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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도로와 운하, 해로를 통해 제국의 여러 지방이 긴밀히 연결되게 하여 무역이 크게 발전할 수 있게 하고, 처음으로 금화를 주조하여 경제 부흥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에는 “제1대(키루스)는 싸움꾼이며, 제2대(캄비세스)는 술꾼이며, 제3대(다리우스)는 장사꾼이다”라는 속담이 유행했다.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포함된 제국이었으나, 반란을 일으킬 무력이 차단되고 반란의 동기를 물질적 탐욕이 지움으로써 모두가 페르시아 왕을 “왕 중의 왕”으로 받들고 그 앞에 꿇어 엎드리게 되었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마라톤 전투 이후 자신을 얻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 공략을 추진했어도 여유 있게 대응할 수 있었다. 뛰어난 정보력으로 이를 사전에 알고, 풍부한 자금력으로 공략 추진 세력들을 매수하고 이간질시켜 계획이 무산되게끔 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의 제국을 남기고,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486년 10월, 파르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던 페르시아 체제에도 문제점은 있었고, 그것은 다리우스에 이어 그의 아들 크세륵세스가 그리스 원정을 벌여 다시금 패퇴하고서도 극복되지 못했다. 바로 방대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지방의 군사력을 억제하고, 모든 권력을 왕에게 집중시킨 점, 그리고 막대한 부를 이룩한 점이다. 지방의 방위력이 약했기 때문에 소수정예의 적병이 기습해 오면 초반에 격퇴하기 어려웠고,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이상 왕의 능력이 뛰어나야 하는데 다리우스 이후 여섯 명의 왕은 모두 평범한 편이라, 제국의 활력은 점점 줄고 체제의 모순은 심해졌다. 그리고 막대한 부는 적들을 회유하는 힘도 되었지만, 한편으로 이방인들이 끊임없이 페르시아를 넘보는 원인도 되었다. 결국 단기전에서 페르시아군을 압도하는 유럽의 병력이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알렉산드로스)의 지휘 아래 충분한 규모로 결집했을 때, 페르시아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막대한 인구와 영토, 부를 가지고도! 헤로도토스가 남긴 이야기가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민주정이냐, 군주정이냐’를 놓고 오타네스와 벌인 논쟁에서 다리우스가 승리했을 때, 그는 자신이 건설할 제국의 한계를 결정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