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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서양사]제임스 와트 - 새로운 증기기관을 발명한 스코틀랜드의 기술자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04.23|조회수3,212 목록 댓글 0

제임스 와트

제임스 와트에 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그의 성(姓)을 말해본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그 전구 몇 와트지?”라고 물었다면 말이다. 영국과학진흥협회는 제임스 와트의 공적을 기려 1889년 ‘와트’를 일률과 동력 단위로 채택했고, 1960년 제11차 도량형총회에서 국제단위계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그의 증기기관은 기술 혁신이 세상을 크게 바꾼 대표적 사례들 가운데 하나다.

 

 

진정한 의미의 증기기관 탄생

제임스 와트의 할아버지는 수학 교사, 아버지는 선박기술자이자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교양 계급 출신이었다. 와트는 어린 시절 주로 집에서 어머니에게 교육 받았고 고향 그린녹의 문법학교에서 배웠지만, 라틴어와 희랍어 같은 고전어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수학을 좋아했다. 18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가세가 기울었다. 와트는 기구 제작을 배우러 런던에 갔다가 1년 만에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로 돌아와 기계 제작 사업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7년 이상의 도제(徒弟)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규정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글래스고의 길드에 가입하지 못했다. 하지만 와트의 남다른 능력을 인정한 글래스고 대학 교수들의 배려로, 1758년 대학 안에 작업실을 차릴 수 있었다.

 

증기기관이 처음 사용된 산업 분야는 광업이었다. 지하수면보다 깊은 곳에 있는 갱도에서 물을 퍼 올리는 펌프의 동력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1693년 토머스 세이버리가 증기를 압축시켜 발생하는 기압차를 이용하는 양수 펌프를 개발했다.


 

그리고 토머스 뉴커먼이 이를 개량하여 1712년에 실용화시켰다. 콘월의 구리 광산에서 처음 사용된 뉴커먼기관은, 실린더 안의 수증기 압축과 팽창에 따라 피스톤이 왕복 운동하는 방식이었다. 대기압만으로 물을 빨아올리기 때문에 대기압 기관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뉴커먼기관은 증기 압축을 위해 물이 한 번 분사될 때마다 실린더 전체가 냉각되기 때문에 열 손실이 많았고 석탄 소모량도 많았다. 1764년 글래스고 대학 수리소에서 일하던 와트는 뉴커먼기관의 수리를 부탁받고 대폭 개량에 착수하여 1769년 1월 5일, ‘화력기관에서 증기와 연료의 소모를 줄이는 새롭게 고안한 방법’에 관한 특허를 취득했다. 그는 증기를 실린더 안이 아니라 실린더와 연결된 별도의 응축기에서 압축시키고, 피스톤을 대기압이 아니라 증기압력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고안했다. 응축기만 냉각되고 실린더의 열은 보존되어 효율성이 매우 높았고, 석탄 소모량도 뉴커먼기관에 비해 4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었다. 와트는 또한 피스톤의 상하운동 모두를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진정한 의미의 증기기관이 탄생한 것이다.

 

 

볼턴앤드와트 설립, 매튜 볼턴과의 동업으로 날개를 달다

버밍엄 출신의 기계기술자이자 사업가 매튜 볼턴이 없는 와트는 상상하기 힘들다. 1760년대 중반 버밍엄 북쪽 소호에 설립한 공장에서 금속제품을 만들며 사업을 확장하던 볼턴은, 공장이 위치한 곳의 수량이 줄어들어 공장 가동에 필요한 수력을 얻는 데 곤란을 겪었다. 볼턴은 증기기관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1766년 와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 문제를 논했고, 1768년 와트와 처음 만났다. 그리고 1769년 와트가 새로운 증기기관 특허를 얻자, 볼턴은 그것을 매우 유망한 사업 아이템이라 생각했다. 이에 비해 와트는 특허를 얻은 뒤로는 그 시장 가능성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작업으로 관심을 돌린 상태였다.

 

 

와트의 동업자 존 로벅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자, 볼턴은 로벅이 자신에게 지고 있던 빚 1,200파운드를 로벅이 지닌 증기기관 특허권 지분으로 대신 상환 받았다. 그것은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권 전체 지분의 3분의 2에 해당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많은 광산들이 와트가 보다 효율적이고 경제성 있는 증기기관을 출시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774년 볼턴은 와트를 설득하여 버밍엄으로 오게 했고, 1775년 볼턴앤드와트(Boulton & Watt)를 설립했다. 그러나 14년의 특허권 기간 중 이미 6년이 지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볼턴은 의회에서 로비를 펼쳐 특허권 기한을 1800년까지 연장시켰다. 와트와 볼턴은 당대 최고 수준의 철제 및 기계 기술자 존 윌킨슨의 도움을 받아 증기기관을 보다 시장성 있게 개선하여, 1776년 첫 제품 두 개를 내놓았다.

