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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프랑스의 왕 - 루이 14세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09.09.01|조회수1,192 목록 댓글 0

루이 14세


베르사유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은 이제 거룩히 여겨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땅에서나 바다에서나,

그 어디서나 당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더 이상 맹트농 부인의 시험에 들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재무총감에게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아멘!

 

18세기가 열린 지 몇 년 되지 않던 당시, 이처럼 주기도문에 빗대어 ‘태양왕’ 루이 14세를 비방하는 대자보가 파리와 프랑스 곳곳에서 연일 나붙었다. 나중에 볼테르는 이 시대를 소크라테스와 알렉산드로스가 활약하던 고대 그리스의 황금기에 뒤지지 않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 중 하나라고 칭송한다. 하지만 당시 2천만에 달하던 프랑스의 민중은 지쳐 있었다. 전쟁은 끊이지 않고, 그에 맞춰 세금의 압박 역시 심해지기만 했다. 그런 가운데 기근과 전염병까지 덮쳤다. 1710년 한 해에만 30만 명 이상이 죽어갔다. 베르사유의 임금님은 그들에게 여전히 절대적인 존재였으나, 삶이 괴롭다 보면 자연히 절대자에게 원망이 돌아가는 법, 당장에라도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듯한 불온한 공기에 프랑스는 질식할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루이 14세는 고독과 고통 속에 생애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다. 낡은 성처럼 무너져가는 그의 건강을 많은 의사들이 달라붙어 호전시키려 했으나, 거꾸로 악화시킬 뿐이었다. 마침내 1715년 9월 1일, 77번째 생일을 나흘 남겨 두고, 태양왕의 수명이 다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볼테르가 멋대로 창작한 것으로 보이는 “짐은 국가다”라는 말이 아니라,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였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군주의 하나다. ‘절대주의’는 그의 이름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그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흔들며 화려한 궁정 생활의 극치를 보여주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 시작은 매우 미약하고, 위태로웠다. 루이 14세는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 왕비의 아들로 1638년에 태어났다. 무려 23년이나 후사를 보지 못하다가 얻은 왕자였기에, 그는 태어나자마자 ‘신의 선물’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리고 1643년, 루이 13세가 세상을 떠나며 겨우 여섯 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왕이 된다.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을 맡았고, 나랏일을 거의 모르는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의 재상 마자랭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런 가운데 파리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한 관료귀족들이 반정부 성향을 노골화했다. 마자랭이 앞장서서 그들의 특권을 줄이고 왕실의 수입을 늘리려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1648년, 마자랭의 칙령들을 고등법원이 거부하고 이에 맞서 그 대표자들을 정부가 체포하자 파리 시민이 봉기에 나섰다. 이후 1653년까지 이어진 ‘프롱드의 난’의 시작이었다.

 

 

왕실은 부랴부랴 파리를 탈출하여 생제르맹으로 피신했다. 이 와중에 한때 폭도들에게 왕과 대비가 유린될 뻔했으나, 대비가 천진하게 잠자는 어린 루이 14세의 모습을 보여주며 눈물로 호소한 끝에 간신히 무사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놀랄 만큼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만 왕실에 맞서 왕국의 여기저기서 반역의 기운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왕실이 희망을 걸었던 명장 그랑 콩데 공까지도 딴 마음을 품고 반란군에 가담했다. 1651년에는 결국 견디지 못한 마자랭이 외국으로 도망치면서 프롱드의 난은 성공을 거두나 싶었다. 하지만 대귀족, 관료귀족, 지방귀족, 소시민 등 왕국의 온갖 세력이 참여했던 이 반란은 그만큼 참여자들 사이에 이해가 엇갈리기도 했고, 그래서 왕실 측이 잘 막아냈다기보다는 자체의 분열과 다툼 때문에 실패한다. 1652년 9월에 그랑 콩데는 파리를 버리고 달아났고, 그 동안 지방을 전전하던 왕실이 5년 만에 파리에 돌아왔다. 이듬해에는 마자랭도 귀국하고, 지방의 프롱드 잔당들도 진압되어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어린 나이였지만 때로는 목숨의 위협까지 받으며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상황을 뼈저리게 겪었던 루이 14세는 기필코 왕권을 강화하리라 생각했고, 그가 친애했던 학자 보쉬에도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그런 생각을 뒷받침했다. 때마침 사회 흐름도 왕권의 강화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사실상 귀족들끼리 기득권과 새 특권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인 것과 같았던 프롱드의 난을 치르고 나자 “어떤 보편적 기준을 중심으로 각자의 권리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엘리트 집단 사이에 생겼고, 30년 전쟁에 이은 프롱드의 난으로 넌더리가 난 민중 역시 강력한 정부를 원하게 된 것이다.

