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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동양사]한고조 유방 - 중국 문명의 원형이 된 한왕조의 창업 황제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09.11.05|조회수794 목록 댓글 0

한고조 유방

이른바 ‘오호십육국 시대’, 한왕조가 멸망하고 북방민족들이 중국에 들어와 여기 저기서 왕조를 세우던 혼란기. 그 중 하나인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石勒)은 어느 날 신하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역대 인물 중에서 짐과 비교할 만한 사람이 누구겠느냐?” “폐하, 누가 감히 폐하의 위대하심에 견주겠습니까. 한고조나 위무제(조조)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이 화하(중국)를 세우신 황제(黃帝) 정도라야 비교가 될 듯합니다.” 석륵은 껄껄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아첨일랑 집어치워라. 짐이 만약 한고조와 동시대 사람이라면, 짐은 그의 신하가 되겠다. 광무제라면, 한 번 겨루어 보겠다. 조조나 사마의 따위는 이야기할 가치도 없다. 어린 황제를 볼모로 나라를 빼앗은 간신배들이니 말이다.”

무너진 제국의 꿈을 대신하여

한고조 유방. 그 스스로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 축하연을 벌이는 자리에서 자신의 역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량(張良)처럼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蕭何)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 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그렇다고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에서 이기는 일을 잘 하느냐 하면, 한신(韓信)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세 사람을 제대로 기용할 줄 안다. 반면 항우(項羽)는 단 한 사람, 범증(范增)조차 제대로 기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천하를 얻고, 항우는 얻지 못한 것이다.”

 

당시에나 지금에나 대부분 그런 평가에 동의한다. 유방은 정녕 사람을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명성은 약 5백 년 뒤의 풍운아가 “그의 신하가 되고 싶다”고 할 만큼 오래도록 빛을 발했다. 단지 그 끝은 다소 잔인했지만.


 

기원전 210년, 진시황제 영정(嬴政)이 사망했다. 영원하리라 장담하던 제국은 곧바로 불안과 혼란에 휩싸였다. 호해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의 도움으로 형 부소를 없애고 2세 황제가 된다. 이후 조고는 이사마저 없애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든 채 사실상 나라를 마음대로 다스렸다고 하는데, 그 폐단과 부패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하나의 테두리 안에 묶인 지 겨우 십여년에 불과한 중국 대륙은 여기 저기서 들끓기 시작했다. 천하대란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진승(陳勝)이라고 한다. 머슴 출신인 그는 병력 소집에 따라 집결지로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린 비로 기한에 맞춰 도착하기 불가능해지고, 진나라의 법에 따르면 그것은 곧 죽음이므로 “어차피 죽을 바에는 되든 안 되든 한 번 일어서 보자! 왕후장상에 어찌 따로 씨가 있겠는가?” 하며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이라는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켰다. 그는 비록 6개월 만에 패망했으나,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서 진시황의 통일대업은 허무하게 스러져 버렸다.

 

왕후장상의 야심을 품은 군웅들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항우였다. 초나라 귀족의 혈통인 그는 스스로 “힘은 산을 잡아 뽑는다(力拔山)”고 했을 만치 초인적인 무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진나라가 몰살시킨 초나라 왕실의 후예로 살아남은 미심(芈心)을 찾아내 그를 ‘초회왕’으로 받듦으로써 명분에서도 다른 어중이떠중이 반군 지도자에 앞섰다. 그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초회왕을 다른 진나라 타도 세력의 맹주로 내세워 진시황 이후 중국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한편 패현 출신의 유방은 어머니가 교룡과 교합하여 태어났다느니, 망탕산에서 흰 뱀(오행설에서 진나라를 상징한다)을 베어 죽였다느니 하는 말이 있지만 나중에 덧붙여진 전설로 보이고, 실체는 전혀 보잘것없는 출신의 백수건달이었다. 그러나 술 마시고 싸움질하는 나날 속에서도 왕도와 패도를 논하는 등 남다른 데가 있어서, 믿고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진시황이 일찍 죽지 않고 진나라의 지배체제가 안정되었다면 그의 이름은 역사 속에 영원히 묻혔으리라. 진승이 봉기했을 때 그는 이미 마흔이 가까웠으며, 고향 패현의 장관을 죽이고 봉기하여 패공(沛公)이라 불렸다. 그는 수천 명의 병력을 모은 뒤 항우에게 찾아가 합류했다.

 

항우는 교만하고 포악한 기질을 숨기지 않았기에 주변 사람들이 받들면서도 두려워했다. 초회왕도 그랬던지, 유방을 은근히 중용하며 항우를 견제했다. 그리하여 “누구든 먼저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입성하는 자에게 그 땅을 준다”는 선언에 따라 먼저 함양을 차지한 쪽은 유방이었다. 반면 항우는 거록에서 진나라 최후의 저항을 분쇄하느라 늦었는데, 뒤늦게 도착해 보니 유방은 “살인죄는 사형, 상해죄와 절도죄는 징역이다”는 ‘약법삼장’을 내세워 통치를 행하고 있었다. 항우는 초회왕의 선언을 무시하고 그 땅을 차지하고는 진나라에서 내세운 3세 황제 자영을 죽이고, 궁궐을 불태우며, 황릉을 파헤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유방은 부드러움으로, 항우는 매서움으로 민심을 장악하려 한 셈이다. 이로써 진나라가 망하자 항우는 스스로 초패왕(楚覇王)이라 칭하고 여러 동료들에게 제후를 봉했는데, 유방은 서쪽 변방지대인 촉 땅을 주며 한왕(漢王)이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이 받들었던 의제(초회왕)를 죽이고 사실상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유방은 촉 땅에 들어가며 중원과의 통로인 잔도를 불살라 결코 항우의 중원을 넘보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그 해가 가기 전에(기원전 206년) 예전에 사용했던 잔도를 보수하고서 중원 침공을 개시했다. 여러 문학작품을 낳았고, 장기판에도 흔적을 남긴 ‘초-한 대전’의 시작이었다.

