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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3월 2일,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다급하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으로 달려들어갔다. 부황 니콜라이 1세가 급서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르가 누구보다도 존경하면서 또 두려워했던 부황은 요 얼마간 급속도로 심신이 쇠약해져 있었다. 크림전쟁이 러시아의 패배로 끝날 것이 거의 확실시되면서 실망과 분노에 몸을 떨었고, 감기가 들었는데 쉬지도 않고 밤낮으로 전쟁 지휘와 정무를 보던 끝에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사망한 듯하지만, 궁정 구석에서는 절망에 빠진 황제가 자살했다는 숙덕거림이 있었다. 아무튼 이제 러시아 제국의 황제관은 37세가 되는 알렉산드르의 머리 위로 옮겨졌다. 그의 어깨는 무겁기만 했다. 러시아의 영광을 회복하여 부황의 한을 풀어야만 하리라. 그러려면 먼저 오랜 폐습을 없애고,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나가야 하리라.
아버지의 좌절을 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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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를 유럽의 강국으로 발전시켰다. 알렉산드르 2세의 숙부가 되는 알렉산드르 1세 때만 해도 나폴레옹 타도의 선봉이 되고, ‘신성동맹’을 제창해 유럽 전체를 하나로 묶는 비전을 제시할 만큼 아무도 무시 못할 국제적 위상을 가졌다. 그러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으로 눈부시게 발전해 가는 사이에, 러시아는 표트르 1세 시절의 유럽화 개혁에서 간과했던 낡은 봉건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황제는 의회제도 없이 나라를 전제적으로 다스렸고, 인구의 80퍼센트는 농노로서 귀족들 사이에서 상품처럼 거래되었으며, 재판은 변호사도 없이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그리스 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엄격한 보수주의가 다른 종교나 자유주의를 비롯한 외래 문화를 배척했다.
그래도 완전한 폐쇄 사회가 아니었던 이상 바깥세상이 돌아가는 흐름과 새로운 사상은 어느새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러시아도 유럽처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꽃피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열의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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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알렉산드르 1세가 죽자 그 혼란기를 틈타 1825년 12월(러시아력)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봉기했다. 그래서 이들을 12월당(데카브리스트)이라고 부르는데, 새로운 황제 니콜라이 1세는 12월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지도부 다섯 명을 처형, 100명 이상을 시베리아에 유배 보낸 니콜라이는 이로써 자유사상에 대해 격렬한 증오심을 품게 되었고, 대학의 교과과정에서 철학을 없애며 비밀경찰을 동원해 조금이라도 행동이 이상한 사람은 모조리 잡아들이는 등 표트르 1세 이래 최대의 폭압정치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폭압체제는 1853년부터 시작된 크림전쟁으로 파국을 맞게 된다. 발칸반도에서 투르크에 맞서 슬라브계 민족들의 독립을 확보하고, 나아가 투르크 자체를 러시아의 세력권에 두려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1833년에 이집트의 공격에 견디다 못한 투르크가 러시아에 구원을 요청하고, 러시아가 이에 응하여 이집트를 물러서게 만든 대가로 투르크에게서 ‘다르다넬스 해협의 통행권을 러시아에게만 부여한다’는 등의 특권을 따냄으로써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이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우려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국제정세는 갈수록 ‘서유럽 대 러시아’의 구도로 짜여 갔다. | |

프랑스군이 러시아의 세바스토폴을 함락하는 크림전쟁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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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러시아가 발칸의 투르크령 내에서 그리스정교도를 보호할 권한을 요구한 데서 촉발된 크림전쟁은 러시아에 맞선 투르크,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사르데냐의 연합군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끝났다. 국익의 문제도 있었지만 이슬람교의 투르크에게서 기독교도를 해방한다는 사명감을 띠고 전쟁에 임했던 니콜라이 1세는 비록 다른 종파라 해도 기독교 국가들이 투르크를 도와 러시아를 공격하자 큰 충격과 실망에 빠졌으며, 러시아군이 병력만 많을 뿐 무기에서나 훈련 수준에서나 서유럽 군대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확인하자 더욱 상심하였다. 이렇게 부황이 절망 속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를 대신해 연합군과 화의를 맺고 흑해의 제해권과 발칸에서의 일부 영토권을 포기한 알렉산드르 2세는 절치부심하며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 작업에 착수한다.
