들의 군대를 물리쳤다. 샤 자한은 데칸 지역에서 도망 다니다가 1625년에 겨우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었다. 샤 자한은 아들 아우랑제브를 자항기르에게 인질로 보내고 자신은 사실상 은퇴했다. 샤 자한의 반란을 진압한 마하바트 칸의 위세가 높아지자 누르 자한 세력의 견제가 시작되었고, 마하바트 칸은 1626년 반란을 일으켜 자항기르 황제를 사로잡았고 누르 자한도 투항해왔다.
 
그러나 누르 자한은 마하바트 칸을 안심시키는 한편 다른 귀족들과 마하바트 칸 사이를 이간질하는 데 성공했다. 마하바트 칸은 반란에 성공한 지 100일 만에 도망쳐 예전의 적이었던 샤 자한에게 의탁했다. 누르 자한은 자항기르를 구한 공으로 더욱 막강한 권세를 누렸지만 1627년 자항기르가 세상을 떠났고, 아사프 칸은 여동생이 아니라 사위 샤 자한을 지지했다. 샤 자한이 등극한 뒤 누르 자한은 연금 당했으나 평안한 여생을 보냈고, 마하바트 칸은 아지메르와 데칸 지역의 지방장관으로 일했다.

 

 

‘황궁의 보석’ 뭄타즈 마할과의 사랑

샤 자한은 1612년에 혼인한 아내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을 “용모와 성격에서 모든 여성들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 말하고 그녀에게 뭄타즈 마할, 즉 ‘황궁의 보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무굴제국 황제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종족 별로 황비를 들이는 것이 관례였고 샤 자한도 아내를 여럿 두었지만, 궁정 연대기 기록자들은 샤 자한과 다른 아내들의 관계는 ‘혼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그쳤으며 폐하의 무한한 관심과 애정은 오직 뭄타즈 마할만을 향했다’고 전한다.

 

또한 기록자들은 그녀가 ‘정치적 야심을 털끝만치도 품지 않은 완벽한 아내였다’고 기록했다. 이 점에서 그녀는 시아버지 자항기르가 총애했던 누르 자한(뭄타즈 마할의 이모)과 비교되곤 했다.

 

뭄타즈 마할은 19년의 혼인 생활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 가운데 여덟은 출산할 때 또는 유아 시절 사망했다. 뭄타즈 마할은 1631년 14번째 아이(딸 가우하라 베굼)를 낳다가 부르한푸르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는 데칸 고원 지역으로 원정을 떠난 남편을 수행하고 있었다. 샤 자한의 슬픔은 깊고도 또 깊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비통에 잠기기를 수십 일, 그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바뀔 정도였다.

 

샤 자한은 대리석, 벽옥, 수정, 진주, 에메랄드, 터키옥, 청금석, 사파이어 등 값비싼 자재와 장식재들을 아시아 각지에서 들여와 전대미문의 크고 화려한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중앙의 능을 완공한 것이 1648년, 묘역 전체는 착공 22년 만인 1653년에 완공되었다.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반열에 드는 타지마할이다. 샤 자한이 타지마할 옆에 자신의 능묘로 흑색 타지마할을 짓고자 했다는 설도 있지만 문헌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완전히 증명된 설은 아니다.


 

 

 

‘말 안장 위의 군주’ 아닌 ‘옥좌에서 다스리는 군주’


샤 자한은 이슬람 신앙에 충실한 편이었지만 어머니가 힌두계였고, 정치에서 대체로 이슬람과 힌두교의 절충주의 노선을 취했다. 샤 자한의 그러한 노선은 많은 힌두 토착 세력들에게 환영 받았다. 이는 많은 힌두사원을 파괴하고 무슬림만을 고위 관료로 등용한 아들 아우랑제브의 노선과 크게 다르다. 샤 자한은 데칸 지역으로 출정하고 아메드나가르에서 일어난 무슬림 반란을 진압했으며, 벵골에서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고 바그라나와 분델칸드의 라지푸트 왕국들을 점령하는 등 전쟁에 나섰지만, 다른 황제들처럼 노골적으로 정복욕을 과시하지는 않았다.

