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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서양사]투키디데스 - 실증적 역사를 개척한 그리스의 역사가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12.24|조회수470 목록 댓글 0

투키디데스

“내가 여기에 쓰는 역사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역사의 반복 또는 적어도 반복에 가까운 것을 대비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글에서 충분한 도움을 얻을 것이다. 이는 대중의 찬사를 받고자 쓰는 문학이 아니라, 영원한 지식의 보고로 남기 위해 이루어진 사실의 집적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서문에서 밝힌 대로, 투키디데스는 이십 년 정도 먼저 태어나 [역사]를 써낸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의 아버지’라는 영예는 빼앗겼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역사, 오직 사실에 기초한 인간의 역사”의 선구자로서의 위치는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다.

 

 

아테네 “제국”, 그 영광과 황혼

 

기원전 5세기의 중간쯤에 아테네는 건국 이래 최대의 영광에 도달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초강대국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덕분에 또 다른 침략을 대비하고자 만들어진 델로스 동맹의 맹주를 맡았다. 이 동맹이 점차 아테네의 국력을 떨치기 위한 기반으로 바뀌고,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하게 된 아테네는 해상무역의 주도권 역시 잡아 막대한 부를 누리게 된다. 


 

이와 함께 페르시아 전쟁에 복무했던 하층민들의 참정권을 인정하면서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페이디아스, 아낙사고라스, 소크라테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이 나타나 학문과 예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영광의 시대를 이끈 대정치가 페리클레스가 자신 있게 말했듯, “아테네는 그리스 전체의 모범”이라 할 수 있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아테네 제국’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출처 : wikipedia>


그러나 이런 “아테네 제국”에 대한 반발도 커져갔다. 아테네는 맹주의 권한을 남용하여 델로스 동맹 기금을 사적으로 전용하는가 하면, 동맹에서 탈퇴하는 나라는 힘으로 제압하고 점령군을 두어 군사통치를 했다. 델로스 동맹 회원국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법률 문제는 아테네의 법정에서 아테네 시민들의 판결에 따르도록 강요되었기에 오랫동안 독자적인 삶을 누려온 소국가들의 불만이 컸다. 뿐만 아니라 전통의 육군 강국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패권을 염려했고, 시칠리아 등 멀리까지 식민지를 확대하려는 아테네에게 원래 그 지역에 이권을 갖고 있던 코린트 등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이들 동맹에 포함된 나라들과 중립인 나라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마침내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중간에 몇 년 동안 휴전하기도 하면서 기원전 404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으로 아테네 제국은 몰락했으며, 승리한 펠로폰네소스 역시 힘이 다하면서 그리스 전체가 쇠퇴해 버린다. 그리하여 북방에서 힘을 기른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되고, 다시 로마의 손에 들어가면서 그리스의 영광과 독립은 천 년 이상 실종되고 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이 시기에 살면서 이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또 관망했던 투키디데스가 조국 아테네의, 아니 그리스의 몰락을 엮어낸 역사서다.

 

 

오랜 추방이 불멸의 책을 쓰게 하다


투키디데스의 생애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그의 아버지는 오롤로스이며 트라키아 왕가의 피를 이었고, 그곳의 광산을 소유했다고 한다. 아테네의 장군으로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인 밀티아데스와 친척관계라는 말도 있으며,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와도 혈연이 있다고 하지만 모두 분명하지 않다. 당시 오롤로스라는 이름이나 투키디데스라는 이름이 비교적 흔했기 때문에 이런 혼동이 불가피했다. 아무튼 그가 상당한 명문가 태생으로 유복하게 자랐음은 확실해 보인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의 가르침을 받아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귀족주의자였던 변론가 안티폰에게 웅변을 공부했다. 따라서 그는 귀족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발전을 적극 지지했고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대중이란 선동에 놀아나거나 일시적인 감정에 휩쓸려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고 보았으며, 페리클레스와 같이 현명한 지도자가 있어야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을 막지 못하고 어느 정도는 부추긴 페리클레스에게 반대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전쟁 직전에 이미 이 전쟁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여겼으며, 그 진행 과정을 충실히 파악하고 기록하기 위해 여러 계층의 아테네인들에게, 심지어 일부 스파르타인들에게까지 돈을 주고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가령 어떤 전투가 아테네의 사실상 패배로 끝났어도 아테네가 승리했다고 진상을 왜곡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최대한 여러 각도에서 사실을 보려고 했던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24년 겨울에 장군으로 트라키아암피폴리스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 군의 브라시다스가 암피폴리스를 점령함으로써 투키디데스는 책임을 지고 아테네에서 추방당한다. 이것은 과도한 조치였는데, 투키디데스가 패전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도착하기 전에 암피폴리스가 브라시다스에게 항복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투키디데스는 에이온 지방을 적에게서 빼앗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는 페리클레스가 예상 밖으로 길어지는 전쟁으로 입장이 곤란했으며, 그나마 몇 년 뒤에는 역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한편 페리클레스의 라이벌이자 투키디데스와는 앙숙이었던 클레온이 권력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투키디데스는 20년 가량이나 아테네에서 떠나 있어야만 했다. 


