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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동양사]네루 - 인도의 초대 총리, 비동맹주의의 선도자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11.03|조회수751 목록 댓글 0

자와할랄 네루

“인도 독립 이후 17년 동안 자와할랄 네루는 곧 인도였다. 네루는 역설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 열정적인 사회주의 신념을 지녔으면서도 특권에 익숙한 귀족이었다. 해로와 케임브리지에서 영국풍으로 키워졌으나 영국 식민당국의 감옥에서 근 10년을 보낸 사람이었고, 불가지론적 급진주의자로서는 뜻밖에도 마하트마 간디의 추종자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된 뒤로는 그가 민족주의의 불꽃을 이어갔고, 인도 독립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누구도 부패시킬 수 없었고, 종파를 초월했으며, 비전을 지닌 정치 위의 정치인이었던 네루. 그의 위상은 너무 커서, 그를 떠나서는 그가 이끄는 인도를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샤시 타루르)

 


출생과 성장,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간디를 만나기까지

자와할랄 네루는 1889년 11월 14일,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났다. 부친 모틸랄 네루는 식민통치 하의 인도에서 변호사로 활동해 부와 명성을 쌓았고, 국민회의(원래는 식민 정부의 승인 하에 여론 수렴을 위해 결성된 인도인 대표자 모임이었지만, 훗날 정당으로 발전하며 독립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에서 온건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네루 가문은 본래 카슈미르의 브라만 계급이었지만, 모틸랄은 당시의 인도 지식인 및 상류층과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합리주의자였다.

 

부유하고 서구적인 환경에서 자란 자와할랄은 16세 때인 1905년에 영국으로 유학해 해로 스쿨에 입학한다. 영국의 명문 기숙학교인 해로 스쿨은 윈스턴 처칠의 모교이기도 해서, 이 학교는 20세기 인도와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을 나란히 졸업생으로 배출한 셈이 되었다.


 

1907년에 자와할랄은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서 7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인도로 귀국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와할랄은 특출한 재능을 드러내지는 못한 평범한 젊은이였으며, 향후 진로에 관해서도 자기 생각보다는 부친의 권유에 순종하는 편이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인 1912년 말에 국민회의의 모임에 처음 참석한 자와할랄은 1915년에 남아프리카에서 귀국한 모한다스 간디가 주도한 몇 번의 비폭력 투쟁을 접하고 단숨에 매료된다.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자와할랄은 인도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지지하는 급진적인 의견을 거리낌 없이 표현해 온건파인 부친 모틸랄과 갈등을 빚었다. 모틸랄은 고심 끝에 간디를 집으로 초청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아들의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혔고, 이를 계기로 네루 부자는 간디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가 된다. 1916년에 자와할랄 네루는 10세 연하의 카말라 카울과 결혼했고, 이듬해에 딸 인디라가 태어났다.

 