 

백수건달, 황제가 되다


항우는 유방의 기습에 당황했으나 곧 반격에 나서, 한동안 연전연승했다. 형양에서는 포위 끝에 유방을 사로잡을 뻔 했으나, 유방이 가짜를 남겨 두고 간신히 달아나기도 했다. 하지만 유방은 나중에 스스로 평한 대로 장량, 소하, 한신을 적절히 기용해 전투에서의 부진을 만회했을 뿐 아니라 항우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영포, 팽월 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반면 항우는 진작 유방을 없애자는 범증의 계책을 듣지 않았을뿐더러 한나라의 간계에 속아 그를 내쫓아 버렸다. 이런 실책이 거듭되던 끝에 기원전 202년, 해하 싸움에서 항우는 유방에게 결정적으로 패하고 자살해 버렸다. 천하는 비로소 한고조 유방에게 돌아간 것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지만,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서민 출신이 황제나 왕이 되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를 도와 대업을 이룬 공신들도 별 볼일 없는 출신이 많았다. 주발은 나팔수, 관영은 옷감장수였으며 하후영은 마부였다. 번쾌는 백정 중에서도 가장 천한 개백정이었고, 한신은 백수였다. 소하나 조참 역시 지방의 최하급 관리에 불과했다. 최근 임꺽정 일당을 “조선시대의 비정규직”으로 조명한 경우가 있는데, “유방과 그의 떨거지들”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성공한 비정규직, 백수 집단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출신이 비천했기에, 이들은 종종 무례한 행동도 했다. 한나라의 통일 후 한동안은 궁중 연회를 하면 저마다 취해서 옥좌 밑에 드러누워 자거나, 궁전 기둥을 칼로 치거나, 오줌을 갈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유방 스스로도 한때는 글줄 깨나 읽은 지식인을 공연히 미워해서 그들을 모욕하기를 즐겼다. 하지만 역시 오만했던 항우와는 달리 진짜 인재는 깍듯이 모실 줄 알았다는 점이 달랐다.

 

서민 출신이기에 서민의 어려움을 알았음인지,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가 통일제국을 겨우 2대 만에 붕괴시킨 것을 보았음인지, 한고조는 통일 후 기원전 195년에 숨지기까지 7년 동안 관대하고 온화한 정치로 백성의 고달픈 심신을 어루만지는 데 애썼다. 또한 제일 먼저 타도 진나라의 대열에 섰던 서민 출신의 ‘혁명가’ 진승의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끊지 말라고 지시했다.

 

잔혹한 체제안정책, 그러나 ‘외적(外賊)’과 ‘외척(外戚)’에서 아쉬움을 남기다


그러나 한고조 치세 7년이 관대함과 평화로움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진나라가 군웅에 의해 무너지고, 진나라나 항우를 섬기던 자들이 자신을 섬겨 공신이 되는 모습을 똑똑히 본 그는 왕조가 오래 가려면 공신 세력을 확실히 제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통일 이듬해에 최고 공로자 중 하나인 한신을 제왕(齊王)에서 회음후(淮陰候)로 격하시킨 것을 시작으로 영포, 팽월 등 공신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그 봉국에 유씨 황족을 봉했다. 특히 팽월의 경우 그 시체를 젓갈로 만들고 여러 제후들에게 보내 본보기로 삼는 잔혹함을 보였다. 회음후 한신도 결국 처형당하는데, 그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구나.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 법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잔인한 수단까지 쓰며 왕조를 안정시키려 한 한고조였으나 두 가지 점에서는 불안의 씨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외적과 외척이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한 후 북방의 흉노가 우환거리라 여겨 친히 토벌에 나섰지만 역습당해, 백등에서 7주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다가 미인을 바치고 겨우 풀려났다. 이후로도 한나라는 한동안 흉노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황후인 여후(呂后)를 정점으로 하는 여씨 일족이 세력을 뻗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한고조 사후 여후는 사실상 황제나 마찬가지의 권력을 휘두르며 15년 간 집권했는데, 이 때문에 유씨 황족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가 기원전 180년에 여후가 사망한 뒤 겨우 태위 주발(周勃)의 쿠데타로 여씨 일족이 도륙되며 안정을 되찾았다. 한고조가 임종의 자리에서 “한나라를 멸망에서 구할 인물은 주발일 것이다”라고 예언했다는데, 역시 나중에 만들어진 전설이 아닐까.

 

한나라는 한고조 유방 이후 서한(西漢) 15대, 동한(東漢) 15대를 이으며 총 400여 년을 지속했다. 그 사이에 중국의 강역은 중앙아시아, 인도차이나, 한반도까지 뻗었으며, 유교와 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 전통문화가 확립되었다. 진나라가 이룩한 제국 체제 역시 한나라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1911년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을 지속했다. 유럽문명의 원형이 로마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중국문명의 원형은 한나라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글자를 한자(漢字)로, 중국 민족을 한족(漢族)으로 부르는 것도 이런 사실을 반영한다. 모든 것은 젊은 시절을 술과 싸움질로 허송하던 어느 백수건달이 놀랄 만큼 좋은 운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따분한 삶 너머로 꿈을 좇지 않았더라면, 그 꿈을 이뤄줄 인재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붙잡지 않았더라면, 어찌 그 운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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