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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서양사]쿠푸 - 최대의 피라미드를 세운 이집트의 파라오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12.02|조회수612 목록 댓글 0

쿠푸

“위대한 파라오는 경건한 태도로 밤하늘의 별을 측정했다. 그는 금빛으로 빛나는 옷을 입고, 세스헤트 여신의 차림을 한 사제와 나란히 가마를 타고 기자로 행차했다. …사제가 건내준 황금 망치로 정해진 곳에 못을 박고, 하늘을 바라보고 거리를 측정하였다. 그리고 신중하게 두 번 째 못을 박을 위치를 정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기록한, 쿠푸 왕의 엄숙한 피라미드 기공식 장면이다. 그 의식이 과연 정확히 기록된 대로 행해졌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건축물이 놀랄 만큼 정확한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세워진 점은 분명했다. 그리고 기공식에서 손수 못을 박으며, 그는 자신의 영혼을, 아니면 최소한 이름을 불멸로 만들었다. 

 


제4왕조, 황금기에 접어든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를 세우며 “고왕국 시대”의 문을 열었던 이집트 제3왕조는 약 70년 만에 후니 왕의 서자이면서 사위인 스네프루에 의해 제4왕조로 교체된다. 제4왕조는 스네프루부터 셉세스카프까지 6대를 이어가며 약 100년 동안 존속했을 뿐이지만 고왕국 시대, 아니 이집트 역사 전체적으로도 최대의 황금기였다고 평가된다.

 

이 시대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대 피라미드들이 차례차례 세워지기 때문이다. 스네프루는 최초의 사각뿔 형태 피라미드인 ‘붉은 피라미드’와 ‘굴절 피라미드’를 지었고,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는 기자에 대규모의 사각뿔 피라미드를 건축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는 스네프루의 대를 이은 쿠푸 왕의 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 위대한 불가사의를 세우다


대 피라미드’(쿠푸 왕의 피라미드)가 들어선 기자는 두터운 암반층이 넓게 퍼져 있는 곳이다. 대 피라미드는 한 번의 설계로 지은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증축된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굳이 그런 지형을 택한 것은 처음부터 전체의 어마어마한 무게(575만 톤으로 추정된다)를 버틸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놀랄 만큼 정확한 위치 역시 엄밀한 설계를 짐작케 한다. 네 모서리가 동서남북을 가리키는데 평균 3분 6초 정도의 오차밖에 없으며, 네 밑변 역시 최대 20센티미터 남짓한 오차만 남기고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용된 돌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데 높이 50센티미터의 것에서 2미터가 넘는 것까지 있다. 이런 돌을 230만 개 사용해서 210단을 쌓아 올려 높이가 147미터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위의 7단이 무너져 내려 138미터라고 한다. 기원후 1300년에 링컨 대성당(160미터)이 영국에 세워지기까지, 약 38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1798년에 이집트를 원정한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중턱에 앉아 피라미드에 사용된 돌이면 3.7미터 높이로 프랑스를 둘러싸는 성벽을 쌓을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그리고 그는 혼자서 피라미드에 들어가 오랫동안 있다가 나왔는데, 그 안에서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며 평생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대 피라미드. <출처 : NGD>

 

 

오늘날 나폴레옹이 아니라도 수많은 사람이 피라미드 내부를 관광하고 있는데, 나폴레옹을 놀래킬 만한 것은 발견하지 못한다. 그렇게나 웅장한 피라미드의 내부에는 매우 좁고 긴 길과 황량한 방 몇 개만 있을 뿐이라는 점이 놀랍다면 놀라울까. 사실 사후세계를 믿었던 이집트인의 다른 무덤을 비롯한 옛 권력자들의 무덤에는 어김없이 화려한 벽화와 조각이 베풀어져 있음을 생각하면, 피라미드 내부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 장식이 없다. 그래서 그것이 파라오의 묘가 아니라 신전, 창고, 심지어 우주인들의 기지라는 설까지 나오고 있으나, 쿠푸 왕의 석관이 내부에 있고, 밖에는 가족과 친지들의 무덤이 있으며, 근처에서 파라오가 사후에 하늘의 나일 강을 건너는 데 쓰는 “태양배”도 발견된 이상 묘로 봐야 한다는 게 정설이다. 지금 그 관은 텅 비어 있는데, 9세기에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이 피라미드를 약탈하고 쿠푸의 미라는 사막에 내버렸다는 말이 있다. 본래는 피라미드 외부를 덮고 있던 석회암 장식재도 그때를 전후해 뜯겨져서 모스크 건축에 활용되었다고 한다.

 

대 피라미드의 입구. 지금은 폐쇄되어 있고, 관광객은 알 마문이 뚫었다는
도굴 루트로 출입한다. <출처: wikipedia.org>


당시의 건축기술로 어떻게 거대한 돌을 운반하고, 정확하게 쌓아올릴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불가사의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2만 명의 노동자가 3개월 교대로 20년 걸려 건설했으며, “위에서 밑으로 완성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는 먼저 과거의 조세르 피라미드 같은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든 다음 위에서 아래로 계단 부문을 메워 내려오는 식으로 지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뒷받침해 주지만, 어떻게 그런 엄청난 작업을 그토록 정교하게 이뤄낼 수 있었는지는 아무도 분명히 말하지 못한다. 헤로도토스는 “모두가 왕의 노예”인 이집트에서 얼마나 국민을 혹사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처럼 묘사했으나 오늘날에는 노동자들이 노예로서가 아니라 임금을 받고 일했음이 정설이며, 그렇게 가혹한 취급을 받지도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피라미드 건설을 기근을 만난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한 복지사업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을 정도다. 

