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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그레고리오 7세 - 중세교회 대개혁을 단행하고 전성기를 연 교황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01.13|조회수1,449 목록 댓글 0

그레고리오 7세

1077년 1월 추운 겨울날. 북 이탈리아의 카노사 성 문 앞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토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을 받은 이후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 자임하던 중세 독일의 국왕 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내복바람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알현하기 위해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을 파문한 교황에게 용서를 빌고 복권을 부탁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사흘이나 황제를 성문 밖에 방치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중세 교황권의 전성기를 알리는 첫 신호 ‘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다.

 


갈등하는 교황과 황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황제의 지위도 부정했다.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파문이란 인간으로 존중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사회생활을 접어야만 했다. 하물며 권력을 다투는 황제에게 내린 파문은 그의 지위뿐만 아니라 목숨마저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파문은 하인리히 4세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것이었다. 모후 아그네스의 섭정 이후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왕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귀족들과 갈등하던 하인리히 4세에게 교황의 파문은 뜻하지 않은 위기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의 이런 위기는 그가 스스로 자초했으며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초기 프랑크 왕국부터 유럽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성장과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힘이 있는 왕들과 결탁하였다.


 

프랑크 왕국 시기 메로빙거왕조의 클로비스 1세. 카롤링거왕조의 피핀과 사를마뉴 대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오토 대제 등이 모두 기독교의 세력 확장과 안정에 힘을 보탠 왕들이었다. 교회는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만큼 특별한 권리를 돌려주어야만 했다. 왕들은 교회의 교리로 사회 안정과 통치권을 강화하면서 성직자들의 자리까지 좌우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교회는 왕에게 권리를 일부 양도하는 대신 그들의 군사력에 힘입어 재산을 지키고 이민족과 이교도로부터 보호받았다.

 

그러나 2인3각 경기처럼 서로 어깨동무를 하여 교회와 사회의 안정, 왕권과 성직자의 권위 신장을 도모하였던 왕과 교회는 각자의 몸집이 커질수록 동상이몽을 하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혼란스럽던 유럽지역이 안정을 되찾고 민중들이 교회의 교리 안에 교화되자 가톨릭은 더 이상 왕의 간섭을 받을 이유가 없어졌다. 왕들의 입장에서는 종교를 떠나 새로운 왕권중심의 시대로 나아가는 데 교회가 걸림돌이 되었다. 이러한 서로의 입장 차이 속에서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이 되었고 하인리히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인물 됨됨이는 왕의 권력에 고개 숙이던 이전의 교황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세속적인 쾌락이나 부의 축적에 관심이 없는 외골수 수도자였으며 이를 다른 성직자들에게도 강요하였다. 이시기는 교회의 안정으로 일부 성직자들이 왕권과 결탁하여 세속적으로 타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레고리오 7세는 이러한 교회 내의 부패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그는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왕권으로부터 독립하여야만 하며 교회 스스로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하인리히 4세와 갈등을 빚었다. 이미 상당수가 세속화되어 있던 교회의 성직자들은 교황의 종복인 동시에 왕의 봉신이기도 하였다. 교회가 이들 성직자이자 봉신자들을 교회 속으로 흡수해 버리면 왕권이 약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게다가 하인리히 4세는 어머니 아그네스의 섭정으로 이미 많은 귀족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상태에서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의 급선무는 이전의 왕권을 되찾는 것이었고, 나아가 더 큰 제국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말 잘 듣고 협조적이며 적당히 세속적이었던 교황도 거추장스러운 판에 독립적 권력을 가진 교회를 만들려는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먼저 공격한 것은 하인리히 4세였다. 그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안에 난색을 보이는 세속화된 성직자들을 부추겨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한다고 선언하였다. 왕의 눈치를 보던 이전의 교황들은 이러한 조치에 맥없이 폐위당해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는 외골수였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인리히 4세의 폐위선언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서 폐위되었음을 선언하였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당황한 것은 하인리히 4세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전부터 하인리히 4세의 왕권강화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들은 이때를 노려 얼씨구나 이탈하기 시작했다.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신을 대신하는 교황으로부터 파문 당한 사람은 인간 구실을 하지 못했다. 하인리히 4세의 지지 세력들도 교황의 강력한 조치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4세에 반기를 든 귀족세력도 나타났고 그를 대신할 왕을 새로 뽑자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그레고리오 7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을 아우스부르크에 소집하여 향후 하인리히 4세의 운명을 결정하려 하였다. 궁지에 몰린 하인리히 4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는 교황에게 자비를 구걸해야만 했다.

