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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물사

[서양사]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인쇄술의 혁신자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02.22|조회수1,986 목록 댓글 0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구텐베르크 이전에도 인쇄는 있었다. 목판인쇄는 중국에서 6세기경에 처음 등장했고, 유럽에서도 14세기에 이미 부분적으로나마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다”는 표현은 잘못이다. 다만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서 인쇄술을 혁신했다”고 해야 정확하리라. 구텐베르크에 관한 책을 쓴 영국의 저술가 존 맨의 지적처럼, 그가 살았던 15세기 당시 유럽에는 인쇄술의 혁신을 위한 조건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구텐베르크는 다만 그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일 뿐이었다.


 

두루마리에서 코덱스를 거쳐 인쇄본까지

본격적인 책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 시작된다. 가령 ‘책’을 뜻하는 그리스어 ‘비블로스’(biblos)는 바로 ‘파피루스’를 가리킨다. 두루마리 형태 말고 오늘날처럼 네모난 종이의 한쪽을 엮어 만든 ‘코덱스’(codex) 형태의 책이 서양에서 일반화된 것은 5세기경의 일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책은 일일이 손으로 베껴 써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가격이 무척이나 비쌌다. 소나 양의 가죽으로 만든 ‘피지’에 글과 그림을 넣고, 나무와 가죽으로 만든 표지를 금은과 보석으로 장식한 당시의 책은 일종의 사치품이었다.

 

그로부터 1000년이 지나서야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중첩되며 책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우선 14세기 중반에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흑사병이 창궐해서 유럽 전역의 인구는 무려 3분의 1이나 줄어들었다. 인구의 감소로 인해 상대적으로 물자가 풍족해지게 되었으며, 대참사 직후의 사회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소비 지향적이었다.


 

덕분에 종이의 공급 역시 풍부해져서 가격이 많이 떨어졌으며, 각지에서 대학이 세워지며 필사본 책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바로 이 대목에서 구텐베르크가 등장해 인쇄술을 혁신했다. 물론 구텐베르크 이전에도 인쇄는 있었다. 목판인쇄는 중국에서 6세기경에 처음 등장했고, 유럽에서도 14세기에 이미 부분적으로나마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다”는 표현은 잘못이다. 다만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서 인쇄술을 혁신했다”고 해야 정확하리라. 구텐베르크에 관한 책을 쓴 영국의 저술가 존 맨의 지적처럼, 그가 살았던 15세기 당시 유럽에는 인쇄술의 혁신을 위한 조건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구텐베르크는 다만 그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일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공적을 쉽게 폄하할 수야 없지만 말이다.

 

 

일상적인 물건의 응용에서 드러난 천재성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지만 1397년이나 1398년이 유력하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마인츠에서는 1400년 6월 24일을 구텐베르크의 ‘생일’로 정해 대대적으로 축하했지만,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있어서 정한 날짜는 아니다. 원래 성(姓)도 ‘겐스플라이슈’(Gensfleisch)이며 ‘구텐베르크’(Gutenberg)는 그의 가문 대대로 살아온 저택의 이름이다. 요하네스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으로 조폐국에서 일했으며, 어머니도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다.

 

