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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을 믿고 정벌의 명분으로 인의(仁義)의 이름을 빌리는 이를 패(覇)제후라 하는데, 그러자면 반드시 국력이 강대해야 한다. 덕으로 인의를 행하는 이는 천하를 귀복시킬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 데는 반드시 강대국일 필요는 없다. 실력으로 복종시키는 이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진정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덕으로 복종시키는 이는 사람들이 기뻐서 진정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맹자] 공손추상)
성왕(聖王)의 덕치를 실현할 것을 주장한 이상주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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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이름은 가(軻), 자(字)는 자여(子輿), 자거(子車), 자거(子居) 등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생몰 연도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공자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이라는 맹자 자신의 말과, 맹자가 만난 제후들의 재위 연대를 고려할 때 그 활동 시기는 전국 시대 중엽 기원전 4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다. 생몰 연도에 관해서는 기원전 372~289년 설과 기원전 385~304년 설이 있다. 맹자가 태어난 곳은 당시 노나라와 인접한 추(鄒)라는 소국이었다. ‘성인이 살았던 곳과 가깝다’는 맹자 자신의 말대로, 오늘날 중국 산둥성 쩌우(鄒)현에 있는 맹자묘는 취푸(曲阜)현에 있는 공묘, 공부, 공림 등에서 남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사기]의 ‘맹자순경열전’에 따르면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제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후한 시대 조기(趙岐)의 [맹자제사](孟子題辭)에 따르면 맹자는 직접 자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연대적으로는 앞의 [사기]의 설이 보다 타당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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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맹모삼천지교와 맹모단직지교 이야기는 전한 시대 유향이 편찬한 [열녀전]에 나오는데, 이야기 자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전설에 가깝다. 다만 맹자의 어머니가 현모(賢母)로서 맹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맹자가 어머니의 장례를 유달리 각별하게 마음 써서 지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군주들에게 설파하는 유세(遊說)를 했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얼마 동안 유세를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양나라 혜왕과 양왕, 제나라 선왕, 송나라 언왕, 추나라 목공, 등나라 문공 등과 인연을 맺었던 것은 분명하다. 맹자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현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평탄한 삶을 살았다. 말년의 그는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전념했다. 사마천은 [사기] ‘맹자순경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 |
각국들은 바야흐로 합종연횡을 통한 싸움에 힘쓰고, 전쟁만을 능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맹자는 요순(堯舜)과 하․은․주 삼대의 성왕들의 덕치를 주장하고 다녔으므로, 그의 주장은 찾아간 나라들의 실정과 부합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물러나 만장 등 제자들과 함께 시(詩)와 서(書)를 정리하고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천술하여 [맹자] 7편을 지었다.
‘인의’(仁義)를 주창하여 인간론과 정치론의 기초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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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모습을 담은 그림 <출처: Wikipedi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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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에는 ‘인은 사람이 거해야 할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이 걸어야 할 바른 길이다’(이루상)라는 대목이 나온다. ‘왜 하필 이익을 말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양혜왕상)라는 대목도 나온다. [논어]에서는 인(仁)도 의(義)도 지(知), 용(勇), 신(信) 등의 다른 여러 덕목들과 사실상 동렬의 것으로 등장한다. 또한 인과 의를 대비시키거나 합쳐서 말하는 경우는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인은 유교에서 최상의 덕목으로 일컬어진다. 맹자가 유교에 미친 많은 영향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의(義)의 가치와 의미를 중시하여 높였다는 점이다.
사실상 맹자로 인해 유교에서 의가 인에 못지않은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의의 중요성은 맹자 시대의 전반적인 사상적 변화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맹자의 논적인 고자(告子)는 이른바 인내의외(仁內義外), 즉 인은 내면적인 것이고 의는 밖으로 드러난 외면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장자] 내편과 [묵자]의 십론 가운데에도 인과 의를 대비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나온다. 그러나 인과 의를 나란히 일컬어 ‘인의’로 말한 것은 맹자가 처음이다. 따라서 맹자를 인의의 제창자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맹자의 사상과 학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왕도론과 성선설이라고 하지만, 인의야말로 그 둘을 뒷받침하고 연결 짓는 축에 해당한다. 인의의 정치를 행해야 할 필요성을 논하는 것이 왕도론이며, 인의의 마음을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게 성선설이다. 요컨대 맹자의 정치론과 인간론에서 공히 중추를 이루는 것이 인의의 이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의’에서 인과 의의 뜻을 나누어 생각해보면, 때에 따라서는 일종의 가족 도덕에 한정되어 각각 효(孝)와 제(悌)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으나, 대체로 인은 연민이나 친애(親愛)를 뜻하고 의는 정의나 도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인의’는 그 자체로 도덕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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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도덕적 각성과 수양을 요구하는 성선설
 성선설은 인간은 선천적으로 도덕적 소질을 갖추고 있다는 주장이다. 자공은 스승 공자에 대해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성(性)과 천도(天道)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은 좀처럼 듣지 못했다’라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공자의 제자 시대까지만 해도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맹자 시대에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성행했다.