개혁의 나날,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

개혁은 언제 어디서나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던 알렉산드르 2세는 크림전쟁을 끝내자마자 자신의 동생 콘스탄틴 대공을 위원장으로 하는 ‘농민생활조건 향상 위원회’라는 비밀위원회를 설치했다. 비밀위원회였음에도 ‘농노해방’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고 ‘농민생활조건 향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당시 차르(러시아 황제)에게 주어진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개혁이 조심스러운 것이었는지 말해준다. 그리고 10년을 예정으로 농노해방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지만, 그토록 비밀리에 일을 진행했음에도 어느새 소문이 퍼지고 지주들의 저항이 불거지자 알렉산드르는 차라리 계획을 앞당겨 버리자고 결심한다. 그래서 1857년 12월에 농노해방을 실시할 것이라는 발표를 하고, 1861년 2월 19일에 정식으로 농노해방 칙령이 내려졌다.
농노해방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실질적인 ‘해방’이 아니었다는 시각이 많다. 해방된 농노들은 자신이 농사짓고 있던 땅을 지주에게서 분배 받았는데 무상이 아니라 값을 치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은 값을 치를 돈이 없었고, 정부가 80퍼센트, 농촌공동체 ‘미르’가 20퍼센트씩 분담해 지주들에게 땅값을 대납한 다음 농민들에게 정부 돈은 49년을 기한으로, 농촌공동체 돈은 20년 기한으로 갚도록 했다. 그런데 땅을 원래 경작지보다 적게 분배해 주면서(따라서 남은 토지는 지주의 몫이 되어, 지주들이 여전히 대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땅값은 시세보다 더 높게 책정했고, 사실상 지주들의 돈인 농촌공동체 돈을 갚는 20년 기한까지는 ‘임시 의무 농민’이라는 이름으로 예전과 별다를 게 없는 착취적 노동을 해야만 했으므로 농민들은 불만이 많았다. 1861년 한 해 동안 1176건의 농민봉기가 일어날 정도였던 것이다. 농노해방은 농민을 “법적인 노예에서 경제적인 노예”로 바꾸었을 뿐이라는 비판이 농민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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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2세, 황태자(알렉산드르 3세), 마리아 황후 (왼쪽부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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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은 미국의 노예해방 직후 상황과도 비슷했다. 또한 기득권자들에게 일정한 양보가 없었다면 대규모의 개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같은 러시아 말을 하고 같은 러시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소나 돼지처럼 사고 팔며, 심지어 도박판에서 주고 받는 야만적 현실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커다란 진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알렉산드르 2세는 그 밖에도 여러 개혁을 실시했는데, 지방행정 개혁, 사법제도 개혁, 병역제도 개혁이 대표적이다. 1864년의 칙령은 각 도나 군 단위에서 ‘젬스트보’라고 하는 지방의회를 선거로 구성하고, 이들이 그 지방의 행정을 이끌어 나가게 했다. 오직 중앙정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던 지방행정이 자치의 기반을 확보하고, 원칙적으로 지주이든 옛 농노이든 상관없이 지방의원이 되어 공동체를 운영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다만 여기도 한계는 있어서, 경찰권과 징세권은 여전히 중앙에 속해 있었다. 또한 평등한 선거라고 하지만 사실상 대지주 귀족들이 대부분 젬스트보를 장악하였다. 아무튼 도시에서도 1870년의 칙령으로 시의회가 구성되어 러시아 전역에서 지방자치가 이루어졌다.
사법제도 개혁은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들 중 가장 후한 평가를 받는다. 1864년 말의 칙령으로 사법부는 행정부에서 독립했으며, 재판 과정이 공개되고, 배심원제가 수립되며, 피고는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이 새롭게(러시아에서는) 강조되었다. 하지만 정치범 사건의 경우에는 재판 비공개 관습을 유지하는 등 완전히 근대적인 사법제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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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제도 개혁은 1874년의 칙령으로 국민개병제가 실시되면서 본격화된다. 그때까지 러시아 군대는 억지로 끌려간 농노들의 군대였고, 높은 자와 가진 자가 모두 외면하는 군대였다. 사기에서나 훈련에서나 유럽의 국민군대에 필적할 리 없었다. 장교조차 사관학교를 거치지 않은 귀족 도련님들이라 전술에 대한 이해도, 직업의식도 낮았다. 그러나 이제 일정 연령대의 러시아 남성은 누구나 병역 의무를 지게 되었고, 이로써 복무기간도 25년에서 6년(해군은 7년)으로 단축될 수 있었다. 장교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도 설치되고, 모든 사병을 대상으로 기초교육이 실시되어 군인의, 나아가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게 되었다. 여기에 낡은 무기를 최신식 무기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어, 마침내 1877년에는 이 새로운 군사력으로 다시 투르크와 전쟁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이로써 발칸 국가들의 독립, 일부 영토의 할양, 다르다넬스 해협의 통행권 재부여 등 많은 양보를 투르크에게서 이끌어냈으나, 영국과 오스트리아 등이 개입함으로써 보다 축소된 성과에 만족해야 했다). 이 밖에 1863년에 대학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1864년에는 중등학교법과 국민교육법을 제정해서 기본적으로 모든 국민이 교육의 기회를 갖도록 했다. 또 1865년에는 출판물에 대한 검열을 일부 폐지했다.