구텐베르크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워낙 드물며, 특히 그가 인쇄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이전까지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더욱 드물다. 오늘날 전해지는 약간의 기록 역시 그와 얽힌 이런저런 소송 관련이라든지 후대의 증언뿐이다. 서양에서는 인쇄술의 혁신자로 우상시되는 인물인 구텐베르크에 관한 기록 자체가 이토록 드물다는 점은 적잖이 역설적이다. 여하간 구텐베르크는 어린 시절에 제법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장성해서는 부모의 유산을 일부분 물려받아서 자기만의 사업을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34년, 구텐베르크는 고향 마인츠를 떠나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본격적으로 인쇄술을 연구했다. 그는 부친이 일하던 조폐국의 금화 제조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기법을 훗날 새로운 인쇄술에 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금 덩어리를 문양이 새겨진 펀치로 때리는 방법으로 동전을 만들어냈다. 구텐베르크는 마찬가지 방법으로 만든 주형에서 제작한 인쇄용 금속활자를 나무틀에 하나하나 심어서 조판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한 글자만 잘못되어도 판 전체를 갈아야 했던 기존의 목판인쇄와 달리 자유롭게 배치가 가능한 이동식 금속활자는 매우 신속하고 경제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구텐베르크는 그렇게 만든 활판을 인쇄기에 놓고 세게 압착해서 종이에 찍어냈다. 오늘날 ‘인쇄기’(press)를 가리키는 단어는 원래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만드는 ‘압착기’(press)를 가리켰다. 존 맨의 지적처럼 구텐베르크의 천재성은 완전히 새로운 물건의 발명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물건(압착기, 종이, 잉크)의 응용에서 드러난다. 결국 약간의 힌트만 있다면 누구나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구텐베르크는 한동안 자신의 연구를 철저한 비밀에 붙였고, 어쩌면 오늘날 그에 관한 기록이 적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인지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구텐베르크의 발명이 완전히 식은 죽 먹기란 뜻은 아니었다. 수백 년 넘게 수많은 개선을 통해 활판 인쇄의 전 과정이 확립된 현대에는 너무나도 간단하게만 여겨지는 갖가지 문제조차도 구텐베르크에게는 적잖은 장애물들이었다. 가령 그는 인쇄 과정에서 활자의 배열, 행간의 조절, 용지의 두께, 잉크의 농도 같은 사소한 문제조차도 일일이 따져보고 실험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구텐베르크가 새로운 인쇄술을 언제쯤 완성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엇갈리지만, 존 맨은 1440년경으로 보고 있다.

 

 

 

걸작 예술품 [42행 성서]의 제작, 그리고 쓸쓸한 퇴장

1448년, 구텐베르크는 마인츠로 돌아와 고향집에 인쇄소를 차렸다. 애초의 계획은 만들기도 쉽고 수요도 많은 교과서나 예배서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구텐베르크는 마인츠의 유력자인 요한 푸스트와 동업자 관계를 맺고, 푸스트의 양자인 페터 쇠퍼를 조수로 고용한다. 1450년경, 구텐베르크는 자신의 업적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로 손꼽히는 [구텐베르크 성서], 또는 [42행 성서]의 제작에 착수한다. 최초의 인쇄본 가운데 하나이며, 탁월한 디자인과 레이아웃이 돋보이는 걸작 예술품인 이 책은 전2권, 총 1272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왜 구텐베르크는 교과서나 예배서보다 훨씬 더 품이 많이 들어가는 성서 제작에 뛰어들었을까? 존 맨은 당대의 여러 신학자가 주도한 교회 일치 노력의 일환으로, 즉 인쇄를 통해 필사본보다 정확한 성서를 보급하려는 의도였다고 해석한다. 성서는 피지본과 종이본 두 가지로, 모두 180질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 그 중 48질이 남아 있지만 상태가 완벽한 것은 겨우 21질에 불과하다. 이 책의 가격은 가장 최근인 1987년에 경매에 나온 제1권 낱권(종이본)이 무려 540만 달러였다.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사업은 불과 6년 만인 1454년에 동업자인 푸스트가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갑작스레 끝나고 말았다. 표면적으로는 구텐베르크가 푸스트에게 경제적 손실을 끼쳤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구텐베르크의 인쇄 사업을 푸스트가 가로챈 셈이 되었다. 결국 구텐베르크는 인쇄기 한 대와 몇 가지 물건만 갖고 사업에서 손을 떼었고, 이후로는 푸스트와 그의 양자인 쇠퍼가 인쇄소를 운영했다. 새로운 인쇄술이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을 즈음, 구텐베르크는 본의 아니게 무대에서 내려가야 했다.

 