 

 

카노사의 굴욕

1076년 겨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아우스부르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를 출발했다. 그가 알프스를 넘을 때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순간 긴장했다. 군대를 가진 하인리히 4세가 무력으로 자신을 몰아 내려고 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본거지를 떠나 단출한 여행객이었던 그레고리오 7세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낸 것은 카노사 성의 성주였던 백작부인 마틸데였다. 그녀는 교황의 오랜 친구였으며 그의 교회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카노사 성으로 들어간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황제가 아니라 자비를 구하는 고해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하인리히 4세는 맨발에 수도사의 옷을 입고 성문 앞에 도착해 그레고리오 7세의 알현을 청했다.

  

 

교황이 파문을 거둬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앞날을 장담할 수가 없었던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만나줄 때까지 내복바람에 금식을 하며 3일을 버텼다. 이 카노사의 굴욕을 당하면서 하인리히 4세는 이날의 치욕을 훗날 반드시 갚겠다며 이를 갈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의 파문이 취소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는 더 이상 훗날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참고 또 참았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이미 하인리히 4세에 대해 마음이 돌아선 그를 설득한 것은 성주 마틸데 백작부인과 클뤼니 수도원의 대수도원장 후고였다. 황제의 신분을 떠나 성문 밖에서 추위에 떠는 신자를 자비의 교황이 내팽개쳤다는 오명을 덮어쓸 수 없었던 그레고리오 7세는 하는 수 없이 성문을 열게 하고 하인리히 4세를 만났다. 하인리히 4세는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용서를 구걸했으며 그레고리오 7세는 자신이 집전하는 미사에 하인리히 4세를 참석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파문을 거둬들였다.

 

이 ‘카노사의 굴욕’ 에 대한 후세 사가들의 평가는 분분하다. 카노사의 굴욕을 하인히리 4세의 패배로 보지 않고 승리로 보는 의견도 있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아우스부르크 회의에 참석하여 하인리히 4세를 단번에 매장시켜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이없이 그의 파문을 취소함으로써 권력을 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의견이 있기도 한 것이다. 한 순간의 치욕을 참아내고 훗날을 도모한 하인리히 4세의 인내와 정치적 판단에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실제로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이 취소된 후 독일로 돌아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보복할 힘을 길렀으며 끝내 그를 교황자리에서 몰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교황을 만나기 위해 추위 속에서 3일을 기다려 무릎을 꿇었다는 에피소드는 강력한 교황권의 상징으로서 충분히 빛을 발한다. 그것은 그레고리오 7세가 강직하고 청렴하여 황제의 권력에 대해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대장장이의 아들에서 로마교황까지

그레고리오 7세의 출신이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북 이탈리아 소아나 출신으로 본명은 힐데브란트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였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 로마로 가서 친척 아저씨가 원장으로 있던 성 마리아 수도원 들어갔다. 추측해보건대, 유럽 중세 시기 귀족이 아닌 계급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성직자가 되는 길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선택한 길이 아니었나 한다. 그는 수도원의 수사가 되어, 라테란 궁에 있는 음악학교 스콜라 칸토룸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스콜라 칸토름에서 그는 첫 번째 성공의 동아줄을 쥐게 된다. 그를 가르치고 아끼던 스승 조반니 그라지아노가 교황 그레고리오 6세가 되어 그를 보좌관으로 삼은 것이다. 그레고리오 6세는 중세 독일의 최강의 지배자로 불리며 로마교황의 자리를 쥐락펴락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교황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때 힐데브란트는 폐위되어 독일로 유배되어 가는 그레고리오 6세를 따라갔다.