1919년에 영국군이 평화 시위 중인 인도인에게 무차별 발포한 암리차르 학살이 벌어진다. 이를 계기로 모틸랄은 국민회의의 온건 노선에서 벗어나 간디를 적극 지지하게 되었으며, 자와할랄은 진상 조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직가 겸 웅변가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1921년 12월 6일, 네루 부자는 식민 정부 당국에 의해 나란히 체포되어 투옥된다. 이를 시작으로 자와할랄은 사반세기 동안 9회나 투옥되었으며 햇수로 약 10여 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수감 기간 동안에 네루는 아직 어린 딸 인디라를 위해 편지 형식으로 쓴 [세계사 편력](1934)을 비롯해서 [자서전](1936)과 [인도의 발견](1946)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1926년에 자와할랄은 병든 아내의 요양 겸 휴가를 위해 딸을 데리고 유럽으로 향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소련을 방문했고, 벨기에에서 열린 식민지 문제 관련 국제회의에 국민회의 대표로 참석함으로써 외교 무대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2년 여간의 유럽 체류를 마치고 돌아온 자와할랄은 부친 모틸랄과 스승 간디의 그늘을 벗어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인도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국민회의의 강령으로 삼자는 급진적인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에 관해서는 간디를 비롯한 지도부 모두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어서 결국 자와할랄도 입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후 인도의 정치 상황은 그의 주장에 점차 힘을 실어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28년에 영국 정부의 식민지 상황 평가단인 사이먼 위원회가 인도에 도착하자 대대적인 여론의 반발이 일어났고, 자와할랄은 러크나우에서 군중과 함께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게 난생 처음으로 폭행을 당했다. 8월에 국민회의는 모틸랄 네루가 주도한 위원회의 명의로 ‘네루 보고서’를 발표해 자치령 인도에 대한 구상을 내놓았지만, 이 제안은 무슬림 측의 반대로 인해 결국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모든 무슬림이 신뢰하는 힌두인은 간디와 네루 부자뿐”이라는 평가는 당시에 이들의 위상을 잘 보여주지만, 한때 독립을 위해 단결했던 힌두와 무슬림 양측의 갈등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모틸랄 네루 일가의 가족사진. 1927년경. 뒷줄 왼쪽부터 아들 자와할랄, 큰딸 비자야 락슈미, 작은딸 크리슈나, 손녀 인디라,
사위 란지트 판디트. 앞줄 왼쪽부터 부인 스와루프라니, 본인 모틸랄, 며느리 카말라. 이 가운데 자와할랄과 인디라는
인도의 총리가 되고, 비자야 락슈미는 인도 최초의 여성 장관이 되고 소련과 미국 주재 대사를 역임했다. <출처 : Wikipedia>

 

 

국민회의 의장에서 독립국 인도의 초대 총리까지


1929년에 네루는 부친의 뒤를 이어서 국민회의의 새로운 의장으로 선출된다. 40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와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일찌감치 후계자로 점찍은 간디가 막후에서 발휘한 영향력 때문이었다. 12월 25일, 국민회의 의장 네루는 본인의 오랜 염원이었던 인도의 완전 독립을 국민회의의 목표로 정식 선언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는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 근거한 투쟁 방법이 채택되었다. 국민회의는 1930년 1월 26일을 ‘독립의 날’로 선포했으며, 이는 인도의 정식 건국일이 8월 15일로 바뀐 다음에도 ‘공화국의 날’로 지정되어 기념되고 있다.

 

1930년 봄에 간디는 유명한 ‘소금 행진’을 통해 대대적인 불복종 운동의 막을 올렸다. 국민회의 의장 자와할랄도 불복종 운동을 독려하다가 또다시 체포되어 투옥되고 말았다. 이즈음 네루는 인생에서 가장 의지가 되었던 가족 두 사람을 연이어 잃는다. 1931년에는 부친 모틸랄이 사망했고, 1935년에는 아내 카말라가 사망했던 것이다. 인도 민중의 대대적인 저항에 놀란 영국 정부는 인도인의 정치 참여를 보다 확대하는 내용의 새로운 법률을 제정했다. 그 결과 실시된 1937년 총선에서 네루는 전국으로 유세를 다니며 국민회의의 압승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인도는 영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간디가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잠시 유보하면서까지 영국을 지원하자고, 그 대가로 인도의 요구를 관철시키자고 동포들에게 호소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영국의 폭정이 계속되자 크게 실망한 민족주의자들은 또다시 속지 않으려 들었던 것이다. 급기야 전쟁 중인 1942년에 간디의 주도 하에 “인도를 떠나라”는 구호 하에 반영 운동이 벌어지자, 네루는 또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종종 함께 옥고를 치르던 부친은 이미 세상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아직 신혼이었던 딸 인디라가 함께 옥고를 치렀다.(‘인디라 네루’는 1942년 3월에 페로제 간디와 결혼함으로써 그때부터 ‘인디라 간디’가 되었다.) 이때의 감옥 생활은 무려 3년간 이어졌고, 종전 직전인 1945년 6월에야 끝났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의 철수는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지만, 인도는 힌두와 무슬림의 내분을 비롯해 갖가지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독립을 맞이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무슬림 측에서는 국가 분할을 주장한 민족주의자 무함마드 알리 진나의 영향력이 급증하면서 양측의 결별은 불가피해졌다.

