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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서양사]임마누엘 칸트 - 비판철학을 통해 서양 근대철학을 종합한 철학자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05.10|조회수685 목록 댓글 0

임마누엘 칸트

“사고를 위한 이마는 침착한 유쾌함과 기쁨의 자리였다. 말에는 풍부한 사상이 넘쳐흘렀고 농담과 재치가 장기였다. 알만한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어떠한 음모나 편견 그리고 명성에 대한 욕망도, 진리를 빛나게 하는 것에서 그가 조금이라도 벗어나도록 유혹하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도록 부드럽게 강요했다. 내가 최고의 감사와 존경을 다해 부르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칸트이다.” (칸트의 제자 요한 헤르더의 말)

 

 

가정교사, 시간강사,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철학을 연구하다

칸트는 마구(馬具) 장인인 아버지 요한 게오르그 칸트와 독실한 경건주의 기독교인 어머니 안나 레기나 도로테아 로이터 사이의 열 한 자녀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칸트를 포함해 4명이었다. 칸트의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동(東)프러시아로 이주한 사람이어서, 칸트의 아버지는 영어식 발음과 억양이 섞인 독일어를 구사했다. 칸트는 ‘엠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나중에 히브리어를 배운 뒤 스스로 ‘임마누엘’로 바꾸었다. 칸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150킬로미터 이상 바깥으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경건주의 기독교가 득세한 곳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비교적 자유로운 도시였다. 칸트는 ‘경건주의자들의 합숙소’라는 별칭이 붙은 콜레기움 프리데리치아눔에 입학하여 라틴어를 비롯한 교양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13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1737) 1740년 17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해 6년간 공부했다. 일종의 졸업논문으로 힘을 측정할 수 있는 원리를 논하는 [활력의 올바른 측정술에 관한 사상]을 제출했는데, 당시만 해도 과학과 철학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집안이 부유하지 못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칸트는 1747년부터 1754년까지 생계를 위해 가정교사로 일했다. 1755년 31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논문 [보편적 자연사와 천체이론]을 발표하고 학위논문 [불에 관한 몇 가지 고찰에 관한 간략한 서술], 오늘날의 교수자격논문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원리에 관한 새로운 해명]을 1755년에 썼다. 1756년 공석이 된 논리학, 형이상학 원외 교수직에 응모했지만 임용되지 못했고 1758년에도 응모했지만 실패했다. 원외 교수는 정년을 보장받지 못하고 다른 대학에서도 강의할 수 있는 직위였다. 1764년 프로이센 교육 당국이 칸트에게 문학부 교수직을 제의했지만, 칸트는 자신에게 합당한 자리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오직 철학만이 그의 관심사였고 분야를 달리하면서까지 교수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옛 풍경

 

 

57살 때부터 철학적 성찰의 결과를 쏟아내기 시작

[순수이성비판]의 1781년 초판


칸트는 32살 때인 1756년부터 46살인 1770년까지 사(私)강사로 지냈다. 사강사는 오늘날 대학의 시간 강사와 비슷하지만 대학에서 강사료를 받지 않고 수강생들에게 강의료를 받았다. 사강사 수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칸트는 왕립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수입을 보충했다. 그리고 1770년 46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논리학, 형이상학 강좌 담당 정식 교수로 임용됐다. 1781년 57살 때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았지만 ‘해괴망측한 나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고 내용에 대한 오해도 많이 받았다.

 

칸트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순수이성비판] 입문서에 해당하는 [형이상학 서설](1783)을 내놓았고, 1784년에는 역사철학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1785년 [도덕형이상학 원론], 1786년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내놓았다. 그리고 1788년 [실천이성비판], 1790년 [판단력 비판]을 내놓음으로써 칸트의 이른바 삼대 비판철학서가 완결되었다.

 

계몽군주로도 유명한 프리드리히 2세 치하에서 프로이센의 종교 정책은 비교적 관용적이었지만, 그 후계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그렇지 않았다. 프로이센 검열 당국은 칸트가 종교철학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칸트는 [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1793)를 내놓았다. 이듬해에도 종교철학 논문인 [만물의 종말]을 내놓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칙령이 내려졌다. 사실상 칸트를 협박하는 내용이었다. 칸트는 앞으로 종교철학 논저를 내놓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하며 종합해내다


근대 서양 철학의 합리론은 인간의 이성이 태어날 때부터 지식(본유 관념)을 갖고 있으며, 경험의 역할은 이성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지식을 일깨우는 데 머무른다고 본다. 반면 경험론은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는 것이라 본다. 경험론은 상식에 부합되지만 끝까지 밀고 나가면 보편적 진리를 부정하는 회의주의로 흐르기 쉽다. 같은 것을 놓고서도 나의 경험과 너의 경험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같은 것에 대한 나의 경험이라는 것도 때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를 가리켜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하고 종합한 철학자라 일컫는 것은, 그가 인식의 형식(또는 능력)은 본래부터 갖고 있지만 인식의 내용(또는 재료)은 경험으로 얻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험을 재료(내용)로 삼되, 경험과는 상관없이 타고난 인식 능력(형식)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알 수 있다.