 

힐데브란트의 두 번째 성공의 열쇠는 클뤼니 수도원의 일원으로 교회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은 프랑스 부르고뉴주 손에루아르 데파르트망의 클뤼니 지방에 있는 수도원이었다. 910년 아키텐공 기욤이 성베드로와 성바울로를 수호성인으로 하고 로마교황 이외의 다른 세속의 봉건 제후가 간섭하지 않는 독립한 수도원을 세운 데서 시작하였다. 세속 제후들의 입김에서 자유로웠던 클뤼니 수도원은 ‘클뤼니의 개혁’으로 불리는 수도원 개혁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이 운동은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클뤼니 개혁의 중심은 봉건제후 등 세속적 간섭을 물리친 독립적인 수도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세속적 지역영주와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성직의 매매와 처자식을 거느린 수도사 등은 개혁의 대상이었다. 청빈한 수도회 운동은 많은 제후들에게 동의를 얻었으며 특히 로마 교황을 완전히 장악했던 하인리히 3세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하인리히 3세는 힐데브란트의 적극적인 개혁운동을 눈여겨보았으며 그의 손에 의해 교황자리에 오른 레오 9세는 힐데브란트를 로마로 불러들여 교회개혁운동을 맡겼다.

 

강직하고 완고한 성격의 힐데브란트에게 교회개혁운동은 안성맞춤이었다. 로마 개혁단체의 주요 구성원이 된 힐데브란트는 교황 알렉산드르 2세의 재임기간 중에 막후 실력자가 되었다. 그는 횡포를 부리는 하급귀족들을 통제하여 로마지역 민중들에게 인기를 끌었으며 성 바로오 수도원을 개혁하고 교황을 대신하여 교회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힐데브란트의 눈부신 활약은 곧이어 그에게 교황의 자리를 약속했다. 힐데브란트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알렉산드르 2세에 이어 그레고리오 7세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교회의 대개혁과 서임권 분쟁

로마 가톨릭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레고리오 7세는 곧이어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신의 대리인 교황이 세속권력인 황제나 왕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선포하였으며 분열된 교회를 통일하고, 이를 위해서 성직자의 규율을 확립하여 세속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다. 그는 개혁의 의지를 담은 27개조의 교황령을 내렸는데 그 주요 내용은 성직매매 금지, 사제의 결혼금지. 속인의 주교 서임권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이 속인의 주교 서임권이었다.

 

속인이라 함은 교회조직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일반신도인데, 황제도 교회조직 밖의 사람으로 신자 신분으로 따지자면 평신도였다. 그런데 오랫동안 왕과 황제의 권력에 의탁하여 세력을 확장해온 교회는 각국의 교회를 주관하는 주교의 서임권을 해당국가의 왕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서임권이란 주교를 임명하거나 사임시킬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서임권이 왕에게 있다 보니 주교후보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은 교황보다는 왕에게 더 의지 했으며 왕의 권력 하에 있었다. 이것은 로마 교황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왕보다 미미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교황의 휘하에 주교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이는 일이 어려움을 뜻했다. 주교들은 교황의 말보다는 왕들의 구미에 맞게 행동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이것이 교회의 타락과 혼란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서임권을 교황이 가져옴으로써 유럽 전지역 교회를 개혁하고 교황권을 확립시키려는 그레고리오 7세의 의도는 왕들의 교회에 대한 권력을 축소내지는 박탈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하인리히 3세 시절 교황을 완전히 장악했던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교황의 이런 선언은 황제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전시대의 강력한 황제권에 대한 동경이 있던 하인리히 4세에게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은 있을 수 없는 반역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황제와 교황의 서임권을 둔 분쟁은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이 이긴 것으로 일단락 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인리히 4세는 끝내 그레고리오 7세에게 굴복할 수 없었고 분쟁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하인히리4세의 역습