1457년, [42행 성서]에 버금가는 걸작 [마인츠 시편]이 나왔다. 그러나 사상 최초의 ‘판권지’에는 원래 제작자인 구텐베르크의 이름 대신 완성자인 푸스트와 쇠퍼의 이름만 있었다. 두 사람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구텐베르크는 깡그리 잊히다시피 했으며, 심지어 16세기에 가서는 구텐베르크가 어느 네덜란드인의 인쇄 기술을 훔쳐냈다는 주장이 나와서 한동안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물론 오늘날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인쇄소에서 손을 뗀 지 12년 뒤인 1468년 2월 3일, 구텐베르크는 세간의 뇌리에서 잊혀진 채 쓸쓸히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가져온 혁명적 변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가져온 ‘혁명’은 오늘날의 인터넷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다. 구텐베르크 이전에는 2개월 만에 책 1권이 필사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일주일 만에 책 500권이 인쇄되었다. 1450년부터 1500년까지 반세기 동안 유럽 각국에서는 2000만 권에 달하는 인쇄본이 간행되었다. 그야말로 정보의 대폭발이 일어난 셈이었다. 곧이어 정보의 양뿐만 아니라 질에서도 큰 변화가 생겨났다. 책이 널리 보급되면서 인류의 문자문화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창작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구텐베르크 이후로도 인쇄술은 계속 발전했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피난민과 함께 각종 고전 필사본이 유럽으로 들어왔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는 알두스 마누티우스가 이 원고를 토대로 수준급의 ‘인큐내뷸러’(1500년 이전에 나온 초창기 인쇄본)를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1476년에 런던에서 인쇄소를 차린 윌리엄 캑스턴 덕분에 당시까지만 해도 영향력이 미미했던 런던 방언이 널리 유행하며 현대 영어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는 1480년부터 서적 시장이 열리기 시작해서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서전이 매년 개최되고 있다.

 

구텐베르크를 빼고는 논할 수 없는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종교개혁이다. 경건하고 양심적인 기독교인의 공분을 자아냈던 ‘면죄부’부터가 인쇄술로 대량 생산된 물건이었다. 1517년,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뜻에서 마르틴 루터가 발표한 [95개조 반박문]이 신속히 인쇄, 배포됨으로써 종교개혁의 막이 올랐다. 이후 10여 년 동안 독일에서 간행된 저술 가운데 3분의 1이 그의 것이었을 정도로, 루터는 누구보다도 인쇄술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었다. 훗날 간행된 루터의 독일어 번역 성서 역시 인쇄술 덕분에 널리 보급되어 현대 독일어를 확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하리라.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터넷과 전자책의 가능성이 높이 평가되자 성급하게 종이책의 종말을 선언한 사람도 있었지만, 구텐베르크의 유산은 아직까지도 건재하다. 1971년, 미국의 마이클 하트는 동서고금의 고전을 텍스트 파일로 변환, 저장하는 일종의 전자도서관을 개설했고, 거기다가 ‘프로젝트 구텐베르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종이책의 종말을 예고한 전자도서관의 이름으로는 적잖이 역설적인 데가 없지 않지만, 이것이야말로 구텐베르크의 위대성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사건이 아닐까.

 


구텐베르크를 이미 앞지른 한국의 인쇄 문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히는 구텐베르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업적이 언급될 때마다 꼭 덧붙여지는 이야기가 있다. 즉 “한국의 인쇄문화는 구텐베르크를 이미 앞질렀다”는 것이다. 문헌에 따르면 고려 인종 때인 1230년경에 간행된 [상정예문]이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이지만 실물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는 1377년에 간행된 [불조직지심체요절]인데, 1877년에 서울에 체류하던 프랑스 외교관이 구입했던 이 책의 ‘하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었다가, 1972년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인정되었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무려 80년 앞선 쾌거였다. 

 

 

 

이것만 놓고 보아도 우리는 구텐베르크보다 앞선 인쇄 문화를 보유했던 문화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구텐베르크 혁명'에 버금가는 혁명적 변화까지는 없었다. 어째서였을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인쇄 기술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사실상 역대 정부가 독점하던 사업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조선시대까지도 대규모 인쇄 사업은 중앙 및 지방 관청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이런 전통은 일면 사상적 검열의 의도까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랍 세계의 사정도 우리와 유사했다. 다른 유럽의 신기술과는 달리 인쇄술만큼은 아랍에서 수백 년이 넘도록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는 [코란]의 독송보다는 암송을 강조했던 이슬람교 특유의 전통과 관련이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인쇄 기술은 서양을 훨씬 앞섰다 해도, 그런 혁신이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토양까지는 마련되지 않았다. 구텐베르크의 업적이 그토록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낸 바탕에는 그에 어울리는 사회 분위기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성공과 업적이야말로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사회의 역할이 어느 정도인지를 역설해주는 것은 아닐까.

 

 

 

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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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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