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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다리우스 1세 - 고대 페르시아의 전성기를 가져온 왕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09.10.27|조회수2,556 목록 댓글 0

다리우스 1세

“없애자!” “단숨에 해치워야 해!” 일곱 개의 단검을 움켜잡은 일곱 명의 사나이들이 고함을 지르며 궁전 복도를 전력 질주했다. 우지끈 하고 문이 부서졌다.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은 뜻밖의 사태에 잠시 망연자실했지만, 곧바로 무기를 잡고 대응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인 왕궁에서도 가장 중심인 왕의 침소는 순식간에 칼 부딪치는 소리, 물건 뒤집히는 소리, 욕지거리와 비명 소리로 뒤덮였다.

 

‘가짜’는 과연 가짜였을까?

“찔러! 어서 확 찔러 버려!”

두사람 중 하나와 한데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고 있던 일곱 명 중 하나가, 그들 옆에서 칼을 치켜들고 멈칫거리는 동료에게 소리쳤다. 

“안 돼, 고브리아스! 잘못하면 자네를 찌르게 된다고!”

“상관없어. 그냥 찔러! 어서! 다리우스!”

결국 다리우스의 칼은 내리쳐졌고, 두 친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암살하려 했던 남자에게 꽂혔다. 잠시 뒤, 일곱 명은 전격적인 암살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단숨에 정권을 장악했다.

 

기원전 522년, 페르시아 제국은 지금의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레바논과 유대를 넘어 이집트까지 뻗쳐 있었다. 하지만 키루스 대왕과 캄비세스에 이어 왕위에 오른 바르디아(그리스어로는 스메르디스)는 어딘지 이상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가 병사한 캄비세스의 동생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진짜 바르디아는 오래 전에 죽었고 지금은 같은 바르디아라는 별명을 가졌지만 왕실과는 관계없는 메디아계의 마고스(사제) 가우마타가 옥좌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르디아가 즉위하고 7개월 후, 딸을 왕의 왕비 중 하나로 보낸 대귀족 오타네스는 딸에게서 그가 가짜라는 확증을 얻었다며 여섯 명의 동지와 함께 가짜 왕을 없애고 왕위를 메디아계에서 다시 페르시아계로 찾아오자는 음모를 꾸몄다. 그 중에는 본래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던 다리우스(페르시아어로는 ‘다리야바우시’라는 발음이지만, 널리 알려진 그대로 다리우스라고 부른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페르시아에서도 가장 존귀한 신분이었으므로 왕궁 출입은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왕의 침실에 이르려면 경비병들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각자 단검을 몸에 숨겨 가지고 있다가 순식간에 일을 치른 것이다.

 

‘가짜 바르디아’인 가우마타와 그 형제를 없앤(어떤 기록에는 본래 이름이 바르디아인 마고스와 그 형인 가우마타였다고 한다) 일곱 사람은 이제 제국을 어떤 정치체제로 이끌어갈 것인지 토론했다고 헤로도토스는 <역사>에 적고 있다. 오타네스는 군주독재체제가 이런 불행한 사태를 가져왔다며,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민주주의는 어리석은 민중들이 주도권을 갖는 중우정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며, 전제군주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소수 귀족들의 과두정치를 주장하는 메가비조스의 의견까지 합쳐 한동안 논쟁이 벌어지다가, 자기 의견을 내지 않은 고브리아스, 인타프레네스, 아스파티네스, 히다르네스가 모두 다리우스를 지지하면서 결론은 군주정으로 났다. 다음 과제는 그러면 누가 다음 왕이 될 것이냐였다. 기권한 오타네스 외의 6인은 모두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가 밤을 새고, 동이 틀 때 가장 먼저 운 말의 주인을 왕으로 받들기로 합의했다. 여기서 헤로도토스는 다리우스가 교활한 수단을 썼다고 한다. 다리우스의 마부는 암말을 이용해 다리우스가 탈 말을 잔뜩 흥분시켜 놓고, 해가 떠오를 때 말에게 암말의 냄새를 맡게 해서 가장 먼저 히히힝 울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다섯 명은 즉시 말에서 내려 새로운 왕 앞에 엎드렸다. 다리우스 1세 ‘대왕’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역사가 중에는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일단 가우마타가 바르디야였다고도 하고 바르디야가 있고 가우마타가 또 있다고도 하는 등 기록마다 기본 사실이 다르고, ‘가짜 바르디아’가 가짜임을 숨기고 7개월이나 통치했다는 점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다리우스가 진짜 바르디아를 시해하고 왕권을 탈취했다는 것이지만, 다리우스가 가짜를 물리치고 왕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다리우스 1세 재위 중 당시 베히스툰 암벽에 새긴 연대기에도 나온다. 적어도 다리우스가 자신의 즉위 정당성을 선전하고자, 자신이 죽인 자는 가짜였다는 말을 퍼뜨린 점은 분명해 보인다.