 

이십여 년간 나라를 쥐고 흔든 마자랭이 1661년에 죽음으로써 루이 14세는 본격적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이에 1년 앞서 스페인 왕실의 마리 테레즈와 혼인함으로써 강력한 스페인의 지원도 얻게 된 그는 고등법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왕족과 대귀족의 정치참여를 제한했으며, 지방에 지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그리고 시민과 상인계급, 말하자면 부르주아 출신들 중에서 비서관들을 발탁하여 철저히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총신들로 삼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콜베르였다. 리슐리외나 마자랭처럼 카리스마적이지는 않으면서 실무에는 능했던 그는 재무총감, 조영총관 등을 맡으며 루이 14세가 한껏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여러 해 동안 충실히 보좌하게 된다.

 

 

루이 14세는 단지 행정개혁으로 권력을 늘린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왕의 옥좌를 만인이 경외하고 찬탄할 그 어떤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자신을 알렉산드로스나 헤라클레스에 비겼으며, 플랑드르 전쟁과 네덜란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그러한 호언장담을 뒷받침해 보였다. 또한 라신, 코르네유, 몰리에르, 페로, 르브룅 등 작가와 예술가들을 후원함으로써 고전주의 예술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꽃피었다(그들은 왕실 후원금의 대가로 루이 14세를 칭송하는 작품을 양산해냈다). 그는 무용에도 큰 관심을 보였는데, 궁정이나 광장에서 열리는 발레 무대에 직접 출연, 아폴로나 마르스 신으로 분장한 모습으로 수준 높은 춤솜씨를 선보여 수많은 관중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리고 1662년부터 태양왕으로서의 자신을 빛내 줄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 베르사유 궁을 짓기 시작했다. 베르사유 궁이 완성되어 그곳으로 거처를 옮긴 1682년 이후에는 대중들 앞에 화려한 볼거리를 선보이는 일은 사라졌다. 대신 궁정에서는 불과 십여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세밀한 에티켓, ‘세련된 궁정 예법’이 도입되었다. 만찬의 진행 순서, 좌석 배치와 각자 입을 옷, 취할 행동 등이 하나하나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왕의 옷을 입히는 일과 세수를 시키는 일, 코를 풀게 하는 일 등도 다 격식대로 정해졌고, 그 담당자도 제각기 따로 있었다. 모든 게 격식대로였다. 베르사유의 일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연극과 같았다.

 

 

