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세계 인물사

[서양사]스탈린 - 강철의 제국, 소련 건설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10.21|조회수879 목록 댓글 0

이오시프 스탈린

1907년 12월 5일, 지금은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이지만 당시는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었던 바쿠에서 한 여인이 티푸스로 죽었다. 예카테리나 스바드니제. 그녀는 약 2년 동안의 결혼생활 동안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린 끝에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그 남편은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기도 했었다. 아내를 묻는 자리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긴 통곡 끝에,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인간적인 감정도 죽고 말았네.” 그랬다. 이오시프 주가시빌리, 이제는 2년 전 레닌이 붙여 준 스탈린(강철의 인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그 남자는 끝이 없는 비인간성으로 이후 46년의 세월을 살게 된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인민의 피 위에, 강철의 제국을 건설한다.

 


러시아 혁명

러시아. 그 한없이 넓으면서 차디찬 땅은 예부터 냉혹하고 잔인한 독재자의 손에 큰 변혁을 겪고는 했다. “뇌제”라 불리던 이반 4세는 차르 체제를 수립했고, 표트르 1세는 러시아를 서구 제국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거대한 근대 서구 제국이면서도 여전히 봉건적 굴레와 악습을 다 벗지 못한 채 모순과 혼란을 품고 있던 러시아에는 또 한 차례의 대변혁이 요구되고 있었으나,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들에서는 그런 변혁을 이끌 만한 강력한 지도자를 찾을 수 없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병약한 몸으로 개혁을 추진하다가 암살당했고,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3세는 근본적 문제 해결 없이 탄압만 거듭했다. 그리고 니콜라이 2세는 변혁을 주도하기에는 기량도 대담함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이런 가운데 지식인과 민중의 불만은 점점 과격한 정치운동으로 나타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과격한 집단이 볼셰비키였다.


 

모든 반정부 활동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차르를 피해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주로 서유럽 국가들에 망명해 활동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런던 대회에서 레닌이 보다 과격한 노선을 들고 나와 온건파와 분열한 후, 그들 스스로를 부르게 된 별명이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기본 노선대로 먼저 부르주아 혁명을 달성한 다음 순차적, 평화적으로 정권을 획득한다는 입장은 러시아에서는 절대로 비현실적이라 보았고, 소수의 직업혁명가들이 당분간 권력을 독점, 후진적인 사회를 이끌고 가는 “전위정당”을 구성할 것, 그리고 봉건왕조와 지배계급에 맞서 폭력혁명으로 정권을 일시에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다수파”라는 뜻인 이름과 달리, 본래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그룹에서도 소수였으며 러시아 본토에는 거의 지지자가 없었다. 하지만 난국을 전환화려는 속셈으로 차르가 추진한 개혁, 그리고 전쟁은 오히려 이들을 태풍의 눈으로 떠올려 주었다.

 

개혁을 요구하던 시민을 대량학살했던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을 계기로, 누르면 누를수록 민중의 압력이 더욱 거세지는 것을 본 차르는 결국 그해 10월 30일 이후 근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도입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선조가 물려준 절대 황권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눈가리고 아웅 식의 제도개혁에다 친정부적인 대토지 소유 귀족들을 노골적으로 밀어 주는 정책이 거듭되자, 본래는 개혁의 주역이었어야 할 자유주의자와 온건개혁파는 설 땅을 얻지 못했다. 그 대신 지나치게 과격하다 하여 민중에게도 외면되어온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착실히 커져갔다.

 

연설하는 레닌. 연단 오른쪽에는 트로츠키가 서 있다.
<출처: Philip Baird Shearer at Wikipedia.org>

예상 밖으로 참담한 결과를 거듭한 러일전쟁제1차 세계대전은 심각한 인명 피해와 함께 경제난, 식량난을 불러왔고, 이는 민중의 반정부 의식을 더욱 부추겼다. 특히 군인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이는 토지를 열망하는 농민의 불만과 합쳐졌다. 이 때 볼셰비키는 ‘평화, 토지, 빵’이라는 구호를 내걸어 그런 민심에 호응했으며, 특히 다른 사회주의 정파와 달리 일관성 있게 반전 운동을 벌였던 덕분에 전쟁에 넌더리가 난 민중의 기대를 모을 수 있었다.

