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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실현시켜 줄 결정적인 계기는 인생의 큰 위기가 지나고 나서 오기 마련이다. 콜럼버스는 147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탑승한 제노바의 상선이 프랑스와 포르투갈 해적선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 침몰해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때 그는 바다에 떠있는 노를 잡고 수영을 해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갔다. 리스본은 대서양을 향해 열린 유럽의 거대 항구로서 전 유럽에서 건너온 선박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 이미 와 있던 동생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지도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항구도시 리스본은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매우 적절한 장소였다. 그곳에는 막 항해를 마치고 온 선장들과 미지의 땅에 대한 도전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젊은 콜럼버스의 주위에서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리스본에서 콜럼버스 형제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로 명성을 날렸다. 항로와 육로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 이 시기는 이후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준비기간이 있었기에 대서양 횡단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불어 독학으로 에스파냐어를 공부했고, 독서를 통해 교양을 쌓았다. 그리고 당시 인기 있던 선박인 카라벨의 조종법을 익혔고 북대서양의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서 부유한 포르투갈의 관리이자 선장의 딸인 펠리파 페레스트렐로 에 모니즈를 만났다. 그녀는 전통적인 귀족 집안의 젊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의 한 교회에서 그녀를 만나 1478년에 꿈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인해 콜럼버스는 위험한 탐험의 길을 떠나지 않더라도 최소한 처가의 인맥으로 부유한 상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항상 마음속에는 ‘검은 바다’로 불린 대서양이 파도치고 있었다. 그는 장인이 유품으로 남긴 항해 지도와 선장 일지, 지도 등을 장모로부터 물려받았다. 이 유산은 대서양의 바람과 해류에 관한 소중한 기록들로 그에게는 그 어떤 보물보다 귀중한 것이었다.
당대 유럽인들에게 가장 먼 땅은 지금의 중국인 카다이, 인도, 그리고 일본인 지팡구였다. 유럽인들에게 이곳은 비단과 향료와 같은 이국적인 상품들이 넘쳐나는 곳이며, 황금과 보물이 넘쳐나는 곳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인들의 육식 식탁에 반드시 필요한 향료는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 상인들과 거래가 되고 있었다. 실크로드는 이동 경로가 멀고 험한 탓에 동양의 물품들은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낙타 대신에 배를 타고 쏜살같이 바다를 가로질러 동양으로 가는 바닷길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콜럼버스도 이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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