 



샤 자한은 제국의 군대를 유지하고 건축 사업을 벌이기 위해 막대한 세금 부담을 지웠다. 궁정과 귀족들의 사치와 방탕도 심했다. 이는 하층민들의 큰 부담이 되었지만, 워낙 광대한 농토에서 세금을 거두었기에 심각한 국가적 불안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또한 광대한 영토 탓에 반(半)독립적인 지방 통치자들이 여전히 있었지만, 샤 자한은 고도로 체계화된 행정 체제를 운용하여 성공적으로 통합을 유지시켰다. 그의 치세에 많은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들은 제국의 중앙집권적 지배와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수단이 되었다. 그는 ‘말 안장 위의 군주’라기보다 ‘옥좌에서 다스리는 군주’에 가까웠던 셈이다.

 

샤 자한은 상업과 수공업을 적극 장려하면서 라호르 델리, 아그라, 아메다바드 등을 그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멀리 떨어진 도시들을 도로와 수로로 연결시켰고 수도를 아그라에서 델리로 옮기려 했다. 샤 자한의 치세에 무굴제국의 예술과 건축은 크게 융성했다. 샤 자한은 타지마할 외에도 아그라 성을 확장하고 델리 성(일명 붉은 성)을 건설했으며, 델리의 대(大)모스크(자마 마스지드)와 진주 모스크(모티 마스지드), 오늘날 파키스탄 라호르의 와지르 칸(샤 자한의 시의(侍醫)이자 라호르의 통치자) 모스크와 샬라마르 정원, 아버지 자항기르의 영묘, 파키스탄 타타의 샤 자한 모스크 등 많은 건축물을 지었다. 그의 치세에 지어진 건축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탑에 갇혀 아내의 묘만 바라볼 수 있었던 말년


황위 계승을 위한 권력 다툼은 샤 자한의 말년에 재현됐다. 1657년 샤 자한이 병고에 시달리는 사이 아들들이 피 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에 나선 것이다. 장남 다라 시코는 병든 샤 자한을 대신해 사실상 대리 통치를 하고 있었지만, 차남 샤 슈자, 삼남 아우랑제브, 막내 무라드 바크시 등 형제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합집산의 전쟁 끝에 1658년 최후의 승리는 아우랑제브의 몫으로 돌아갔다. 아우랑제브는 형 다라 시코를 공개 참수형에 처하고 아버지 샤 자한을 아그라 요새의 탑에 감금했다. 아우랑제브는 이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탑에 갇힌 샤 자한에게는 사랑했던 아내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을까. 실의에 빠진 샤 자한을 곁에서 돌본 것은 첫째 딸 자하나라 베굼 사히브였다. 샤 자한은 1666년 1월 22일 코란의 구절을 암송하면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자하나라는 성대한 국장을 준비하려 했으나 아우랑제브는 허락하지 않았다. 샤 자한의 시신은 백단향 관에 안치되어 강을 통해 타지마할까지 운구 된 뒤, 아내 곁에 묻혔다.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1625년

소현세자 세자 책봉

1637년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출판

1632년

샤 자한 인도 무굴제국, 타지마할 건조 시작

1640년

찰스 1세 청교도 혁명

1643년

루이 14세 절대왕정 전성기

1651년

올리버 크롬웰 항해조례 발표

1651년

김육 충청도 지역 대동법 시행

1665년

아이작 뉴턴 만유인력 발견

1688년

제임스 2세 명예혁명, 입헌군주제 성립

1689년

강희제 네르친스크 조약

1689년

송시열 사약 받고 죽음

1709년

표트르 1세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북방전쟁

1725년

영조 탕평책 실시

1740년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1750년

박문수 균역법 실시

1751년

볼테르 [루이 14세 시대] 완성

1760년

이익 [성호사설] 저술 완성

1762년

예카테리나 2세 남편을 폐위시키고 즉위

1769년

제임스 와트 증기기관 발명, 산업혁명의 발단

1773년

홍대용 [의산문답]에서 지전설 주장

1774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출간

1776년

애덤 스미스 [국부론] 출간

해당인물이 포함된 시대의 부분 연표가 기본적으로 보이며, 전체보기를 누르시면 전 시대의 연표를 볼 수 있습니다.
붉은색 표시가 있는 인물을 클릭하면 해당 인물의 스토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인물사 연표 전체보기 select_chronicle();
var oRequestChronicle={ 'action':'chronicle' };ajax_request('/ncc_request.nhn?url=http://data.navercast.naver.com/module/chronicle/chronicle_7.html', 'chronicle', oRequestChronicle);

 

 출처 - 네이버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