투키디데스를 좌절시킨 암피폴리스의 폐허. 1831년의 그림. <출처 : wikipedia>

 

“...그러나 덕분에 나는 양쪽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특히 펠로폰네소스 인들의 입장을 차분히 관찰할 수가 있었다.” 투키디데스의 독백처럼, 이런 불운은 한편으로 그의 역사 기록에는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그가 20년의 추방을 겪지 않았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만큼 풍부하면서 심도 있는 작품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 20년 뒤에는? 이 부분이 모호하다. 기원후 2세기의 그리스 학자인 파우사니아스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한 기원전 404년 직후에 투키디데스의 추방이 해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파우사니아스는 그가 아테네로 돌아오던 길에 누군가에게 암살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는 기원전 397년에도 그가 살아 있었다고 한다. 로마의 플루타르코스는 투키디데스가 아테네에 돌아와 기원전 395년쯤에 죽었으며, 친척인 키몬의 가족 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반면 그가 끝내 아테네로 돌아오지 못한 채 트라키아에서, 또는 이탈리아에서 숨을 거뒀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20년 동안의 추방”이라는 표현이 투키디데스 자신의 글에서 나옴을 볼 때 그가 전쟁이 끝나던 기원전 404년까지는 살아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왜 [전쟁사]를 기원전 411년의 일까지만 쓰고 남겨두었는지도 의문이다. 이처럼 이 위대한 역사가의 개인적 역사는 시작도 끝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전쟁사]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작품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그의 이름을 불멸케 했다.

 

 

“오직 사실만이 말한다”


그러면 투키디데스의 역사 서술은 어떤 점에서 독특했을까? 그는 우선 “그럴듯한 이야기”를 일체 배재하고 “근거 있는 사실”만 다루었다. 헤로도토스만 해도 신화와 전설, 야담이나 뜬소문 등을 뒤섞어 썼으나 투키디데스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이나 여러 자료와 증언에 따라 사실이라 믿어지는 것만을 썼다. 이로써 역사는 비로소 “옛날 이야기”를 벗어나 “사실의 기록”이 된다. 또한 그는 역사 기술자의 주관과 입장을 배제하고 철저히 객관적으로 사건을 다루려고 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학자인 마르케리노스의 말대로 그때까지는 “코린트인은 자기네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왜곡하고, 티마이오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친했다는 이유로 안드로마코스를 찬양했다. ... 크세노폰은 플라톤을 질투했기에 플라톤을 따르던 메논을 험담했다.”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와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그의 실수나 약점을 고스란히 기록했고, 조국 아테네의 참담한 패배나 어처구니없는 실책도 빠짐없이 담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묘사된 페리클레스의 장례식 연설을 그린 상상도. 당시는 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기원전 431년이었고,
이 연설에서 “아테네는 그리스의 모범”이라는 말이 나왔다. <출처 : wikipedia>

 

 

또한 투키디데스는 역사의 흐름이 신이나 운명 같은 초자연적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을 신들의 게임으로 풀이했고, 헤로도토스도 신의 뜻이라거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식의 해설을 곧잘 했다. 하지만 투키디데스는 우연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의지만이 역사를 만들어간다고 보았다. 이런 독특한 역사관은 “과학적” 내지 “실증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었고, 플루타르코스, 타키투스 등의 후배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2세기 로마의 작가인 루키아노스는 투키디데스야말로 역사가들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확고한 지침을 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2천 년을 훨씬 뛰어넘어,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랑케는 투키디데스의 정신을 되살려 “실증주의 역사관”을 정립했다. 그는 또한 “현실주의 정치론”의 시조로도 평가된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어떤 이념이나 도덕 문제, 또는 우연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라 국제적 역학관계 때문이라고 했다.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이 아테네의 국력 증대를 우려했고, 이를 억제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원전 414년에 있었던 멜로스 대표와 아테네 사절 사이의 “멜로스 회담” 이야기는 그런 냉엄한 국제관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나타내 주는 사례로 꼽힌다.

