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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동양사]임칙서 - 강경한 아편 몰수 조치로 아편전쟁의 불씨를 일으킨 청나라 관료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06.03|조회수1,793 목록 댓글 0

임칙서

사방을 메운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변발을 늘어뜨린 청나라 군인들이 견고한 나무상자를 부지런히 나르고 있었다. 어떤 상자는 굳게 잠겨 있어, 도끼를 휘둘러 부쉈다. 그 속에서 쏟아진 흰 가루는 밀가루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아편이었다. 광동성 호문(虎文) 강가에 파인 거대한 구덩이에는 계속해서 날라 오는 아편이 부어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그 거대한 아편 더미에 생석회를 부지런히 퍼부었다. 그리하여 못쓰게 된 아편은 다시 바다에 뿌려졌다. 영국을 비롯한 서양 상인들에게서 압수한 2만 1천 상자가 넘는 아편을 이렇게 폐기하는 데는 20일이 넘게 걸렸다. 모두 아편 근절을 목표로 삼은 흠차대신 임칙서의 결단으로 가능해진, 일대의 진풍경이었다. 외국 상인들은 처음에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청나라 군대가 건물 한 곳에 그들을 몰아넣고 봉쇄를 풀지 않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7천 상자가 넘는 아편을 내준 자딘 매디슨 사를 비롯해서 자국 상인들의 손해를 전액 보상하기로 한 영국 정부의 상무감독, 찰스 엘리어트는 이렇게 본국에 보고했다. "전쟁이 필요합니다!"

 


아편, 중국을 정복하다

1839년 당시, 중국의 아편 문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당시 중국에 수입되는 아편의 양은 연간 4만 상자에 달했다. 한 상자의 아편을 대략 백 명의 아편중독자가 소비한다고 볼 때, 중국의 아편중독자는 4백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그것은 당시 중국 인구의 1퍼센트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매년 급속히 늘어갔다. 1만 상자에서 4만 상자로 되기까지 10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적 문제도 심각했다. 18세기 후반에 중국은 영국에 차를 팔아서 대량의 은을 얻고 있었으나, 이후 영국이 은 대신 인도산 아편으로 차의 대금을 치르는 정책으로 바꾸자 1807년을 기점으로 중국이 아편 때문에 은을 영국에 지불하는 형태로 역전되었다. 1827년에는 1800년 기준 전국 유통량의 20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은 유출량이 심각해졌는데, 당시 중국의 세금은 은납제였으므로 국가재정과 국민의 살림살이가 동시에 급격히 나빠져 갔다. 실로 아편은 “이대로 수십 년 후에는 세금을 낼 사람도, 무기를 들 사람도 모조리 없어질 것이다!”는 우려가 과장이 아닐 정도의 위협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위기는 영국의 부도덕한 무역 정책에 앞서 중국 청왕조 스스로의 부패와 실정 때문이라는 인식이 의식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공감을 얻고 있었다. 공자진(龔自珍)이나 위원(魏源)은 “눈이 있으면 북경과 그 일대를 돌아보라! 일찍이 부유했던 집안은 가난한 집이 되었고, 가난했던 집안은 굶주림으로 허덕이게 되었다”면서 그 원인을 잘못된 정치, 부패한 관료, 실용과 거리가 먼 학문에서 찾았다. 그들은 또한 서양인들을 오랑캐라며 무작정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장점과 강점을 본받아야 하며, 상업과 공업을 키워 국력을 길러야 한다고도 보았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제도를 고쳐(變法)”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自强)”는 그들의 사상은 강유위, 양계초 등의 변법자강 사상의 선구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고위관료로 임칙서가 있었다.

 

 

‘임청천’의 뜻을 가슴에 품고

임칙서는 1785년에 복건성 후관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향신 축에 들기는 했으나 세력은 미미했고, 그의 아버지는 시골의 훈장이었다.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생계가 어려워서 어머니와 누이들이 베를 짜서 살림에 보태야 했다고 한다. 아들이 태어나자, 그의 아버지는 당시 복건성의 순무(巡撫)였던 서사증(徐嗣曾)이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서 순무님과 같은 사람이 되어라”는 뜻에서 아이의 이름을 “칙서(則徐, ‘즉서’ 또는 ‘측서’로 읽어야 한다고도 한다)”라고 지었다. 따라서 임칙서는 일찍부터 관계 진출을 목표로 학문에 열중했으며, 유능하고 깨끗한 관리가 되어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스물일곱이 되던 1811년에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고, 8년 뒤에 운남성의 향시 감독관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절강성, 강소성, 섬서성 등을 다니며 지방 행정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청렴하면서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여 송대의 전설적인 명관 포청천에 빗댄 ‘임청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아편 폐기를 감독하는 임칙서의 모습.


