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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프랑스의 군인_정치가 - 페탱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09.08.24|조회수847 목록 댓글 0

패탱


“여러분…. 저는 1940년 7월에 프랑스 국민의 대표에게서 권력을 부여 받았습니다. (…) 저는 이 권력을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는 데 썼습니다. 그것은 제 명예를 스스로 더럽히는 선택이었습니다. (…) 제 목에는 언제나 칼이 들이밀어져 있었습니다. 적의 강요 앞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해, 저는 갖은 애를 써야만 했습니다. 역사는 제가 여러분을 지키고자 얼마나 애썼는지 밝혀줄 것입니다.”

 

1945년 7월 23일. 프랑스의 어느 재판소. 피고석에서는 군복 차림의 노인이 일어서서 재판에 임하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무척 힘겨워 보였으며, 자기도 모르게 말이 떨리고 종종 발음이 분명치 않았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손부채를 부치며 이 중요한 재판에 참석하고 있던 사람들은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 사람의 최후는 이미 노환(老患)이 제 몫으로 맡아 놓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흔 살이 된 필립 페탱은 살짝 치매 증세까지 나타내는 중이었다.

 

“…저를 단죄하시려거든, 그것이 마지막 단죄이게 하십시오. 어떤 프랑스인도 합법적인 지도자의 지시를 따랐다는 이유로 구속되거나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세상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바, 여러분은 정의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그 무고한 사람은 져야 할 짐을 지겠습니다. 프랑스의 원수(마레샬 드 프랑스)는 누구의 은혜도 구걸하지 않으니까요. 여러분의 심판은 신과 후손들의 몫입니다. 그들은 저의 양심과 저의 기억을 두고 올바른 심판을 내릴 것입니다. 저는 프랑스의 손에 저를 맡깁니다!”

 

 

앙리 필립 페탱은 1856년, 북프랑스의 코시 알라투르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무 살에 군에 입대하고 사관학교를 나왔으나, 원래는 그리 출세운이 없었다. 제국주의가 절정이었던 당시에는 해외 식민지 근무를 해야 실전 경험을 쌓고 명성을 날릴 기회가 많았는데, 페탱은 내내 본토 근무로만 돌았다. 그래서 아마도 평생 별을 달지 못한 채 군 경력을 마칠 것 같다고들 여겼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그의 진가를 뒤늦게 발휘할 기회를 안겼다. 그 때까지의 보병 전술은 용맹한 ‘일제 돌격’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관총을 비롯한 강력한 화기가 등장하면서 그런 전술은 제 무덤을 파는 것이 되었는데, 그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 페탱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시작 시점에는 기존의 전술을 고집하는 지휘관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그토록 전사자가 많이 나오기도 했다. 반면 참호와 철조망에 의존하면서 자동화기를 최대한 활용하는 전술을 편 페탱은 이내 두각을 나타냈고, 불가능할 것 같던 장군 진급은 물론 가장 중요한 전선을 맡아 지휘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의 최대 공로는 1916년 2월의 베르됭 전투였다. 당시 독일군은 베르됭을 장악하여 교착되어 있던 서부전선의 돌파구를 얻고 파리까지 진격할 발판을 마련하려고 베르됭 공략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페탱의 탁월한 방어전으로 전투는 10개월이나 이어졌고, 결국 독일군이 패퇴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 승리로 돌아가는 중요한 전기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페탱은 영웅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 받는 군인으로 남았다. 그는 ‘프랑스의 원수(元帥)’라는 칭호와 함께 일곱 개의 별이 박힌 지휘봉을 받음으로써, 프랑스 군인으로서의 최대 영예를 누렸다.

 

 

페탱은 1934년에 국방장관을 맡으며 정치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데 당시는 세계 어느 나라나 대공황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프랑스에서는 그 혼란상이 유독 심했다. 그것은 경제보다는 이합집산과 이전투구를 되풀이하는 정치가 주된 원인이었다. 피에르 라발과 같이 노골적인 파시즘 추종자에서 레옹 블룸 같은 골수 좌파, 달라디에 같은 중도파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정권을 수립했다가 금세 퇴장하고, 다시 나타나고 하기를 반복하며 춘추전국시대를 이루었다. 그런 와중에 경제난은 그치지 않고, 외교는 줏대가 없이 이리저리 휩쓸렸으며, 숫자적으로는 유럽 최강이라 할 수 있던 군사력도 때에 맞춘 혁신과 보강을 하지 못해 마냥 녹슬고 있었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식민지에서도 갈수록 독립운동이 거세졌다

 