과연 루이 14세는 무슨 생각에서 발레에, 베르사유에, 에티켓에 열정을 쏟았을까. 윌리엄 쿠피는 단지 허영심이 많은 독재자의 겉만 번드르르한 악취미였을 뿐이라고 한다. “루이 14세의 삶은 시간과 돈이 남아돌지만 별 생각이 없는 사람이 어떠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볼 때, 그 배후에는 왕권을 강화하고 유지하려는 강한 집념을 찾아볼 수 있다. 귀족들의 봉건 기득권을 교통정리하는 역할만이 아니라, 귀족을 포함한 모든 국민을 하나의 국가 체제로 통합하고 그 위에 군림한다. 그 통합을 확고히 하고자, “국가적” 수준이 아니고서는 꿈도 못 꿀 이미지를 제공한다. 오늘날에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가적 제전이 국민통합에 이용되듯, 루이 14세가 보여준 눈이 번쩍 뜨이는 이미지들은 정치선전의 속셈을 갖고 있었다. 고대 비극을 능가하는 라신과 코르네유의 장엄한 비극을 보며, 화려하기 짝이 없는 베르사유 궁전을 보며, 당시 사람들은 국왕에 대한 존경심과 프랑스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머리가 아플 만큼 복잡한 궁정의 에티켓도 정치적이었다. 에티켓 때문에 궁전에 들어가는 귀족들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계속 긴장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 백작은 알현을 하루 세 번씩 했었는데, 이번 달부터 한 번으로 줄었다” “모 공작부인은 옷 갈아입는 시중만 들었는데, 내일부터는 식사 시중에도 참여한다” 같은 인식은 권력에 대한 긴장감과 경쟁심을 부추긴다. 아무 것도 아닌 예식 절차 때문에 모두가 늘 왕을 우러러보고, 총애를 갈망하게 된다. 기원전 2세기에 숙손통은 군주의 권위를 높이려면 복잡하고 장엄한 예법을 도입하라고 한고조에게 조언했다. 그 수법을 17세기에 루이 14세가 본받은 것이다. 불필요할 만치 자주 치러진 전쟁 역시 국민을 단결시키고 군통수권자로서의 왕의 힘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계산서가 따르기 마련이다. 루이 14세를 태양왕으로 만들기 위한 온갖 사업들은 비용이 크게 들었다. 특히 전쟁 비용은 엄청났다. 루이 14세는 왕실 후원으로 조성한 매뉴팩처 산업에서 그런 비용을 일부 염출하고, 관직을 매매하기도 했지만(당시에는 그것이 비리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늘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은 국민의 호주머니를 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지방귀족과 상인계급이 절대왕정에 협력한 속내가 드러났다. 전보다는 틀이 잡혔지만 아직 국가관료제는 힘이 약했고, 세금 징수는 지방의 귀족과 대상인들에게 위탁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세금의 태반을 자기 몫으로 챙기고, 정부에는 3~40퍼센트만 상납했던 것이다. 전쟁을 비롯한 국가적 사업이 늘수록 이들은 부자가 되어갔고, 그만큼 농민은 피폐해져 갔다. 루이 13세 당시 10만에 못 미쳤던 상비군은 루이 14세 때 60만을 돌파하여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군사력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는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의 경계심을 촉발시켜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아우구스부르크 동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등은 투입한 전력에 비해 신통치 못한 결과만 얻고 끝났다.

 

날마다 ‘베르사유 라이브쇼’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르는 루이 14세의 건강도 점차 부도 위기에 몰렸다. 그는 만성적인 두통과 소화불량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40대 후반에는 충치가 심해져 이를 모두 뽑아야 했다. 50대부터는 잇몸 염증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악취를 풍겼고, 치질과 함께 통풍이 와서 앉으나 서나 고통스러워했다. 병을 고친답시고 악화시키기만 하는 당시의 의술이 그를 더욱 괴롭혔다. 이쯤 되면 정신 건강도 위태로워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초인간적인 지위의 부담을 덜고자 미식과 미녀에 탐닉했다. 특히 왕성한 성생활로 왕비 이외의 여인들에게서 12명의 자녀를 보았다. 하지만 노년에 접어들며 심신이 쇠약해지자 미녀보다는 정신적 위안을 주는 여성을 찾게 되고, 이 틈을 노려 막후의 실권자로 부상한 사람이 맹트농 부인이었다. 광신적인 카톨릭 교도였던 그녀의 영향도 한몫 하여 루이 14세는 1685년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던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데, 이로써 국민통합에 금이 갔을 뿐 아니라 대체로 신교도였던 수공업자들이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가뜩이나 힘든 나라 살림이 더욱 어려워졌다.