 

 

쿠푸 왕은 폭군이었는가?

그토록 유명하면서도 수수께끼가 많은 대 피라미드를 지은 장본인인 쿠푸 역시 모호한 부분이 많은 인물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크눔쿠푸”, 즉 “크눔 신이 보호하시는 사람”이었는데 쿠푸로 줄여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헤로도토스는 “케오프스”라고 불렀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역사가인 마네토는 “수피스”라고 했다.

 

스네프루의 맏아들인 그는 20대에 왕위를 계승했다고 할 뿐 정확한 출생연도도 알려져 있지 않은데, 재위 기간도 23년(투린 파피루스), 50년(헤로도토스), 63년(마네토)으로 제각각이다. 제19왕조의 람세스가 전국에 자신의 조상을 수없이 만들어 놓은 반면, 그만큼이나 유명하고 권력이 컸던 쿠푸의 조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같은 제4왕조의 카프레, 멘카우레의 조상도 여럿 남아 있는 점을 보면 이상할 정도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 1903년에 발견된 7.6센티미터 크기의 작은 상아 좌상이다.

 

그것은 쿠푸가 백성을 가혹하게 부리고 나쁜 정치를 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그의 조상을 깨트리고 없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쿠푸는 대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신전을 폐쇄하고 사제들을 건축장으로 내몰았으며 심지어 자신의 딸에게 성매매를 시켜 건축자금에 보탰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헛된 전설에 바탕을 둔 헤로도토스의 악의적인 서술이라는 평가가 많다. 실제로 쿠푸에게 올리는 제사가 그의 사후 2천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쿠푸가 악명이 자자한 폭군으로 남은 나머지 사람들이 그의 조상을 없애버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 피라미드 건설도 그렇게까지 국민을 혹사시킨 사업이었을 것 같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서 2기, 부왕을 위해 1기의 피라미드를 지음으로써 전체적으로는 건축 사업을 더 많이 일으켰던 쿠푸의 선왕 스네프루는 널리 국민에게 사랑받은 왕으로 전해지고 있다.

 

 

학자 군주의 영광과 불운


단편적으로 남은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쿠푸는 학식이 높고 명석한 군주였던 것 같다. 그는 옛 왕조의 기록을 연구해 잊혀진 호루스 숭배의 전통을 되살렸으며 신이 자신에게 내린 계시를 전하는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또 수학과 천문학에 뛰어났다고도 한다. 피라미드 기공식 장면 묘사에서 그가 보여준 관측은 단지 의례적인 제스처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조세르 피라미드를 지은 임호테프가 신으로 숭배된 반면 대 피라미드의 건축 책임자인 헤몬은 그런 영광을 얻지 못했다.

 

 

기자의 피라미드들. 대 피라미드 뒤로 작은 피라미드와 분묘들이 보인다. <출처: (cc) wikipedia.org>

 

 

또한, 쿠푸는 선왕 스네프루가 개척한 시나이 반도의 영토를 지키려 그곳에 원정, 베두인 족을 물리쳤고, 이집트 남쪽으로도 군대를 보내 엘레판티네까지 이르렀다. 쿠푸는 자신의 권력을 든든히 하고자 중요한 관직에 가까운 친족들을 임명했고(이 때문에 적어도 사제들 사이에서는 그의 평판이 나빴을 수도 있다), 사후에도 그들을 거느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즉 두 왕비와 모후 헤테페레스는 대 피라미드 옆의 작은 피라미드에 묻혔으며 여러 왕자, 공주, 그리고 헤몬을 포함한 대신들은 마스타바 분묘에 묻혀 대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왕실 공동묘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쿠푸의 영광된 치세는 말년에 음산한 그림자로 덮였다. 그가 아끼던 후계자, 카와브가 돌연 사망했는데 그것이 다른 왕비에게 얻은 아들인 제데프라의 암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제데프라는 순수 이집트계가 아닌 리비아계 혈통이 섞였기에 이 사건은 많은 분란을 일으켰다. 그런 와중에 늙은 쿠푸의 처지도 편안했을 리 없으리라. 제데프라는 결국 이복형의 아내인 헤테페레스 2세까지 빼앗고 쿠푸의 뒤를 이어 파라오가 되었다.

 

하지만 10년이 못되어 쿠푸의 또 다른 왕자인 카프레에게 암살된다(죽음은 면하고 퇴위당했다고도 한다). 고왕국 시대에 들어서기까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신과 뒤섞인 존재였다. 피라미드는 그 실권이 더욱 강해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없던(적어도 알려지지 않은) 음모, 배신, 암살 같은 권력정치의 추한 현실이 비로소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다. 높이 솟아 빛나는 피라미드가 드리운 그림자처럼 검은 이야기들이.


쿠푸 왕의 “태양배”

 

 

불멸의 파라오


1990년대 말, 바야흐로 21세기의 개막을 두고 여기저기서 “밀레니엄 최고 인물”꼽기가 이루어지던 때, 아프리카에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프리카 사람은?”이라는 설문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때 최다 득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쿠푸였다. 알려진 업적이 많지 않고 도리어 악명까지 있는 사람임에도, 수 천 년을 두고 인류를 경탄시킨 피라미드를 세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최대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사실 오늘날 누가 쿠푸와도 같이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물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그 기념물의 의미가 긍정적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말이다.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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