1830년 초에는 북경에서 근무했는데, 이 때 공자진, 위원 등과 교류하며 개혁파 지식인과 관료들의 모임인 ‘선남시사’에 가입하기도 했다. 비록 반년 만에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어 시사 활동을 오래 하지는 못했으나, 공자진 등의 개혁사상에는 크게 공감하여 이후 임칙서의 활동은 모두 그런 사상에 따라 이루어졌다.

 

1832년에서 1838년까지는 강소성 순무와 호광성 총독을 잇달아 맡았는데, 낡은 수리시설을 개축하고 재해를 입은 지방을 구호하는 일에 관의 힘만이 아니라 상인들의 조직을 적극 활용했다. 그는 부패하고 무기력한 관료집단보다 상인의 조직이 훨씬 현지 사정에 밝고 행동도 효율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상인들을 활용할 뿐 아니라 그들의 상업 활동을 장려, 후원하고, 소금 판매 문제 등에서 상인들에게 최대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시책을 썼다. 

 

다만 부도덕하고 반사회적인 상업 활동은 엄격하게 규제하고 처벌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아편 판매였다. 그는 어느 지방 총독보다 효과적으로 아편 판매를 근절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로써 마침 아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황제(도광제)의 눈에 들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 조정은 아편 문제 해결책을 두고 철저히 금지해야 한다는 엄금론(嚴禁論)과 음성화된 아편 판매를 차단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차라리 판매를 합법화하고 대신 세금을 거두자는 이금론(弛禁論)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금론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으나, 널리 도덕적 모범을 보여야 할 조정이 취할 태도는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임칙서도 상소를 올려 엄금론에 찬성했으며, 그에 필요한 여섯 가지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황제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하여 1838년 말, 임칙서는 도광제의 아편 근절 특명을 받고 흠차대신으로서 광동성에 파견된다. 광동성의 광주(廣州)는 오래 전부터 해외무역의 창구였으며, 따라서 서양에서 아편이 들어와 전 중국으로 퍼지는 출발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힘을 모아 침략자에게 대항

임칙서는 먼저 아편이 거래되는 광동 지하조직부터 일망타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현지 정보에 밝아야 한다고 여긴 그는 온갖 수단을 써서 정보를 수집했는데, 향시를 치르면서 과제를 “아편 판매망을 뿌리 뽑는 법”으로 내걸어 과거에 응시한 현지인들의 현실성 있는 의견을 널리 취합하기도 했다. 1839년 1월에 광주에 도착한 그는 4천 명 가까운 중국인을 체포하고, 유통되고 있던 아편 3만 근을 몰수했다. 그리고 3월부터는 외국인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서양인의 힘과 탐욕스러움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마구잡이로 그들을 압박하기보다 좋은 말로 타이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편과 무관한 외국 상인들의 입장을 키워주는 한편, 영국과 미국 상인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술책도 썼다.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술책이었다.

 

결국 강제적 수단을 써서 아편을 몰수한 임칙서는 외국 상인들에게 “다시는 아편을 거래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도록 했다. 미국, 포르투갈 등의 상인은 이를 제출했으나 영국 상인만은 제출하지 않고는 광주를 떠나 마카오로 본거지를 옮겼다. 그러다가 7월 7일, 술에 취한 영국 군인이 임유희라고 하는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임칙서는 즉각 범인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영국 측은 거절했다. 그러자 임칙서는 마카오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에게 식량과 물의 공급을 차단해 버렸고, 영국인들은 마카오에서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영국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무역조차 금지한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제 전쟁을 피하기 힘들다고 여긴 임칙서는 전력을 다해 전쟁 준비를 했다. 그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이미 광동에 오기 전부터 백방으로 서양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구할 수 있는 모든 서양의 서적과 잡지를 번역시켜, 주로 서양인들의 성격과 무기, 전술을 중심으로 해서 [사주지(四洲志)]를 비롯한 몇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임칙서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위원은 전쟁이 끝난 후 이를 보완 수정하여 [해국도지(海國圖志)]라는 책을 펴냈는데, 해국도지는 당시 동양이 갖고 있던 서양 관련 지식의 사실상 유일한 보고가 되어 널리 읽혔다. 조선의 흥선대원군, 일본의 유신지사들도 이를 읽으며 서양과의 대결을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임칙서는 서양의 대포를 사들이고, 서양 상선을 사들여 전함으로 개조하였다. 또 자체적으로 증기선과 자주포까지 만들어냈다고 한다. 무기 확보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들에 비해 유리한 점은 이곳 지리에 밝다는 것이며, 백성의 힘을 모으면 관병의 힘보다 훨씬 강력해진다”고 하며 해안 거주민 중에서 장병을 모집하여 수용(水勇)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는데, 적에게 해를 입히기보다는 중국 내부에서 영국에 협력하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함이었다.
 