 

1917년 2월에는 빵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에 군인들까지 동참하면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온건파 위주의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케렌스키가 이끌던 임시정부는 전쟁 계속을 선언했으며, 이에 독일은 레닌과 지노비예프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러시아로 돌아가도록 하여 러시아의 전쟁 중단을 획책했다. 레닌은 귀국하자마자 “소비에트(노동자, 농민 등 민중의 자치기구)로 모든 권력을!”이라고 외치며 임시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임시정부는 볼셰비키를 최고의 위험 세력으로 보아 집요하게 탄압했지만, 코르닐로프의 우익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거꾸로 볼셰비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소비에트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마침내 1917년 11월 7일에 무장봉기하여 임시정부를 쓰러트렸다. 이렇게 시작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은(정식 출범은 1922년 12월) 곧바로 독일과의 단독 강화를 추진하고 토지 사용권을 농민들에게 배분하는 조치를 취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새로운 체제의 기틀을 잡고자 했다.

 

이렇게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졌고, 70여년 동안의 장대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 실험에는 방해 요소가 너무도 많았다. 기득권의 반발, 국내외의 반혁명 공작, 당 지도부 내의 노선 갈등, 낙후된 사회적 조건, 나아가 인간의 본성 자체까지 걸림돌이었다. 그런 걸림돌들을 모조리 쳐부수고 소련을 사회주의의 강철 같은 요새로 만들어내려면 이미 병마에 시달리고 있던 레닌 이상의 냉혹하고 잔인한 권력자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1879년 12월 21일, 그루지야의 시골 마을인 고리에서 구두장이인 비사리온 주가시빌리의 아들이 태어났다. 아이는 발가락이 기형이었고 얼굴에는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곰보자국이 뚜렷했다. 게다가 키도 매우 작은 편이어서 친구들의 놀림에 시달렸으며, 아버지는 툭하면 술에 취해 심하게 매를 때렸다. 그나마 아버지는 11세가 되었을 때 다른 사람과 싸우다 칼에 찔려 죽어, 어머니가 근근히 살림을 이어가야 했다.

 

그래도 하나뿐인 자식을 훌륭히 키우려는 어머니의 노력에 따라 스탈린은 15세에 트빌리시의 신학교에 입학하는데, 억압적인 학교 분위기와 상류층 학생들의 멸시는 그의 반항아 기질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그래서 비밀조직에 가입하여 사회주의를 학습했으며, 그 때문에 신학교에서 쫓겨났다는 것이 그 자신의 설명이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학비를 내지 못해서 중퇴했을 것이라고 한다.

 

 

스탈린의 첫 번째 부인 예카테리나 <출처: Sk at Wikipedia.org> (왼쪽),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와 함께한 스탈린 <출처: Mutter Erde at Wikipedia.org> (오른쪽).

 

 

이후 그는 직업혁명가로의 길을 걸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경찰에 체포되고, 시베리아에 유배되고(일곱 차례나), 탈출했다가 다시 체포와 처벌을 당하는 일을 반복하며 살았다. 정식으로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1901년에 사회민주당 트빌리시 지역당에 가입했을 때였으며, 1903년에는 레닌의 책을 읽고 그에게 심취하여 볼셰비키가 되었다. 1905년에는 카프카스 대표로 핀란드의 탐머르포스에서 열린 볼셰비키 대회에 참석했고, 이 때 레닌을 만나 그에게서 스탈린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1906년에는 예카테리나와 결혼했고, 1907년 3월에 아들 야코프를 얻었다. 같은 해 12월에 아내를 잃었으나 레닌의 신임을 얻음으로써 볼셰비키 내에서는 조금씩 위상이 높아졌다. 특히 그는 레닌의 전위정당론을 적극 지지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교리에 따라 토지 국유화를 고집하던 레닌을 설득해서 볼셰비키가 집권하면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리라는 공약을 내걸게 했는데 이것이 결국 볼셰비키의 세력 확대에 도움을 주었기에 레닌의 눈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활동은 주로 카프카스 일대에서 민중봉기를 선동하는 일에 국한되어 있었고, 은행을 터는 등의 일을 벌이다가 당의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스탈린의 역할은 미미했다. 하지만 레닌의 신임에 힘입어 새로 출범한 소련 정부에서 민족인민위원을 맡아 러시아 이외의 여러 공화국들을 소련 연방에 통합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차차 당내 기반을 쌓아갔다. 반혁명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레닌은 정치국을 창설하여 비상 시국에 소수 지도자의 합의만으로 정책결정을 할 수 있도록 했는데, 레닌, 트로츠키, 스베르드로프와 함께 스탈린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1921년까지 반혁명군과의 전투와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붉은 군대를 이끌며 많은 공로를 세웠다. 1921년에는 고향인 그루지야를 침공하는 선봉에 섰다. 그루지야는 별도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소련과는 독립적인 공화국이 되었으나, 이제 소련은 몇 달 전에 맺은 평화조약을 무시하고 침략에 나섰던 것이다.