이런 지리멸렬함 속에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한 프랑스는 자신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결국 나치 독일에 굴욕적으로 무릎 꿇고 말았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달라디에 내각이 퇴진한 다음 집권한 레이노는 페탱의 높은 국민적 인기를 활용하고자, 이미 80대 중반의 나이로 은퇴해 있던 그를 전시내각에 다시 불러들였다. 페탱의 부관이었고 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드골(드골의 맏아들인 필립은 페탱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었다)도 함께였다. 하지만 “정부를 알제리로 옮겨서라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드골과 “패전은 현실이다. 현실을 인정하면서 최선을 도모해야 한다”는 페탱의 대립 속에 레이노는 정권을 페탱에게 넘겼고, 드골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페탱은 히틀러와의 휴전협정에 나섰고, 1940년 6월 21일에 콩페뉴 숲의 낡은 객차에서 협정이 조인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항복은 어느 객차 안에서 치러졌는데, 히틀러는 그 때의 차량을 끌고 오게 해서는 그 안에서 프랑스의 사실상 항복을 받아낸 것이었다. 협정에 따라 프랑스 국토의 5분의 3이 독일의 직접 점령하에 놓이고, 두 나라 사이의 고질적 분쟁지역이었던 알사스로렌은 독일에게 귀속되었으며, 남은 프랑스 남부 지역은 프랑스 정부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종전 후 약 한 달 뒤인 7월 10일에 남부 프랑스의 비시에서 제3공화국 최후의 국회가 열려, ‘노동, 가족, 조국’을 표어로 삼는 새로운 공화국을 출범시키는 한편 국가주석 페탱에게 행정권만이 아니라 입법권까지 포괄하는 ‘전권’을 부여했다. 이로써 페탱은 ‘비시정부’의 국가수반이 되어 5분의 2의 프랑스를 2년여 동안 통치하게 되었다. 페탱은 파시스트가 아니었지만, 나이든 군인으로서 민주주의의 복잡한 과정에 생리적인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가 진 이유는 1936년의 인민전선 정부를 비롯한 좌파의 ‘비애국적’ 정책과 당리당략에만 골몰하는 정치인들의 드잡이에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독일의 총통 체제와 흡사한 독재적 체제를 구축했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와 노동3권을 크게 제약했다. 영장 없이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게 하는 등 기본적 인권도 훼손시켰다. 그리고 ‘마지못해’ 독일의 요구에 협력했다.

 


당시 비시 프랑스는 사실상 독일의 속국과 같았는데, 페탱은 때때로 용기를 보여주었다. 가령 독일이 독일군 두 명이 살해된 일을 앙갚음하려 독일에 억류되어 있던 프랑스군 포로 백 명을 처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때, 페탱은 히틀러에게 “그러면 제일 먼저 나부터 죽여라”고 맞서서 결국 처형 위협을 철회시킨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포로들을 송환시킬 수는 없었고, 독일의 유대인 박멸 정책에 협력해서 프랑스의 유대인들을 색출해야 했다(독일 점령 하의 다른 유럽 국가에서처럼 유대인에게 노란색 별을 달게 하는 치욕은 면하게 해주었지만). 그리고 프랑스 경찰의 손으로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수색, 체포해서 독일에 넘겨준 일은 뭐라고 해도 변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협정에 따라 ‘중립’이었던 비시 프랑스는 독일군에게 병력을 지원하지는 않았으나, 독일은 페탱의 ‘승인’을 거쳐 군수물자와 식량을 멋대로 징발해갔다.

 

이처럼 모순 그 자체였던 비시정부는 1942년 11월에 독일이 전격적으로 비시정부 관할 지역까지 점령해 버림으로써 짧게 끝났다(그 뒤에도 명목상으로는 프랑스 정부가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정부 기능은 전혀 수행하지 못했다). 페탱은 1944년 8월부터 독일에 압송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억류되어 있었는데, 프랑스로 돌려보내 달라고 히틀러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던 그는 종전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따스한 환영을 받기는커녕 “반역자!” “죽어라!”는 거친 구호와 욕설을 뒤집어써야 했다. 종전 직전까지만 해도 페탱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여론이 우세했으나, 이제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비시정부의 정당성을 처음부터 부정하면서 임시정부를 세운 드골은 전쟁이 끝나자 나치 협력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 않아도 흥분한 레지스탕스 대원들, 공산당원들, 일반인들의 손으로 ‘숙청’이 행해지고 있었다. 정식 재판 절차 없이 처형된 사람이 종전이 채 되기도 전에 1만 명에 육박했다. 이후 협력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이 약 30만 명, 실형을 선고 받은 사람은 10만 명에 달했다(그 중 7천 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실제로 처형된 숫자는 1500명 정도다). 이런 가운데 비시정부를, 페탱을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매일같이 이어졌다. 프랑스 공산당은 전쟁이 끝나면서 와해된 언론 시스템을 재빨리 장악하여 페탱 처단을 부르짖었고, 드골은 그들과 손을 잡고 재판을 추진했다(그 과정에서 드골은 스탈린과 히틀러가 동맹을 맺고 있을 동안에 프랑스 공산당이 나치에 협력했던 일을 불문에 붙인다는 밀약을 맺었다). 마침내 1945년 7월 말에 시작된 재판은 레지스탕스 출신자들과 국회의원들이 반반씩 배심원을 맡고, 앙드레 모르네가 검사, 자크 이조르니가 변호인, 폴 몬지보가 주재판사를 맡고 있었다.

