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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1'의 황산벌 전투… 계백과 5천 결사대는 왜?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05.01|조회수278 목록 댓글 0

[Why]  [유석재의 新역사속의 WHY] '10대 1'의 황산벌 전투… 계백과 5천 결사대는 왜?

 

영화 '황산벌'(2003)에서 백제 장군 계백(階伯)의 아내가 자신을 죽이려는 남편에게 일갈한다. "호랑이는 가죽,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 것이다!" 과연 계백은 '명예' 때문에 황산벌에서 무모한 전투를 벌였던 것일까?

처자식을 죽이고 출정한 계백을 비판한 사람은 조선 초에도 있었다. 권근(權近)은 "잔인무도한 행위로 사기(士氣)를 떨어뜨려 싸우기도 전에 굴복해 버린 셈"이라고 했다. 그러나 '동사강목'을 쓴 18세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의 견해는 달랐다.

"장수의 도(道)는 내 집과 몸을 잊은 뒤라야 사졸들의 죽을 결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만약 조금이라도 내가 먼저 살고자 하는 마음을 둔다면 군심(軍心)이 해이해지는 법이다. 권씨는 계백을 몰랐고 병법도 몰랐다."

최근에는 신라 측에서 '처자식 살해설'을 고의로 조작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원래 계백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처자식도 살아남는다"는 정도로밖에 말하지 않았다는 가정이다.

"처자식 살해설은 신라의 조작일 수도"

그런데 신라는 '백제군의 저항이 결사적이어서 처음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기 위해 "처자식을 욕보여선 안 된다"로 윤색했을 것이란 얘기다. 계백의 동상은 지금도 충남 부여의 읍내 한복판에 서 있다.

옛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 어느 고도(古都)를 가더라도 이토록 패장(敗將)을 기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가 역사에서 충절의 화신으로 남았기 때문일 것이지만 정말 그것뿐이었을까?

서기 660년 여름의 상황을 꼼꼼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13만 대군은 백강(白江·금강) 입구에 닿았고,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5만 군사는 지금의 대전과 옥천 사이인 탄현(炭峴)을 넘었다.

"백강과 탄현을 사수하라"고 했던 좌평 흥수(興首)의 진언은 이미 때를 놓쳤다. 그런데 전면전에 나선 계백의 군사가 5000명이었다니? 나중에 사비성 인근 전투에서 전사한 백제 병력만 1만명이 넘었고 지방 병력은 더 많았다.

의자왕은 왕성(王城)만을 사수하기 위해 주력을 묶어 둔 것이다. 신라와 당이 6월 21일 덕물도(인천 덕적도)에서 만나 "7월 10일 사비성 남쪽에 병력을 집결시키자"고 약속한 것은 백제의 동서 양면이 무인지대였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런데 신라군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암초를 만났다. '계백이 5000 결사대를 뽑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계백은 자신의 사병(私兵) 위주로 급조한 군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아섰던 것으로 보인다.

5만명 대 5000명, 10대1의 대결이었다. 수성전(守城戰)도 아니고 별다른 지형지물도 없는 벌판에서 이런 싸움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런데도 계백은 다섯 번 싸워 처음 네 번을 모두 이겼다.

김유신은 김반굴(金盤屈)과 관창(官昌) 두명의 청소년을 희생시키는 사기진작책을 쓴 끝에 간신히 전투를 끝낼 수 있었다. 만약 양측의 군세가 동등한 수준이었다면 김유신은 계백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당나라 소정방은 7월 9일 계백군이 전멸한 후에야 상륙했다. 신라군 없이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계백이 살아 있는 동안 당군은 백제 땅을 밟을 수 없었다는 것이 된다.

羅·唐 균열 초래한 '운명의 24시간'

소정방은 약속한 날짜인 10일 상륙 지점 근처에서 기다릴 수 있었지만 계백의 덫에 걸린 김유신은 꼬박 하루가 늦었다. 나·당 양군은 11일이 저물 때까지 어떤 전투도 치르지 못했다.

만 하루! 그 24시간이 계백이 백제에 남긴 마지막 선물이자 결사대 출정의 진짜 이유였다. 왕성인 사비성이 있던 부소산은 높이가 겨우 106m인 데다 금강과 접해 있다. 전성기의 수도로선 적합했으나 방어에는 매우 취약했다.

북쪽엔 아직 적이 없었다. 의자왕은 계백이 벌어 준 시간 동안 신속하게 임존성(任存城·예산 대흥면) 같은 요새로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적 수중에 들어갈 것을 말끔히 없애는 청야(淸野) 작전을 벌이면서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전열을 가다듬었어야 했다.

결국 그는 나·당이 사비성을 공격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란 단순하게 흐르지 않는다. 계백은 끝내 백제 땅이 당나라의 수중에 떨어지는 악몽을 막는 것만큼은 역할을 했다.

기일을 어긴 문제로 김유신과 소정방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연합 이후 처음으로 발생한 균열이자 나·당 전쟁의 서곡이었다. 계백은 죽어서도 이 땅을 지켰다.

 

조선일보 20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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