  

마라톤 평야에 진 제국의 깃발

  


아무튼 다리우스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람이 당시에도 많았던지, 그는 즉위하자마자 반란 진압에 나서야 했다. 그 뒤 2년 동안 19번의 전쟁이 있었고, 9명의 반란 주모자들이 처단되었다. 그 중에는 바빌로니아 독립을 외쳤던 네부카드네자르 3세도 있었는데, 다리우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바빌론 왕에게도 적용하여, “네부카드네자르의 본명은 니딘투벨이며, 바빌론 왕가와는 무관한 천한 인물이 왕을 사칭했다”며 그를 말뚝으로 찔러 죽였다. 바빌로니아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이처럼 다리우스는 용맹함과 전투 지휘관으로서의 재능보다는 책략과 선전술을 앞세워 승리를 쌓아갔다. 내란이 진압된 다음은 외부 공략이 이어졌다. 그의 치세 중 제국은 최대로 넓어져서, 인도의 상당 부분과 소아시아 지역까지 수중에 들어갔다.

 

그 다음은 유럽으로 건너가 스키타이를 남러시아로 밀어붙이고, 트라키아를 정복하고 마케도니아의 항복을 받았다. 다리우스는 이처럼 빛나는 정복 사업 말고도 대왕의 이름에 걸맞는 건설 사업도 활발히 벌였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 파고, 본래의 수도인 파사르가다 남쪽에 웅장하고 화려한 새 수도 파르사(페르세폴리스)를 세웠다. 그리고 엘람 지방의 수사를 제2수도로 삼고는 두 왕도를 연결하는 ‘왕의 길’을 닦았다. 왕의 길은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도 닦였고, 전 제국이 육로와 해로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전 오리엔트에 떨치는 다리우스의 명성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바로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등의 도시국가들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인 헬라스. 다리우스는 앞서 소아시아를 정복하며 그들의 식민지를 빼앗았으나, 기원전 499년에 밀레토스를 중심으로 제국에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에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가담했기 때문에 다리우스는 더 이상 이 ‘서쪽의 야만인들’을 놔둘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헤로도토스는 다리우스가 식사 때마다 시종들에게 “폐하, 아테네를 잊지 마시옵소서!”하고 속삭이도록 했다고 전하나, 현대의 역사가들은 그리 설득력 있게 보지 않는다. 페르시아 제국의 규모와 국가전략에 비추어, 그리스 정벌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기원전 492년 사위인 마르도니오스의 1차 원정이 실패하자, 490년에는 2만 5천의 병력과 6백 척의 선박을 동원한 대대적인 2차 원정군이 수사를 출발했다. 이들은 먼저 그리스의 동쪽 바다에 길게 뻗은 섬인 에우보이아에 상륙, 에레트리아를 짓밟았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아테네를 휩쓸기 위해, 마라톤 평야에 상륙했다. 아테네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식으로 1만 명을 동원하여 마라톤으로 출정했다. 세기의 결전에서 그리스의 중장보병이 백병전에서 갖는 우수성,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발한 전술, 그리고 목숨을 내놓은 아테네 병사들의 용맹성이 승리를 거두고 페르시아군은 7천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 승리를 알리기 위해 쉴 새 없이 아테네로 달려간 전령의 죽음을 기리고자 마라톤 경기가 생겨났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전제군주제의 화려한 번영, 그러나 결국 한계는 오다 