 

1920년대 초 모스크바에서는 정권 수뇌들 사이에 노선 차이에 따른 갈등이 심해지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내세우며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돕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본 반면,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장하며 소련의 입지를 든든히 하는 일이 먼저라고 했다. 또한 자본주의적 방식을 일부 채택했던 ‘신경제정책’ 역시 쟁점이었다. 트로츠키는 이를 사회주의의 타락으로 즉시 중단해야 한다고 본 한편, 레닌과 스탈린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당분간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트로츠키파와의 갈등이 점점 험악해지자, 레닌은 스탈린을 당의 초대 서기장에 앉히고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직후(1922년 5월) 뇌졸중 발작을 일으킨 레닌은 고리키 마을에 칩거하며 정무를 스탈린에게 대리하도록 했는데, 가끔 찾아온 스탈린과 대화하며 점점 그의 냉혹함과 비인도성에 회의가 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22년 12월 말에 작성한 유서에서 자신이 죽은 후에는 집단지도체제를 택해야 하며, 스탈린은 지나치게 무자비하므로 권력을 독점하게 할 수 없고 지금의 서기장직에서도 해임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유서를 은폐하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끌어들여 ‘삼두정치’ 체제를 수립했다. 그리고 1924년 1월에 레닌이 죽자, 트로츠키파를 숙청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스탈린 한 사람의 손에 갈수록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이번에는 트로츠키에게 접근하여 반 스탈린 전선을 펼쳤지만, 러시아 혁명 10주년이 되던 1927년의 당 중앙위원회에서 스탈린은 세 사람을 제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스탈린의 독재체제는 완성된 것이다.


말년의 레닌(왼쪽)과 스탈린.
<출처: DIREKTOR at Wikipedia.org>

 

 

강철, 피땀, 피눈물


소련의 일인자가 된 스탈린은 하나 하나 자신의 생각대로 나라를 개조해갔다. 1928년 시작한 ‘제1차 5개년 계획’은 소련을 농업국가에서 중공업 위주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대장정의 첫발이었다. 일국사회주의론에 따라 소련의 경제규모를 키우고 군사력을 확충하려는 이 계획은 농업의 막대한 희생을 필요로 했다. 신경제정책은 중지되고, ‘부농(쿨락)’으로 지목된 농민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어 재산을 빼앗기고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1929년에는 농민에게 나눠주었던 토지를 빼앗고 농업을 집단화했다. 농업에서 빼앗은 부와 인력은 공업에 투입되었다. 공업생산에는 ‘사회주의 경쟁’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목표량 이상의 성과를 낸 노동자에게 주택과 식량 등의 배급을 우대하여 노동자들의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런 당근의 한편으로는 목표량을 채우지 못한 노동자와 노동감독에게 주어지는 가혹한 채찍이 따랐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유명한 스탈린의 숙청이 진행되었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제거된 다음에는 부하린, 르이코프 등의 혁명동지들의 차례였다. 1934년에는 레닌그라드 당서기이며 인기가 높았던 키로프가 암살되었는데, 사실은 스탈린이 암살을 지시했다는 의혹이 짙다(레닌도 스탈린에게 암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스탈린은 키로프 암살을 “아직도 사악한 반동분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증거로 내세우고는 더욱 잔혹하고 광범위한 숙청에 들어갔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르이코프, 부하린 등이 처형되는 한편 해외의(멕시코) 트로츠키까지 암살되고, 폴란드 전쟁의 영웅이던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붉은 군대의 고위장교들, 유대계, 독일계, 폴란드계, 한국계 등의 소수민족 사회주의자들, 나아가 일반 국민들까지 줄줄이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1933년부터 1938년 사이에 숙청된 사람의 수는 수백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된다. 여기에 급격한 농업 체제 개편의 와중에 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하며, 3천만 명 이상의 주민이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이 중 절반 가량이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학살의 중심에는 사실상 스탈린의 비밀경찰이나 다름없는 내무인민위원회(NKVD)가 있었다. KGB의 전신인 이 위원회는 전 국민을 감시하고, 수사하고, 처형했다. 그 수장인 ‘독사’ 베리야는 스탈린 다음의 권력자라는 말까지 듣고 있었다.