‘위대한 해방자’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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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위대한 해방자’, ‘자유의 차르’는 해가 갈수록 공포와 울분에 시달려야 했다. 1866년부터 1880년까지 네 차례의 암살 시도가 있었으며, 드러나지 않은 것은 훨씬 많다고 추정되었다. 암살을 시도한 주체는 대부분 급진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분명 니콜라이 1세 시절보다는 훨씬 숨통이 트이는 세상이 되었음에도 체제에 대한 불만과 혁명에의 열망으로 넘쳤다. 그들보다 온건한 부르주아와 지식인, 젠트리들도 알렉산드르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르의 개혁이 러시아를 서유럽과 같은 민주적 국민국가로 바꿔 놓는 효과를 일부 내면서도, 기본적으로는 과거와 같은 차르 독재체제·절대왕정의 틀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르는 의회 설치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고, 정당이나 이익집단의 결성도 불허했다. 그는 더 잔혹했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백성은 모두가 황제의 자녀들로서 차별 없이 차르를 섬겨야 한다고 믿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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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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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황제의 권력을 견제하는 정치제도도, 황제의 백성을 정치이념에 따라 나누는 정당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니 애초에 농노해방을 비롯한 개혁 자체가 크림전쟁에서 드러난 제국의 허약함을 극복하려는 것, 나아가 더 강력한 황제권을 확보하려는 것이며 자유와 민주의 이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게 아니냐는 시각이 짙어져 갔다.
제국의 변방에서도 소란이 이어졌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등의 분리 독립 움직임을 알렉산드르 2세는 철저히 탄압했다. 특히 폴란드의 경우에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폴란드인 수백 명을 처형하고 수천 명을 시베리아에 유배 보냈으며, 모든 폴란드인은 폴란드어를 쓰지도 읽지도 말하지도 못한다는 금지령을 내렸다(다만 핀란드에 대해서는 유독 자치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유화정책을 폈는데, 스웨덴과 결탁하여 제국에 반기를 드는 일을 방지하려던 의도로 추정된다).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왔다. 1881년 3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가를 달리던 황제의 마차에 폭탄이 던져졌다. 폭음과 함께 코사크 호위병들이 죽고, 마부는 크게 다쳤다. 놀랍게도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 덕분에 황제는 무사했다. 그러나 그는 호위병과 마부가 괜찮은지 물으며 마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두 번째 폭탄이 날아들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되돌려지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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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설립의 요구를 견디다 못해 결국 의회제도의 시행을 검토하는 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한 날 암살되고 만 알렉산드르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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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가 자신에게 대항한 12월당에게 분노하여 강경한 수구정책을 펴고, 그의 좌절을 본 알렉산드르 2세가 개혁에 나섰다면, 알렉산드르 2세의 최후를 본 아들, 알렉산드르 3세는 할아버지보다 더한 탄압과 반개혁의 길로 내달렸다. 사실 알렉산드르 2세는 의회 설립의 요구를 견디다 못해 의회제도의 시행을 검토하는 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했었는데, 그만 바로 그날 암살되고 말았다.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그 결정을 취소해 버렸고, 부황이 부여했던 대학의 자치권을 도로 빼앗았으며, 검열 역시 다시 범위를 넓혔다. 몇 년 뒤에는 지방 농민의 경우 사법개혁에 따른 권리를 박탈하고, 젬스트보의 의원은 선거가 아니라 주지사가 임명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젬스트보 자체의 권한도 대부분 다시 중앙정부로 귀속되었다.
이처럼 알렉산드르 3세는 부황의 개혁 정책들을 하나 둘씩 폐기하며 전처럼 낡고 둔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러시아로 되돌리려는 듯했다. 하지만 단번에 완성되는 개혁이 없듯,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개혁도 없다. 농노해방의 결과 농촌에서 살기 어려워진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러시아에서도 비로소 시작된 산업혁명의 노동력이 되었다. 약간 맛보았다가 다시 빼앗긴 자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중 일부는 알렉산드르 3세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1887년에 처형되는데, 그 중에는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도 있었다. 형을 너무도 사랑하고 존경했던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 즉 레닌은 이 일로 황제정을 쓰러트리는 데 평생을 걸기로 다짐한다. 그 다짐이 실현될 날은 30년이 남아 있었다. | |
- 글 함규진 / 역사저술가
-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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