 

 

검사 측은 1940년 6월의 항복(휴전)과 7월의 비시정부 수립이 모두 불법이었다고 공격했고, 변호인 측은 모두가 기존 헌법과 법률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고 반박했다. 사실 비시정부의 절차적 합법성은 흠이 없었고, 그것이 특수한 상황에서 강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는지 여부는 입증하기 어려웠다. 결국 주된 쟁점은 비시정부가 점령 시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였다. 페탱 측은 휴전협정과 비시 프랑스의 확보는 프랑스 전 지역이 적에게 넘어가는 상황보다 분명히 나았으며, 프랑스 식민지(특히 북아프리카)가 보전되고 프랑스 병력(특히 강력한 해군 전력)이 전쟁에 불참함으로써 연합군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조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검사 측은 차라리 프랑스 전역이 점령되는 편이 임시정부와 레지스탕스 활동에 더 큰 힘을 부여했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상 괴뢰정부인 비시정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아직 자유롭다는 ‘환상’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페탱 측이 가장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쟁점은 비시정부의 손으로 레지스탕스를 공격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독일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간신히 죽음을 면했던 레지스탕스 대원 하나는 “페탱 정부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고,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이해한다”고 증언했다. 과연 검찰 측 사람들이 페탱을 단죄할 자격이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이조르니 변호사는 검사를 맡고 있던 모르네 역시 웬만큼 점령군에게 협력했었다고 폭로했다. 드골? 그는 런던에서 편안히 지내며 처칠과 골프나 치러 다니지 않았는가? 페탱이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을 더럽히는 동안 그가 실질적으로 한 일이 뭐가 있는가?

 

배심원의 심리는 8월 14일 하루 동안 이루어졌다. 몬지보 판사는 5년 유배형을 제안했지만, 대체로 레지스탕스 출신 배심원들에게 무시당했다. 그들은 거의 전원이 사형을 주장했다. 반면 국회의원 출신 배심원은 유대계인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형에 반대했다. 결국 다수결로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다. 다만 페탱의 고령을 참작해서, 집행 유예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8월 15일, 법정에서 판결문이 낭독되자 페탱은 정신을 잃고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그대로 대서양에 떠 있는 외로운 섬, 일드외로 옮겨졌으며 거기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대부분 병원 침대에서 6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뒤, 1951년 7월 23일에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이렇게 베르됭의 영웅, 프랑스의 원수는 무한한 불명예를 안고 역사에서 퇴장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자는 길게 남았다. 드골은 나치 협력자 숙청이 대충 끝나자 그때까지 한편이었던 공산당을 맹렬히 탄압하며 반공 우익 정치인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리고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들 때 비시정부의 체제를 많이 참조하며 대통령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늘렸다. 한편 페탱의 재판은 잘못이었으며 페탱은 억울한 희생자였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오늘날에도 페탱의 사망일이면 어김없이 그를 추도하고자 페탱이 숨을 거둔 일드외 섬을 찾는 ‘순례자’들이 있다. 비록 그 대부분은 극우적 성향의 노인들이며, 점점 그 수가 줄고는 있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원칙을 곧이곧대로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끝내 양보할 수 없는 원칙도 있다. 과연 그 경계는 어디일까? 어디까지가 일단 살아남기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포기할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이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러므로 과거사를 바로 이해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그 과정이 아무리 어렵고 불편하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정파의 권력투쟁을 위한 방편이 되지 않도록, 새로운 신화와 반신화를 양산하는 복마전이 되지 않도록, 공동체의 구성원이 모두 마음을 가다듬으며, 불행했던 과거를 “있는 그대로” 되새길 수 있도록, 그런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앙리 루소의 <비시 신드롬>(휴머니스트. 이학수 역)은 페탱과 비시정부가 한 일을 그리기보다 그들이 어떻게 프랑스 현대사에서 기억되고, 잊혀지고, 다시 기억되면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가를 풀어낸 책이다. 책의 두께나 문체 면에서 그리 독자에게 친절한 책은 못되지만, “프랑스는 전후에 나치 협력자 청산을 철저하게 했으며, 따라서 오늘날 프랑스에 과거사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믿음과 현실은 다소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비시 신드롬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박원순의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한겨레신문사)는 역사상의 중요한 재판 사례들을 다룬 책으로 페탱 재판 역시 하나의 장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비시정부와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에 대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관점과 비슷한 관점이 쓰였지만,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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