 

이후 볼턴앤드와트는 증기기관 자체를 생산하기보다는, 공장과 광산에 일종의 기술 컨설팅을 제공했다. 증기기관 설계도를 제공하고 부품을 다른 업자들에게 주문 조달하여, 공장이나 광산 현지에서 그것을 조립할 때 기술자를 파견하여 조립과 설치를 이끌게 한 것이다. 볼턴앤드와트는 뉴커먼기관을 사용하던 때의 석탄 채굴량과 와트식 증기기관을 사용할 때의 채굴량을 비교하여, 그 차이에 비례하는 수익을 받았다. 와트식 증기기관을 설치한 뒤 25년에 걸쳐, 연간 채굴량 차이 분의 3분의 1을 수익으로 요구했던 것이다. 많은 광산업자들은 이러한 지불 조건에 불만을 느끼고, 와트와 볼턴의 특허권을 폐지하라는 청원을 의회에 내기도 했다.

 

 

산업혁명 시대를 열어 세계를 변화시킨 와트의 증기기관


증기의 열에너지를 기계동력으로 바꾸는 증기기관에 대한 구상과 시도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문제는 기술적 효율성을 높여 폭넓게 일반화, 상용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제임스 와트다. 그는 증기기관 자체의 발명자가 아니며, 기존 증기기관의 단점을 대폭 개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시킨 ‘와트식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특허를 취득한 사람이다. ‘발명가’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피해가기 힘든 일종의 숙명, 즉 도대체 어디까지가 그 사람의 독창적 발명인가, 하는 문제와 논쟁에서 와트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분리 응축기를 독자적으로 발명해내는 등 증기기관의 일대 혁신을 가져옴으로써, 산업화의 동력이 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하나의 기술 혁신이 역사의 방향에까지 영향을 미치기까지는, 하나의 기술 혁신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술 혁신을 확장 적용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과, 그러한 확장 적용을 가능케 하는 다른 기술 혁신들도 중요하다. 예컨대 증기기관은 광산에서 지하수를 배출시키는 용도에만 그치지 않고, 광산에서 먼 곳까지 광물을 운반하는 데에 증기기관을 사용한 철도 운송이 도입되었다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일은 와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825년 영국 북부 더럼의 한 광산에서 시작되었다. 1790년 새뮤얼 크럼프턴이 증기기관을 바탕으로 발명한 뮬방적기가 면사의 대량 생산으로 이어진 것도 중요한 사건이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증기기관의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증기기관의 시대’를 이루는 하나의 부분이기도 하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산업혁명 시대를 연 주역들 가운데 하나이자, 증기기관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기술 혁신과 발명의 플랫폼 구실을 했다. 그것은 연료와 원료를 먼 거리의 생산 공장까지 대량으로 빠르게 운반할 수 있게 했고, 공장을 자동화시키고 그 입지 조건을 크게 넓혀놓았으며, 수력에 의지하느라 가동이 중단되곤 했던 공장들이 일 년 내내 돌아갈 수 있게 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운송은 규모의 경제를 낳으면서 자본의 효율적이고 집중적인 운용과 생산 체제의 혁명적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와트의 증기기관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

 

 

“시간을 발명한 인물, 세상을 이롭게 한 인물”

와트는 1800년에 은퇴했다. 이 해에 증기기관에 대한 특허권이 만료되었고 볼턴과의 동업 관계도 끝났지만, 동업 관계는 대를 이어 와트의 아들 제임스 와트 주니어와 볼턴으로 이어졌다. 와트는 은퇴 후에도 자택의 작업실에서 기름 램프 개량, 조각상 제작 기계, 망원경을 통한 거리 측정 방법 고안 등 다양한 일에 몰두하고 프랑스와 독일로 여행도 다녔다. 그리고 1819년 8월 25일 버밍엄의 핸드워스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에 있는 제임스 와트 상(像) 옆에 걸린 기념비 문구의 일부다. “독창적 천재성의 힘을 발휘하여 증기기관을 개선해 조국의 자산을 확장시키고 인간의 힘을 향상시켰으며, 가장 영광스러운 과학의 꽃들 가운데에서도 탁월한 위치에 올랐다. 그는 세상을 진정으로 이롭게 했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와트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오전 8시 17분이란 매우 각별한 그 무엇을 뜻한다. 그것이 통근 열차의 출발 시각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에게 그런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와트와 스티븐스(증기기관차를 실용화 한)는 시간을 발명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1625년

소현세자 세자 책봉

1637년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출판

1632년

샤 자한 인도 무굴제국, 타지마할 건조 시작

1640년

찰스 1세 청교도 혁명

1643년

루이 14세 절대왕정 전성기

1651년

올리버 크롬웰 항해조례 발표

1651년

김육 충청도 지역 대동법 시행

1665년

아이작 뉴턴 만유인력 발견

1688년

제임스 2세 명예혁명, 입헌군주제 성립

1689년

강희제 네르친스크 조약

1689년

송시열 사약 받고 죽음

1709년

표트르 1세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북방전쟁

1725년

영조 탕평책 실시

1740년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1750년

박문수 균역법 실시

1751년

볼테르 다른 대표작과 [루이 14세 시대] 등 역사서 출간

1760년

이익 [성호사설] 저술 완성

1762년

예카테리나 2세 남편을 폐위시키고 즉위

1769년

제임스 와트 증기기관 발명, 산업혁명의 발단

1773년

홍대용 [의산문답]에서 지전설 주장

1774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출간

1776년

애덤 스미스 [국부론]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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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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