 

 

인간은 인식에서나 행위에서나 처음부터 끝까지 능동적 존재

칸트에게 인식의 형식 또는 능력이란 시간과 공간(직관형식 또는 감성형식), 그리고 지성의 능동적인 작용에 바탕을 둔 범주(개념형식)다. 시간과 공간은 경험을 통해 인식 대상을 담는 틀이고, 범주는 개념을 통해 지성이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틀이다. 직관은 수동적, 수용적이고 개념은 능동적, 자발적, 구성적이다.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말에서 직관은 쉽게 말해 경험에 해당한다. 요컨대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틀과 형식이 없어 맹목적이라는 것.

 

‘과거의 철학은 인간에게 전혀 올바르지 못한 자리를 부여하여 인간을 세계 또는 외부 사물과 상황에 완전히 의존하는 기계가 되게끔 했다. 과거의 철학은 인간을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이제 이성비판이 등장하여 세계 속의 인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능동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인간은 그 자신이 근원적으로 그의 표상과 개념의 창조자이며, 그의 모든 행위의 창시자여야 한다.’ ([학부 간의 다툼](1798) 중에서)

 

칸트 철학을 흔히 비판철학이라 일컫는데, 여기에서 비판이란 가능 근거를 따져 묻는 것, 즉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되묻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의 문제의식은 ‘인간은 보편적인 진리를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가?’였다. 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위와 같이 경험을 재료 삼아 인간 지성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능력 또는 형식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식 주체의 능동적, 자발적 능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칸트 철학은 그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감히 스스로 생각하는’(Sapere Aude) 계몽주의적 주체의 철학적 완성이다.

칼리닌그라드의 칸트 대학 교정에 서 있는 칸트 동상.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가 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도 칼리닌
그라드 대학이 되었지만, 2005년 당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슈뢰더 독일 총리가 참석한 행사에서 교명이
칸트 대학으로 바뀌었다.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선한 삶을 위해 요청되는 신(神)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문제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 이성에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위와 같이 스스로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끈질기게 던진다. 예컨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질문인 신(神)의 존재, 영혼의 존재에 관한 질문이 있다. 신이나 영혼의 존재 여부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없기 때문에 칸트의 비판철학에 따른다면 학문의 주제나 지식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다. 요컨대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형식의 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학문과 지식의 영역에서 신과 영혼의 문제를 추방해버린 칸트지만, 앎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희망과 행복의 영역에서 신과 영혼을 부활시킨다. 악한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선한 사람이 고통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도덕적 행위를 통해 최고선의 이념을 추구해야 하는가?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은 선하게 통치하는 신의 존재와 내세의 삶을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신은 선한 삶을 위해 ‘요청되는’ 신이다.

 

 

칸트를 위한 조종(弔鐘). ‘지식을 통한 인간 해방을 가르친 스승’

칼리닌그라드에 있는 칸트 묘석. [실천이성비판]의 유명한
구절이 나와 있다.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법칙이다.”


칸트는 어려서부터 허약체질이었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관리로 강의, 연구, 저술 활동을 별 어려움 없이 이어갈 수 있었다. 그가 하루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각에 산책에 나섰기 때문에,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의 산책하는 칸트를 보고 시계의 시각을 맞췄다는 얘기, 그런데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느라 단 한 번 산책 시간을 어겼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1799년부터 크게 쇠약해진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늙은 하인 람페에게 포도주 한 잔을 청해 마시고 “좋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뒤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날 쾨니히스베르크 시 전체가 휴무에 들어갔고 운구 행렬에 수천 명이 뒤따랐으며 시내 모든 교회가 같은 시간에 조종(弔鐘)을 울렸다. 철학자 칼 포퍼는 이에 관해 [추측과 반박]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804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절대왕정 치하에서 칸트의 죽음을 애도한 그 많은 교회의 종소리는 미국 혁명(1776)과 프랑스 혁명(1789)의 이념이 남긴 메아리였다. 칸트는 고향 사람들에게 그 이념의 화신이었다. 인간의 권리와 법 앞의 평등, 세계 시민권과 지상의 평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식을 통한 인간 해방을 가르친 스승에게 고향 사람들은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몰려왔다.”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1776년

토머스 제퍼슨 미국, 독립선언

1776년

정조 규장각 설립

1780년

박지원 중국 기행문집 [열하일기] 집필

1781년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발표

1781년

김홍도 어진화사로 정조 초상화작업

1789년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 당선

1789년

루이 16세 프랑스 대혁명 시작

1792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성의 권리 옹호] 발간

1795년

혜경궁 홍씨 [한중록] 저술

1793년

로베스 피에르 프랑스 공포정치 시작

1796년

건륭제 백련교의 난

1796년

정약용 수원 화성 준공

1796년

에드워드 제너 우두법 성공

1796년

임윤지당 [윤지당유고] 간행

1798년

토머스 맬서스 [인구학 개론에 대한 소고] 출간

1798년

김만덕 여성 최고 벼슬 '의녀반수'에 오름

1804년

나폴레옹 1세 황제 즉위, 법전제정

1801년

이사주당 [태교신기] 저술

1805년

루트비히 판 베토벤 [영웅] 초연

1805년

무함마드 알리 이집트 무함마드 알리 왕조 수립

1811년

시몬 볼리바르 볼리비아 독립운동 지휘

1811년

홍경래 홍경래의 난

1830년

루이 필리프 7월혁명

1836년

강정일당 [정일당유고] 간행

1831년

빅토르 위고 [노트르담의 꼽추] 출간

1840년

임칙서 아편 전쟁

1844년

김정희 [세한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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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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