[맹자] ‘고자상편’에는 성선(性善)의 입장을 취하는 맹자와, 인간의 본성는 본래부터 선과 불선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고자(告子) 사이의 한 발치 양보도 없는 논쟁이 실려 있다. ‘고자상편’에 실린 맹자의 제자 공도자(公都子)의 말에 따르면, 맹자의 성선설, 고자의 성무선무불선(性無善無不善)설, 그리고 인간 본성에는 선악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어 본성을 어떻게 기르느냐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는 설, 본성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설 등이 있었다.
인간의 본성과 마음에 관한 맹자의 주장은 인간의 마음이 인의예지(仁義禮智) 각각의 실마리에 해당하는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선설은 논리적 논변이나 구조를 갖춘 학설이라기보다는 맹자의 신념을 밝힌 것에 가깝다. 성선을 주장하는 맹자의 의도는 결국 각 개인에 대해 도덕적 각성을 요구하고, 그것을 위해 부단하게 수양할 것을 요구하는 데 있다. 맹자를 가리켜 유학에서 ‘마음의 본래 이치를 밝혀 도덕 수양을 하는 학문’ 즉 심학(心學)의 사실상의 제창자로 일컫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맹자의 민본주의와 혁명사상 그리고 왕도(王道) 정치 | |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 임금이 걸을 쫒아내고 무왕이 주를 정벌했다는 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그렇다고 답하자 선왕이 다시 물었다. “신하된 자가 자기 임금을 살해해도 괜찮은 겁니까?”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흉포하다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학하다 하는 데, 흉포하고 잔학한 인간은 한 평민에 지나지 않기에, 한 평민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살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맹자] ‘양혜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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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인하고 불의한 군주는 민심을 잃게 되는데, 민심이야말로 하늘이 맡긴 사명이자 소임, 즉 천명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민심을 잃어 천명이 떠나간 군주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평민에 불과하다는 것, 따라서 천명이 떠나버린 군주를 몰아내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 여기에서 맹자의 민본사상과 혁명사상을 엿볼 수 있다. 맹자는 ‘백성이 귀중하고 사직(社稷)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대단치 않다’고 말함으로써 민본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 |
힘으로 인(仁)을 가장하는 것은 패도이다. 패도를 칭하려면 반드시 큰 나라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덕으로 인을 행하는 것은 왕도이다. 왕도를 펴는 데는 큰 나라여야 할 필요가 없다.…힘으로 남을 복종시킨다면 그것은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며 힘이 모자라서이다. 덕으로 남을 복종시킨다면 그것은 마음속으로부터 기뻐서 정말로 복종하는 것이다. ([맹자] ‘공손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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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패도가 횡행하던 시대에 맹자는 덕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의(仁義)을 실천하는 정치, 이른바 왕도 정치를 꿈꾸었다. 앞서 인용한 사마천의 기록, 즉 ‘요순과 하․은․주 삼대의 성왕들의 덕치를 주장하고 다녔으므로, 그의 주장은 찾아간 나라들의 실정과 부합될 수 없었다’는 기록은, 맹자의 왕도 정치 이상이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정을 알려준다. 그가 꿈꾼 ‘왕도 정치의 군주와 나라’는 이후 유교의 역사를 통해 모든 유학자들의 현실 정치에 대한 이상이 되었고, 때로는 패악한 군주를 비판하는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 |
- 글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발행일 201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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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333년
단군 단군조선 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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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790년
함무라비 함무라비법전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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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100년
주의 무왕 주나라 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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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800년
호메로스 [일리아드] [오딧세이] 집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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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563년
석가모니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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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99년
공자 노나라 최고재판관에 오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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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478년
페리클레스 델로스 동맹결성 |
BC 492년
다리우스1세 페르시아 전쟁으로 오리엔트 통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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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399년
소크라테스 독배마시고 죽음 |
BC 350년
맹자 제자백가의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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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335년
아리스토텔레스 아테네 리케이온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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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동방원정 시작 |
BC 317년
찬드라굽타 인도 최초 제국, 마우리아왕조 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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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61년
아소카 마우리아 왕조, 불교 공식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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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218년
한니발 제 2차 포에니 전쟁 |
BC 221년
진시황제 진나라 중국 최초 통일, 만리장성 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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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02년
한고조 유방 한나라 중국 재통일 |
BC 194년
위만 고조선 왕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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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41년
한무제 유철 한나라 왕 즉위, 영토 확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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