 

간디와 환담하는 네루. 1946년 7월 6일 뭄바이에서. 네루는 간디를 ‘바푸(아버지)’라고 부르며 존경했지만, 때로는 간디의 지나친 고지식함과 종교적 발언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출처 : Wikipedia>


힌두-무슬림-영국의 3자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1946년 8월 16일에 무슬림 세력의 주도로 분리를 촉구하는 폭력 사태까지 벌어지자 더 이상의 국가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결국 이듬해인 1947년 6월 3일에 인도 동쪽과 서쪽의 무슬림 세력권은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인도에서 분리되었다.(이 가운데 동파키스탄이 1971년에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갈등과 혼란 속에서도 네루는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 수립에 여념이 없었다. 1946년 9월에 네루는 과도정부의 총리로 선출되었고, 12월에는 제헌의회가 소집되었다. 영국은 원래 1948년 6월까지 인도에서 철수하기로 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10개월 빨리 인도의 독립이 이루어졌다. 1947년 8월 14일 밤 자정, 초대 총리 네루는 인도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인도 전역을 뒤흔드는 종파 간의 갈등은 여전했고, 1948년 1월 30일에는 무슬림 세력을 포용하려 애쓰던 간디가 힌두 급진파에 의해 암살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부친 사후에 가장 큰 조언자였던 간디를 잃은 네루는 이제 신생 독립국가 인도와 마찬가지로 험난하고 외로운 여정을 떠나야 하는 셈이 되었다.

 

 

외교 분야의 현저한 업적과 내정 분야의 초라한 성적표


자와할랄 네루의 성격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합리주의자’라고 해야 적절할 것이다. 젊은 시절 그가 정계에 뛰어들자마자 내놓은 제안 가운데 하나는 저명한 인도인의 이름 앞에 흔히 달라붙는 갖가지 경칭을 모조리 떼어버리고 편리하게 이름만 부르자는 것이었다. 네루는 우선 ‘간디’에게서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경칭부터 떼자고 제안했다. 당연히 주위의 거센 반대로 인해 실현되진 않았지만, 이것이야말로 네루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그는 특히 러셀의 무신론적 합리주의를 좋아해서 “인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버트런드 러셀의 책들을 읽는 교과과정이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네루는 힌두-무슬림의 갈등으로 대표되는 인도의 고질적인 종파주의를 혐오해 마지않았다. 일각에서는 이런 개인적 기질 때문에 네루가 양쪽 종파의 요구와 불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독립 과정에서 이슬람 측을 포용하지 못하고 파키스탄의 분리를 수수방관하는 중대한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네루는 비록 무신론자였을망정 특정 종파를 탄압하거나 비호하지는 않았으며, 그가 권좌에 있는 동안 인도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한 종교적 관용이 이루어졌다고 평가된다.

 

간디에 대한 네루의 불만도 상당 부분 역시 종교와 관련이 있었다. 간디의 사상과 실천에서 종종 엿보이는 힌두교의 사고방식이 자칫 종파주의로 오도될 위험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루는 간디의 탁월한 판단력을 존중했으며, 서로의 의견이 다를 때에는 결국 자기 입장을 철회하곤 했다. 일각에서는 자와할랄 네루가 부친 모틸랄과 스승 간디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랐을 뿐, 정치가로서 독자적인 능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고 비판한다. 일리가 있는 비판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처럼 뛰어난 두 인물을 조언자며 길잡이로 둘 수 있었던 것도 흔치 않은 행운이었으리라.  

 

