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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의 서역 여행에서 장건은 흉노를 협공하는 동맹을 맺는다는 본래의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다. 군사적, 외교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한 셈이라 하겠으나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특히 오손과의 동맹은 흉노를 견제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고, 한나라의 영향력이 서역 여러 나라에 미치도록 하는 데에도 기여했기 때문이다. 서역 여러 나라들은 한나라가 막강한 대국이라는 사실을 장건 일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많은 나라들이 한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건의 여행이 지니는 의미는 정치적, 외교적 측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와 다른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실크로드라 일컬어지는 동서 교통로의 기반을 놓고 중국과 서역 사이의 상업적, 문화적 교류를 가능케 했다는 점이다.

세계 인식의 확장에 기여
 예컨대 한나라는 오손과 동맹을 맺으면서 무제의 조카 유건(劉建)의 딸 세군(細君)을 오손으로 시집 보냈다. 이 때 세군은 관리, 시종, 환관 등 수백 명과 함께 오손으로 갔다. 세군이 죽은 뒤에는 황족 유무(劉戊)의 손녀 해우(解憂)를 다시 오손에 보냈고, 해우가 오손으로 시집 가 나은 딸들이 나중에 사차(莎車: 야르칸드)와 구자(龜玆: 쿠차) 왕의 부인이 되었다. 이들은 한나라와 서역의 정치적 관계는 물론 문화적 교류에서도 일종의 거점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장건이 대완, 강거, 월지, 대하, 안식, 신독, 우전, 한미 등 서역 여러 지역에 파견한 부사들도, 각 지역의 한나라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인식을 높이고 한나라의 서역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부사들은 귀국하면서 현지의 상인과 사절들을 데리고 왔다.
장건 이전에도 서역 여러 나라들은 교류하고 있었고 교통로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 제국 차원에서 공식적인 교역과 교류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세계와 중앙아시아 세계 나아가 더 먼 서쪽과 상업적, 문화적, 정치적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은 장건의 공이라 할 수 있다. 공식적인 교역의 물꼬가 트이자 서역에서 중국으로 보석, 산호, 공예품, 향료, 석류, 포도, 목재 등이 들어왔고 중국의 견직물을 비롯한 많은 산물들이 서역으로 들어갔다. 무제는 대완 지역에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 곧 한혈마(汗血馬)가 있다는 장건의 정보를 바탕으로 기원전 104년 장군 이광리를 보내 한혈마를 입수하기도 했다.
장건은 오손에서 돌아와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대행령(大行令)에 임명되어 서역 외교 분야에서 계속 활동하게 되었지만, 기원전 114년 세상을 떠났다. 장건의 고향인 오늘날 중국 산시(陕西)성 청구(城固)현 서쪽 보왕(博望)진에 측백나무에 둘러싸인 장건의 묘가 있다. 장건의 출생 시기를 정확히 알기는 힘드나 월지로 처음 떠난 기원전 139년경 그의 나이를 30대로 추정해 본다면, 대략 50대 후반 또는 6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셈이 된다. 둔황에는 7세기에 그려진 장건출사서역도(張蹇出使西域圖)라는 벽화가 있다. (막고굴 제323굴 북벽)무제가 말 위에서 손을 들어 장건에게 명령을 내리는 가운데 장건이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장건의 여행 8백 년 뒤에 벽화가 그려질 정도로, 특히 실크로드 지역에서 그의 명성은 지속적으로 드높았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