 

 

“적을 돕는 자는 적이다”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는 장면.
<출처: F l a n k e r at Wikipedia.org>


‘일국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당분간의’ 평화 공존도 포함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서유럽 사회주의 혁명가들에 대한 지원을 끊고 서방국가들에 유화정책을 폈으며, 덕분에 1924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게 국가승인을 받아내고 1933년에는 미국의 승인도 얻었다. 그러나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을 가장 놀라게 한 일은 1939년 8월의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이었다. “사회주의의 조국”과 “극우 파쇼의 본산”이 손을 잡은 것이다. 해외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이 빗발치자 스탈린은 국제 사회주의 연대조직인 코민테른의 대표자들을 대거 제거하며 코민테른을 소련 정부의 하부조직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 영국 등의 환심을 사려는 뜻에서 코민테른을 해체해 버렸다.

 

하지만 스탈린이 소련의 보존에 만족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주의의 영토를 꾸준히 넓혀 가기를 원했다. 다만 그것은 소련의 영향권을 넓혀 가는 일과 구분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제국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영토 확장’이 추진되었다. 독일과의 불가침조약과 함께 맺은 밀약에 따라, 1939년 9월 1일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붉은 군대를 폴란드에 보내 분할 점령했고, 10월 말에는 발트 3국을 점령했다. 이어서 핀란드를 침략하고, 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무너지자 그 틈을 타서 루마니아를 침공,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빼앗고 이를 ‘몰도바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만들어 소련 영토에 편입해 버렸다.

 

많은 비난을 들었던 독일과의 제휴였으나 스탈린이 그 효력을 맹신하지는 않았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 “언젠가는 독일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일지에 대해서는 큰 오판을 했는데, 히틀러가 영국과 겨루는 동안에는 동쪽으로 침공해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1941년 6월에 독일의 “바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스탈린은 그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보기 좋게 기습당한 데다 스탈린이 그동안 행한 일 때문에 농민들은 독일군을 열렬히 환영하고, 유능한 장교들은 대부분 무덤 아니면 시베리아에 있는 상황이라 독일은 개전 이후 한동안 파죽지세로 소련 중심부로 파고들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절망한 스탈린은 “위대한 레닌 동지의 업적을 우리가 망쳐 버렸다”고 부르짖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정책이 소련을 파멸로 몰고 간 것만은 아니었다. 무자비한 공업화의 결과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은 제정 러시아에 비해 급상승해 있었고, 서방국가들의 유화정책에 따라 미국, 영국과 빠르게 연합전선을 맺고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빠른 의사결정이 장점인 독재체제도 비상시에는 효과적이었다. 또한 스탈린은 주코프를 비롯한 유능한 지휘관들에게 결정권을 위임해줄 필요를 빨리 깨달아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스탈린 특유의 비인도성도 소련의 승리에 기여했다. 독일군은 소련 민간인들을 포로로 잡고는 그들을 인간방패로 앞세워 진격해왔다. 차마 죄없는 동포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보고에 스탈린은 잘라 말했다. “자기 뜻이 아니라 해도, 적을 돕는 자는 적이다.” 그리고 인간방패들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는 부대 역시 그런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덧붙였다. 또한 독일군을 방해하고자 철저한 청야 전술, 즉 아군의 물자가 적에게 넘어가기 전에 없애버리는 전술을 지시했는데 그 중에는 군사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농민의 오두막과 촌락도 있었다. 심지어 아직 피난도 가지 않은 상태의 러시아 마을이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잿더미가 되곤 했다. 그런 무자비함은 자신의 가족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랑했던 아내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야코프가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에 스탈린은 “다시는 그 문제를 언급하지 마라”고 했으며, 결국 독일군 진영에서 아들이 자살할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두 번째 부인인 나데즈다가 낳은 바실리 역시 전쟁 중에 아무런 특별 조치를 기대하지 못했다. 전쟁 도중 스탈린은 하루에 20시간 가까이 일하며 토막잠을 잘 뿐이었는데, 한 번은 어느 부관이 안쓰러운 나머지 예정보다 한 시간을 더 자게 두자 스탈린은 깨어난 후 불같이 화를 내며 “돼먹지 못한 인도주의자!”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영광의 종착지


결국 전쟁은 소련을 포함한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고, 스탈린은 소련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음을 내세워 동유럽과 극동에서 상당한 대가를 요구했다. 그리하여 처칠이 “철의 장막”이라고 표현한 새로운 소련 제국의 영향권이 동유럽의 대부분과 동부 독일, 그리고 북한과 몽골에 확보되었다. 스탈린은 위대한 승리자라는 위상을 갖게 되었으며, 앞서의 전우들인 서방국가들이 사회주의의 확산을 경계하며 냉전을 시작하자 사회주의 진영의 총사령관으로 자본주의 진영과 맞서는 지도자의 위상까지 더해졌다. 그의 지배 하에서 러시아는 역사상 최대의 국력과 영향력을 누리는 초강대국으로 우뚝 솟았다.

