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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클로비스 1세 - 메로빙거 왕조의 첫 번째 왕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01.13|조회수1,129 목록 댓글 0

클로비스 1세

유럽 북동부지역에 웅거하던 게르만족이 훈족에 밀려 시작한 민족의 대이동은 새로운 유럽역사를 열었다. 서유럽지역으로 물밀듯이 들어온 게르만족은 결국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유럽역사의 무대는 지중해에서 유럽대륙으로 변했고 게르만족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등장하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을 세우다

각기 다른 게르만족들이 군웅 할거식으로 유럽 대륙에서 짧은 시간 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가운데 갈리아 지역을 차지한 프랑크 족은 새로운 유럽 역사의 초석을 닦았다. 그리스 로마 문명과 크리스트교, 그리고 게르만적 요소라는 세가지 키워드로 대표되는 유럽의 문화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오늘날 정신적 문화적 공동체로서 유럽 세계는 이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처음 유래하였다. 프랑크 왕국을 세운 왕은 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 클로비스였다.

 

게르만족의 하나인 프랑크족은 라인강 중하류 동쪽 기슭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을 비롯하여 많은 소부족으로 이루어진 부족집단이었다. 라인강 하구에서 북브라반트에 거주하는 살리족, 쾰른을 중심으로 한 리부아리족, 헨센지방을 중심으로 한 상프랑크족이 대표적인 3대 부족이었다. 그 가운데 살리족은 5세기초 더욱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클로디오 부족장 때부터 시작된 살리족의 통합은 아들 메로비스와 손자 힐데리히 1세에 까지 이어졌다. 통합과정에서 힐데리히 1세는 부족장 이상의 권력을 장악하고 살리족의 통일을 상당히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


 

힐데리히 1세의 외아들이었던 클로비스는 16세에 아버지를 이어 살리족을 이끌게 되었다. 클로비스는 타고난 전사였다. 그의 이름 클로비스는 게르만 어로 ‘위대한 전사’ 라는 뜻이라고 한다. 클로비스는 살리족의 통합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통해 서유럽지역에서 세력을 확장 시켜나갔다. 481년 클로비스는 남하하여 갈리아 북부지방을 정복했고 486년경 수아송에서 북부 갈리아의 마지막 로마 총독 시아그리우스를 무찔렀다. 이로써 그는 강력한 게르만 통치자의 하나로 떠오르면서 솜강에서 루아르강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후 그는 여타 게르만족들과의 전쟁을 통해 로마가 다스리던 갈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와중에 살리족뿐만 아니라 전 프랑크족을 통일하고 할아버지 메로비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로서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아내를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

정복자인 클로비스가 갓 세운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정복지 갈리아지역에 살고 있는 로마화된 원주민과의 화합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클로비스는 그들과의 결합을 종교를 통해 이루어냈다. 당시 크리스트교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공인한 로마 가톨릭(아타나시우스파)과 이단으로 내몰린 아리우스파가 득세를 하고 있었다. 로마와 로마의 속주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을 믿었지만 로마에서 쫓겨난 아리우스파는 게르만족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족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위치를 얻었다. 민족 대이동으로 서유럽 지역에 들어온 게르만족들은 종교적으로도 로마화된 원주민들과 갈등을 빚었다.

 

처음 클로비스의 종교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상을 섬겼다는 것으로 보아 아리우스파였던 것 같지는 않고 게르만의 전통 신을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로마 가톨릭에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부루군트 왕국의 공주였던 아내 클로틸드 때문이었다. 부루군트 왕국은 일찌감치 로마 가톨릭을 믿던 친 로마 게르만 왕국으로 500년경 클로비스에 의해 프랑크로 통합되었다. 아내의 끈질긴 개종 권유를 뿌리치던 클로비스는 506년 알라마니족과의 싸움에서 거듭되는 패배의 가운데서 아내가 믿는 신을 찾았다. 이 전쟁만 이기게 해준다면 개종하겠다고 맹세한 클로비스는 결국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아내의 청을 받아들였다.