그리스 원정은 실패했지만, 다리우스의 명성과 페르시아의 번영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다리우스의 위대함은 전쟁에서 거둔 업적보다 제도의 정비와 효과적인 정책 시행으로 사상 최대의 영토를 하나의 통일 제국으로 안정시킨 데 있다. 그것은 다리우스가 ‘견제와 균형’이라는 권력의 법칙과 ‘소통과 번영’이라는 경제의 법칙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직할령을 제외한 전국을 사트라피라는 2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구역마다 사트라프라는 총독을 파견해 다스렸다.

 

하지만 사트라프는 행정과 사법을 맡을 뿐 징세와 병력 동원은 왕이 별도로 파견한 다른 관리들이 맡았다. 그리하여 지방 세력이 하나로 뭉쳐 중앙에 대항할 가능성을 방지했다. 또 전국에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첩자들을 심어서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곧바로 알 수 있도록 했다. ‘왕의 길’과 역참 제도는 다리우스가 왕궁에 앉아서도 제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초고속으로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한편 도로와 운하, 해로를 통해 제국의 여러 지방이 긴밀히 연결되게 하여 무역이 크게 발전할 수 있게 하고, 처음으로 금화를 주조하여 경제 부흥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에는 “제1대(키루스)는 싸움꾼이며, 제2대(캄비세스)는 술꾼이며, 제3대(다리우스)는 장사꾼이다”라는 속담이 유행했다.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포함된 제국이었으나, 반란을 일으킬 무력이 차단되고 반란의 동기를 물질적 탐욕이 지움으로써 모두가 페르시아 왕을 “왕 중의 왕”으로 받들고 그 앞에 꿇어 엎드리게 되었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마라톤 전투 이후 자신을 얻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 공략을 추진했어도 여유 있게 대응할 수 있었다. 뛰어난 정보력으로 이를 사전에 알고, 풍부한 자금력으로 공략 추진 세력들을 매수하고 이간질시켜 계획이 무산되게끔 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의 제국을 남기고,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486년 10월, 파르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던 페르시아 체제에도 문제점은 있었고, 그것은 다리우스에 이어 그의 아들 크세륵세스가 그리스 원정을 벌여 다시금 패퇴하고서도 극복되지 못했다. 바로 방대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지방의 군사력을 억제하고, 모든 권력을 왕에게 집중시킨 점, 그리고 막대한 부를 이룩한 점이다. 지방의 방위력이 약했기 때문에 소수정예의 적병이 기습해 오면 초반에 격퇴하기 어려웠고,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이상 왕의 능력이 뛰어나야 하는데 다리우스 이후 여섯 명의 왕은 모두 평범한 편이라, 제국의 활력은 점점 줄고 체제의 모순은 심해졌다. 그리고 막대한 부는 적들을 회유하는 힘도 되었지만, 한편으로 이방인들이 끊임없이 페르시아를 넘보는 원인도 되었다. 결국 단기전에서 페르시아군을 압도하는 유럽의 병력이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알렉산드로스)의 지휘 아래 충분한 규모로 결집했을 때, 페르시아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막대한 인구와 영토, 부를 가지고도! 헤로도토스가 남긴 이야기가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민주정이냐, 군주정이냐’를 놓고 오타네스와 벌인 논쟁에서 다리우스가 승리했을 때, 그는 자신이 건설할 제국의 한계를 결정한 셈이다.

출전 : 네이버 - 인물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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