 

 

얄타 회담. 좌로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출처: Greenshed at Wikipedia.org>

 

 

무자비한 숙청과 공포정치로 독재를 확립하고, 이제는 위대한 승리자와 영도자라는 후광까지 얻은 스탈린은 황제를 넘어서 신의 반열에 올랐다. “스탈린 동지에게 오류는 없다”, “모든 것은 스탈린 동지의 지도에 따라” 따위의 말이 일상화되었다. 스탈린을 찬양하는 미술품과 연극, 심지어 칸타타까지 무수히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스탈린이 지은 저작을 학습했다. 노동자나 과학자나 스탈린의 지도 덕분에 자신들이 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이는 중국, 북한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본보기가 될 터였다.

 

하지만 말년에 가까워질수록 스탈린은 우울함을 떨치지 못했다. 더없는 영광의 빛에 싸여 있는 그였으나, 냉정히 돌아보면 가족은 죽거나 멀어졌고, 주변에는 온통 아첨꾼이나 겁쟁이들이며, 오직 술만이 시름을 잊게 해준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쳤다. 그것은 이반 뇌제와 표트르 대제가 걸어간 길의 종착지와 거의 비슷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53년 3월 1일, 스탈린은 모스크바 근교의 별장에서 잠을 자다가 뇌졸중을 일으켰다.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나흘을 더 버티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 사실은 베리야에게 암살되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데, 베리야가 “내가 그를 독살했다”고 자랑 삼아 떠벌이기도 했으며, 흐루시초프도 이를 확신한다고 기록했다.

 

스탈린의 권력이 그토록 막강했기에, 스탈린 없는 스탈린 체제는 손쉽게 무너졌다. 베리야를 제거하고 새로운 크렘린의 대표자가 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지나친 국가주의와 중공업 위주 노선 대신 인민 생활의 향상과 경제주체의 자율성 향상을 꾀했다.

 

또한 서방과의 냉전을 지양하고 평화공존을 모색함으로써 국제적 ‘해빙’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가능하게끔, 1956년 2월의 당대회에서 스탈린의 비리와 범죄를 낱낱이 폭로, 비판했다. 스탈린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하나씩 복권되어갔다. 1961년 10월에는 붉은 광장의 레닌 묘 안에 안장되어 있던 스탈린의 시신이 크렘린의 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0년 6월, 스탈린의 고향인 그루지야의 고리에 서 있던 그의 마지막 남은 동상이 철거되었다.


고리 시청 앞에 서 있던 스탈린의 동상.
<출처: (CC) Maksim at Wikipedia>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발행일 
2010.10.20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1919년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당 설립

1919년

김원봉 의열단 조직

1920년

마하트마 간디 불복종운동시작

1920년

김좌진 청산리 전투

1922년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초대 서기장 취임

1921년

루쉰 중국공산당 발족, [아Q정전] 완성

1921년

김익상 조선총독부 폭탄 의거

1923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세계최초 여성외교관

1923년

케말 파샤 터키공화국 수립

1923년

염온동 제11회 임시의정원 외희에서 의원선출

1925년

박은식 임시정부 2대 대통령

1926년

한용운 [님의 침묵] 발표

1926년

나운규 영화 [아리랑] 감독

1933년

프랭클린 D.루스벨트 뉴딜정책

1932년

윤봉길 훙커우 공원 의거

1936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 케인즈 혁명

1935년

나혜석 정조관념 해체 주장

1939년

아돌프 히틀러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45년

호치민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선언

1936년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1944년

아이젠하워 제2차 세계대전 종결

1947년

자와할랄 네루 파키스탄과 분리 독립

1945년

오광심 만주 심양, 애국부인회 위원장

1945년

윈스턴 처칠 국제연합 탄생

1949년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45년

김구 광복 후 귀국, 1947년 [백범일지] 출간

해당인물이 포함된 시대의 부분 연표가 기본적으로 보이며, 전체보기를 누르시면 전 시대의 연표를 볼 수 있습니다.
붉은색 표시가 있는 인물을 클릭하면 해당 인물의 스토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인물사 연표 전체보기 select_chronicle();
var oRequestChronicle={ 'action':'chronicle' };ajax_request('/ncc_request.nhn?url=http://data.navercast.naver.com/module/chronicle/chronicle_11.html', 'chronicle', oRequestChronicle);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