 

 

 

클로비스는 승전의 기념으로 3000명의 부하들과 함께 랭스의 주교 레미기우스에게 세례를 받아 로마 가톨릭의 신자가 되었다. 이 개종으로 클로비스는 여러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 로마 가톨릭을 믿는 전체 갈리아의 원주민으로부터의 지지를 받아 그의 정복전쟁은 이단인 아리우스파의 압박으로부터 로마 가톨릭 교도들을 해방시키는 성스러운 전쟁으로 포장되었다. 정복지의 원주민들은 클로비스를 해방자로 받아들여 그의 통치를 환영했다. 클로비스 또한 그들의 지지에 부응하여 자신의 승리를 갈리아지방의 성인으로 알려진 성 마르티누스의 은덕으로 돌렸다.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게르만족을 이긴 공로로 얻어낸 로마 교황청의 지지는 대외적으로 클로비스와 프랑크 왕국의 위상을 드높여 주었다. 이때까지 문화의 중심지로 건재하던 동로마제국도 야만적이라고 경시하던 다른 게르만 왕국과는 달리 프랑크 왕국에 대해서는 가톨릭의 보호자로 칭송하면서 클로비스에게 로마특권시민계급의 지위와 콘술의 칭호를 주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은 이단시되던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던 여타 게르만계 국가들과 차별화되면서 유럽 기독교 세계의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이는 정복자 게르만족의 문화요소와 그리스 로마의 문명이 크리스트교라는 종교 안에서 융합된 것을 의미하였다. 클로비스의 개종과 프랑크 왕국의 성립은 이후 수세기를 걸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정체성을 확정 짓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문화의 근간을 마련하다


 

클로비스는 프랑크 왕국의 수도를 파리로 정했다. 파리는 동과 서 그리고 북쪽에서 아직도 프랑크 왕국에 반기를 드는 게르만족을 통제하기 좋은 위치였다. 그는 이곳에 성 주느비에브 교회를 지어 예수와 사도들에게 바쳤다. 파리는 프랑크 왕국의 수도가 된 이후 유럽의 중심지로서 현재까지도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클로비스는 재위 말년에 유럽의 중세를 연 프랑크 왕국의 창시자로서 그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정치를 펼쳐나갔다. 그는 오를레앙 공의회를 열어 32명의 주교를 소집하고 주교들이 회의를 거쳐 만든 교회법을 심의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정해진 교회법은 중세 교회의 성격을 결정지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요일인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던가 추수감사절 등, 현재 교회뿐 만 아니라 서구일반에 퍼져있는 갖가지 법규들이 이 오를레앙 공의회에서 정해졌다.

 

교회법을 통해 원주민과 게르만족 전체를 아우른 클로비스는 정복자인 게르만족의 법률을 성문화시켰다. 이것이 살리카 법전이다. 살리카 법전은 크리스트교나 그리스 로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게르만족, 그 중에서도 최고 정복자인 살리족에게만 적용되었다. 살리카 법전은 주로 형법과 소송법에 관한 법전으로 각종 규칙 위반과 범죄에 대한 벌과금 목록을 자세하게 싣고 있다. 살리카 법전은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유럽의 왕위계승문제에 살리카법이 종종 인용되었다.

 

클로비스는 511년 말에 파리에서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그가 지은 생드니 성당에 묻혔다. 그가 죽은 후 프랑크 왕국은 프랑크족의 관습인 분할상속 원칙에 따라 4명의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분할상속은 왕의 권위를 나누는 것이니만큼 프랑크 왕국과 메로빙거 왕조를 약화시켰고 상시적인 내란의 단서가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는 명목상으로는 751년까지 존속하였으나 결국 카롤링거 왕조를 세운 피핀에 의해 몰락하였다.

 

 

 

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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