네루에게도 이른바 ‘네루주의’라고 일컬을 만한 독자적인 노선이 있긴 하다. 그 핵심은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과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로 요약된다. 네루는 젊은 시절부터 사회주의자를 자처하고 러시아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인도의 특수한 상황 하에서 러시아식 공산주의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네루는 파시즘을 경계하여 나치를 비판하고 무솔리니와의 면담도 거절했으며, 영국으로 대표되는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를 철저하게 증오했다. 물론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네루의 도덕군자다운 태도가 서구의 여러 강대국과의 활발한 교류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래도 네루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외교 분야에서 나왔으며, 그 기간 동안 인도는 이른바 비동맹 중립 노선을 천명하며 국제 사회에서 제3세계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기여했다. 네루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이집트의 나세르와 각별하게 교류했으며, 1956년 7월에는 3인 회담을 열기도 했다. 네루의 주도로 1955년 4월에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회의 는 중국이 국제무대에 재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인도와 중국의 우호 관계는 국경 지대의 무력 충돌로 인해 악화되었고, 국제 무대에서 인도의 위상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비록 명분은 있었지만 내실은 부족했던 인도의 외교적 주도권이 오래 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역전의 독립투사인 네루였지만 신생 독립국 인도의 권좌는 결코 만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외교 분야에서의 업적과 달리 국내 정치에서 네루의 성적표는 그리 좋지 못했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생애의 상당 부분을 거리와 감옥에서 보낸 혁명가가 권좌에 오를 경우에 당연히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의 벽을 네루 역시 피할 수는 없었던 셈이다.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네루 부녀가 수카르노 대통령 및 그의 자녀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이 사진에는 역대 인도 총리 2명과 인도네시아 대통령 2명이 나와 있다. 세발자전거 뒷자리에 앉아있는 여자아이가 훗날 인도네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이기 때문이다.

 

야심차게 추진한 경제 개발 계획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해서 외국의 원조에 의존해야 했으며,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는 고질적인 내부 문제는 독립 이후에도 여전히 산적해 있었다. 네루도 항상 이상주의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1948년에는 파키스탄과의 전쟁을 통해 카슈미르를 합병했고, 1961년에는 인도 내의 포르투갈 영토인 고아, 디우, 다만을 무력으로 복속시켰다. 비록 실리는 챙겼지만 비폭력의 성인 간디의 수제자로 자처하던 네루의 체면에는 적잖은 흠집을 남겼다.

 

인도 독립 이후 국민회의는 한동안 다수당으로 남았으며, 네루는 독립 이후 17년 동안 총리직을 담당하다가 1964년 5월 27일에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말년에 후계자 문제에 관해 질문을 받자 “나는 왕조를 시작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지만, 네루의 사후에 딸 인디라 간디와 외손자 라지브 간디는 연이어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인디라 간디는 시크교도 분리주의자에 대한 대규모 진압 작전으로 큰 물의를 빚고 나서 1984년에 시크교도 경호원들에 의해 암살당했고, 그 뒤를 이은 라지브 간디 역시 스리랑카의 내전에 간섭했다가 1991년에 타밀 반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어쩌면 네루-간디 가문의 연이은 비극이야말로 아직 끝나지 않은 인도의 험난한 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자와할랄 네루, [인도의 발견], 1981; [네루 자서전], 2005; 요게시 차다, [마하트마 간디], 2001; 제프리 애쉬, [간디 평전], 2004; 샤시 타루르, [네루 평전], 2009.

 

 

 

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발행일 
2010.11.03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1919년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당 설립

1919년

김원봉 의열단 조직

1920년

마하트마 간디 불복종운동시작

1920년

김좌진 청산리 전투

1922년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초대 서기장 취임

1921년

루쉰 중국공산당 발족, [아Q정전] 완성

1921년

김익상 조선총독부 폭탄 의거

1923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세계최초 여성외교관

1923년

케말 파샤 터키공화국 수립

1923년

염온동 제11회 임시의정원 외희에서 의원선출

1925년

박은식 임시정부 2대 대통령

1926년

한용운 [님의 침묵] 발표

1926년

나운규 영화 [아리랑] 감독

1933년

프랭클린 D.루스벨트 뉴딜정책

1932년

윤봉길 훙커우 공원 의거

1936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 케인즈 혁명

1935년

나혜석 정조관념 해체 주장

1939년

아돌프 히틀러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45년

호치민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선언

1936년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1944년

아이젠하워 제2차 세계대전 종결

1947년

자와할랄 네루 파키스탄과 분리 독립

1945년

오광심 만주 심양, 애국부인회 위원장

1945년

윈스턴 처칠 국제연합 탄생

1949년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45년

김구 광복 후 귀국, 1947년 [백범일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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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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