 

 

강력한 왕정의 막바지에 불거지기 마련인 후계자 문제도 왕의 말년을 더욱 어둡게 했다. 루이 14세는 오래 전에 왕세자를 세워 두었는데, 1711년에 그가 갑자기 숨지고 그 다음 왕위계승권자인 부르고뉴 공작과 그 아들까지 이듬해에 사망한다.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맹트농 부인의 소행이라는 뒷말도 무성했다. 루이 14세는 마지막 몇 년을 지병의 고통뿐 아니라 암살의 공포까지 느끼며 보내야만 했다.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가까웠을 때, 그는 증손자 뻘인 미래의 루이 15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닮지 말거라. 화려한 건축물에 마음을 쏟지도 말고, 전쟁을 좋아하지도 말아라. 이웃나라와 싸우기보다 화친하도록 애쓰거라. 늘 신을 경건히 섬기고, 백성들이 신을 편안히 섬길 수 있게 돕거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군주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단다.”

 

루이 14세, 이 특별한 인간은 마지막에 가서야 진정 자신의 왕권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반은 힘없는 백성들이 진심으로 바치는 존경(헛된 이미지에의 한때의 현혹이 아니라)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막은 내려지는 중이었다. 희극이었을까, 아니면 비극이었을까.

 

 

루이 14세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루이 14세 양식’이라고 불리는 미술사적인 흔적, 융성했던 고전주의 문학과 초기 자본주의의 실마리.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유산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 어찌됐든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스는 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불과 백 수십 년 전만 해도 왕국 깊숙이 영국의 영토가 있고, 남부에는 독립 공국이 버티고 있으면서 지방마다 제각기 관습과 종교를 가지고 때마다 툭탁거리던 나라. 그 나라가 부르봉 왕조에 이르러 하나의 국가로 정비된 것이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그 국가를 수립함과 동시에 왕조의 역량을 자기 대에서 대부분 소모해 버렸다. 따라서 후계자가 될 두 왕은 이미 자체적인 생명을 가진 프랑스 국가에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었고, 그 허울을 걷어내고 ‘국민의 프랑스’를 만드는 데는 루이 14세가 죽은 뒤 겨우 70년이 필요했다.

 

한국사의 인물 중에서 루이 14세와 가장 비교되는 인물은 누구일까? 광개토왕? 고려 광종? 연산군? 뜻밖에도 지금까지 나와 있는 학술논문을 기준으로 하면 그처럼 한 시대를 진동시켰던 군주가 아니고, 군주조차도 아니었던 사람, 효명세자(1809~1830)다. 효명세자와 루이 14세를 비교한 논문이 여러 편 나와 있는데, 다만 두 사람을 철저히 비교했다기보다 무용에 미친 두 사람의 영향을 비교한 것들이다. 루이 14세가 발레의 진흥에 앞장서고 직접 발레에 출연까지 했듯, 효명세자도 병자호란 이래 궁중연회에서 사라졌던 정재(呈才) 무용을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현존하는 정재 53종 중 30종 이상이 효명세자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무용에 열정을 쏟은 동기 또한 두 사람이 엇비슷했다. 루이 14세처럼 효명세자도 세도정권의 압박을 받던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조선을 국왕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나라로 개조하려 했다. 이미지와 예법을 권력 강화에 활용하는 것은 본래 동양의 장기였고 보면, 왕권 강화에 부심했던 두 사람 모두 무용의 효과에 착안했음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래도 결정적 차이를 갖고 있었다. 루이 14세의 이상이 알렉산드로스 같은 정복자, 아폴로 같은 초월적인 존재였다면 효명세자의 이상은 요순과 같은, 또는 세종이나 정조와 같은 유교적 성인군주였다. 효명세자는 루이 14세처럼 놀라운 볼거리를 제공하기보다 유교 경전 공부와 수신에 힘쓰라는 압박을 크게 받았다. 더구나 그에게는 루이 14세처럼 정치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배출할 길도 없었다. 결국 루이 14세는 수십 년 동안 절대군주로 행세한 끝에 심신이 무너진 반면, 효명세자는 부왕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맡은 지 불과 4년 만에 심신쇠약으로 죽음에 이른다. 군주란, 그리고 최고지도자란 역사에 놀아나는 광대와 같다. 하지만 그 광대짓의 범위와 정도는 역사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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