교황의 파문 취소 조치로 위기를 모면한 하인리히 4세는 독일로 돌아가 지지세력을 다시금 확보하고 반역을 꾀했던 귀족들을 응징했다. 그레고리오 7세의 너무 강력한 개혁 조치에 반감을 품은 성직자들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 맞설 든든한 세력을 모아 카노사의 굴욕 3년 후 군사를 거느리고 로마로 쳐들어왔다. 원래 로마 교황청은 강력한 군대를 가진 기관이 아니다. 교황이 다스리는 영토는 왕들의 호의에 의해서 헌납된 것이었고 교황 보호는 왕들의 의무였다. 그런데 그 의무를 지켜야 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공격은 교황을 당황하게 했다.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과 하인리히 4세의 지지 세력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3년간 와신상담한 하인리히 4세는 예전의 허세 부리던 왕이 아니었다. 그는 교황의 지지세력을 무찌르고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를 선언했다. 그리고 하인리히 3세가 그랬던 것처럼 그레고리오 7세 대신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를 차기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가 클레멘스 3세이다. 클레멘스 3세는 교황선출에 대한 보답으로 하인리히 4세에게 황제의 면류관을 씌워주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로마에 억류된 자신을 구하러 온 로베스 기스카르를 따라 로마를 떠나 살레르노로 망명했다. 그리고 1085년 살레르노에서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원수를 갚지 못한 채 죽었다. 그의 유언은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나는 망명지에서 죽노라." 였다고 한다.

 

 

서임권 분쟁의 행방


그레고리오 7세 사후에도 주교의 서임권 문제는 오래도록 왕권과 교황권 사이에 갈등을 낳았다. 몇 차례 교회회의와의 갈등과 투쟁 끝에 해결의 실마리는 우르바노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보이기 시작했다. 우르바노 2세는 클뤼니 수도원 출신으로 그레고리오 7세 시절에 추기경이 된 사람이다. 그는 훗날 십자군원정을 제창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우르바노 2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유지를 이어 교황권 강화에 힘썼다.

 

성직자의 서임권은 결국 왕권과 교황권을 타협하는 형태로 1122년 보름스 협약을 통해 최종적인 결정을 보았다. 그 내용은 독일에서는 황제가 일단 주교를 선거를 통해 뽑은 다음 영지를 내리고 이를 교황이 최종적으로 서임한다는 형식을 취했고 이탈리아와 브르고뉴에서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성직자를 교황이 서임하면 황제가 영지를 내리는 식으로 순서를 정해 주교를 임명하였다. 이는 주교의 서임문제에 교황이 일정부분 참여 하게 됨으로써 유럽 전지역 교회에 교황권이 구석구석 미치게 됨을 의미했다.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시작된 교황권의 전성기는 바야흐로 최고조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주제로 인물 엮어보기왕과 대립한 교황들

그레고리오 7세 그레고리오 7세
중세교회 대개혁을 단행하고 전성기를 연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인노첸시오 3세
(1161~1216) 영국의 존왕과 대립하여 그들을 굴복시키고 교황권의 최전성기를 누렸다
보니파시오 8세 보니파시오 8세
(1235~1303)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며 대립했지만 패했다.
비오 9세 비오 9세
(1792~1878) 이탈리아 민족주의 전쟁 과정에서 로마령을 잃고 왕국과 대립했다.

 

 

 

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등의 책을 썼다.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982년

최승로 시무 28조 건의

993년

서희 강동 6주 확보

997년

천추태후 목종 즉위, 천추태후 집권

1037년

토그릴 베그 셀주크투르크 건국

1018년

강감찬 귀주대첩

1077년

그레고리오 7세 카노사의 굴욕

10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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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 구재학당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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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년

김부식 [삼국사기]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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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 [근사록]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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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 무신정변

1189년

리처드 1세 제 3차 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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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 십자군전쟁에서 예루살렘 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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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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