 

헤로도토스(왼쪽)와 투키디데스의 양면 흉상.
<출처 : wikipedia>


당시 “우리가 무슨 불의한 짓을 했다고 우리에게 굴복을 강요하는가?”라는 약소국 멜로스의 항의에 아테네인들은 “당신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일은 없다. 하지만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뜻에 따라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한 정의다”라며 멜로스의 자유를 짓밟았다. 이는 국제관계를 기본적으로 힘의 관계로 이해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들 사이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현대의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정치 자체가 도덕이나 이념보다 권력의 역학관계에 좌우된다고 보는 시각은 마키아벨리홉스 등의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근대 정치학이 탄생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므로 현대 정치철학을 재정립한 레오 스트라우스도 [서양정치철학사]의 첫머리에 투키디데스를 놓았던 것이다. 이처럼 투키디데스와 그의 [전쟁사]의 목소리는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기에, 현실주의를 지양하려는 대표적 이상주의자였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도 파리 평화조약 회담장으로 가는 길에 [전쟁사]를 숙독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한계와 의문


그러나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술과 사상이 그렇게 완전하지는 않았으며, 그의 영향력은 다소 과장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먼저 “실증적 역사서술”의 경우, 투키디데스가 개인적 입장과 주관을 배제하고 공평하게 서술했다고 하지만, 그는 사실 노골적으로 편을 들지 않았을 뿐이며 기사의 편집과 표현에서 교묘하게 자신의 편향성을 드러냈다고도 한다. 자신의 지론과 맞지 않는 사건은 언급하지 않거나 조그맣게 처리한다든가, 자신이 은근히 지지하는 쪽의 주장은 호소력이 큰 표현으로, 반대하는 쪽의 주장은 횡설수설하는 듯한 표현으로 기술하여 독자가 은연중 편향된 시각을 갖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언론이 중립을 표방하면서 은근히 특정한 입장을 옹호하듯, 투키디데스도 노골적으로 편을 들기보다 중립성을 내세우며 은근히 편드는 쪽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직접 보거나 충분한 근거가 있는 사실만 취급한다”는 투키디데스의 원칙도 역사가의 시각을 지나치게 좁혔다는 비판을 받는다. 역사가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는 매우 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화와 전설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겠지만 과거사의 진실을 일부 알려줄 단서일 수 있는데, 실증적 역사관은 이를 일체 배제해버렸다. 또한 헤로도토스의 경우 이집트 문명의 독특성을 그 지리적 조건에서 찾는 등 자연, 인종, 경제, 문화 등에서 역사를 다각적으로 조명했지만 투키디데스는 오직 정치적, 군사적인 역사만을 역사로 보려 했음도 한계로 지적된다.

 

이른바 “현실주의의 아버지”로서의 투키디데스도 의문의 대상이 된다. 투키디데스의 주장과는 달리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의 아테네는 전성기를 지나 점점 국력이 쇠퇴해 가는 중이었고, 따라서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두려워하여 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는 점, 세력균형의 문제보다 오히려 지도자들의 정치적 입장이나 국민적 정서 등에서 전쟁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투키디데스가 현실주의자여서 국제관계는 오직 힘의 관계라 여겼다면 국가별 병력 규모나 전술전략, 지정학이나 경제력 등에 중점을 두어 서술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전쟁사]의 내용은 지도자의 연설이나 장군들의 무용담 등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그가 과연 현대 현실주의자들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일부. 10세기 경의 필사본이다.
<출처 : wikipedia>

 

 

오늘날 투키디데스의 “사실”이란?


기원전 5세기, 지금으로부터 2400년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 현대적인 “실증주의자”, “현실주의자”로 살고 생각했다고 보는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 하지만 그의 역사 서술 방식과 그것에 깃든 사상이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었고, 그 영향이 오래도록 남아 지금까지도 일부 이어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투키디데스라는 인간은 우리의 직접 경험의 범위에서 아득하게 멀리 있지만, 그의 영향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점만은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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