피할 수 없었던 패배

하지만 당시 청나라에서 누구보다 서양 사정에 밝았던 임칙서는 영국이 전력으로 공격해올 경우 결국 승리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면대결보다는 유격전으로 대응해야 하며, 북경에 이르는 요해처를 집중적으로 방비해야 한다는 상주문을 황제에게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의 조언을 무시해 버렸다. 임칙서는 또 가능하면 전쟁을 피하기 위해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직접 호소하려고 했다.

 

그래서 “폐하의 상인들은 폐하의 나라에서는 불법인 독극물인 아편을 우리나라에 들여와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이를 허락하셨을 리 없다고 보며, 만약에 허락하셨다면 군주로서 취하실 행동이 아니라 봅니다. (…) 우리는 귀국과의 정상적인 무역을 그만둘 뜻이 전혀 없으며, 아편만 취급하지 않는다면 두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는 취지의 서한을 영국에 보냈다.

 

그러나 그 서한이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영국 정부가 격론 끝에 중국과의 전쟁을 결의한 다음이었으며, 설령 더 일찍 도착했어도 별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영국 정부는 전부터 중국과의 무역관계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임칙서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영국에서 아편은 불법이 아니었다.

 

결국 1840년 6월, 영국은 전함 16척과 4천의 병력으로 광동을 습격했다. ‘아편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임칙서의 지휘로 민과 군이 단결해서 방어한 결과 영국군은 끝내 광동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영국군의 주력은 임칙서가 예측했던 그대로의 경로로 북경으로 진격했다. 청나라 군대는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으나 화력과 전술에서 앞서는 영국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임칙서의 서한

  

결국 북경 함락이 눈앞에 보이자, 청나라 조정은 임칙서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어 파면하고는 영국과의 교섭에 나섰다. 그래서 일단 천비가조약으로 영국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으나, 얼마 후 다시 강경론자들이 득세하며 조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그러자 광동에 물러가 있던 영국군은 더욱 보강된 병력을 출동시켜 상해를 점령하고 남경까지 진격했다. 이제야말로 청왕조는 굴복, 1842년 8월에 남경조약을 맺었다. 홍콩을 할양하고 추가 개항을 하며, 거액의 배상금 지불, 영국인 활동의 자유 보장 등에 합의한 청왕조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이는 사실상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동양의 굴욕사’의 시작이었다.

 

임칙서는 결코 무턱대고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었으나, 아편전쟁이 끝나자 조정은 일제히 그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는 처형은 간신히 면했지만 멀리 신강성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그 벽지에서도 현지의 위구르인들의 문화를 배우려 힘썼으며, 청나라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이슬람교도와 상대할 때 필요한 요점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1850년에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고 광서성으로 가던 도중 사망했다.

 

 

제2차 아편전쟁에서 함락되는 광주.

 

 

반제와 반봉건, 근대 동양의 운명


지식, 지혜, 인격 등 모든 점에서 임칙서는 서양의 침략에 맞서 동양이 내놓을 수 있던 가장 우수한 관료였을 것이다. 그는 ‘근대적’ 사상의 실마리라고도 할 수 있는 개혁사상을 가졌고, 마오쩌둥은 그 점을 높이 평가해 “임칙서는 중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시작한 사람이다”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양의 체제를 유지한 채 서양의 기술을 가미한다는 동도서기적인 개혁 사상이었고, 체제 자체를 변혁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개혁사상을 계속 보완하고 발전시킬 기회가 주어졌다면, 동양이 자체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양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임칙서는 ‘반봉건’의 뜻을 채 펴보기도 전에 ‘반제국주의’의 투쟁에 나서야 했으며, 서양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었으면서도 서양이 동양을 짓밟는 서막을 연 사람으로 남고 말았다. 자신을 개혁하는 과제와 동시에 자신을 지키는 과제를 해결해야 했던 동양의 운명. 그 때문에 중국이나 한국이나 이후 한동안 개화사상가들은 ‘민족반역자’라는 멍에를 피하기 어려웠고, 민족운동가들은 ‘수구파’의 대열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런 모순이 해소된 것은 옛 체제가 서양 또는 일본의 침략에 산산조각이 나 버린 다음이었다.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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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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