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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한국사]최충헌 - 60년 최씨 정권을 세우다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05.10|조회수1,025 목록 댓글 0

최충헌

 

최충헌(獻, 1149~1219)은 고려 역사, 그 가운데서도 무신정권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60년 최씨 정권의 기틀을 세운 최충헌은 문신적 자질을 갖춘 무인으로 독재자로서의 기본 요건을 갖춘 인물이었다. 17년간 집권하면서 4명의 왕을 바꾸었고, 동생을 비롯한 수많은 정적을 살해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왕 못지않은 권력과 사치를 누렸지만, 왕이 되려는 꿈은 꾸지 않았다. 누구보다 권력을 탐하는 인물이었던 반면, 권력의 마지막 절제도 아는 인물이었다.

 

성공한 쿠데타 무신란 이후, 100여 년간 지속한 무신정권 기간에 무려 60년간 지속한 최씨 정권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던가.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는 권력도 대부분이 길어야 10년이었다. 그러나 최충헌을 시작으로 60여 년간 권력을 누린 고려 무신정권 최씨 일가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출세와 영달을 꿈꾸다

최씨 정권을 연 최충헌은 1149년(의종 3년)에 고려 수도 개경에서 최원호와 유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우봉(牛峰), 초명은 난(鸞)이며 충헌은 개명한 이름이다. 그가 청소년기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다. 다만, 부친과 조부, 장인 모두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당대 최고의 무반 가문 출신으로 순탄한 집안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고 짐작할 뿐이다. 최충헌 집안은 무신란에 대해 소극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적극적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가문 출신에다 학문적 소양까지 갖춘 최충헌은 까막눈에 오로지 미신만을 신봉했다는 당대의 무신집권자 이의민(李義旼)과 견주어 출발부터가 달랐다. 그는 음서에 의해 벼슬길에 나가고 나서, 도필리(刀筆吏)라는 말단 행정직 생활을 하며 문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우봉 최씨 집안은 아마도 최충헌 대에 이르러 무신에서 문신 가문으로 변화를 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신란은 말단 행정직에만 만족해야 했던 그에게 새로운 변신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바야흐로 무관도 출세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명예욕이 남달랐던 최충헌은 무신들의 권력 장악에 자극을 받아 도필리 자리를 버리고 무신으로의 변신을 꾀하며 출세를 꿈꾸었다.

 

 

이의민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다

최충헌은 1173년(명종 4년)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할 때 부원수 기탁성에게 발탁되어 별초도령에 뽑혔고 이어서 별장직에 오르면서 출세를 보장받는 듯했다. 하지만 야망에 비해 출세운은 크게 따르지 못했다. 이의민이 집권하자 출세에 제약을 받아, 이후 20년 동안 승진도 못하고 불우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10년도 채 못 되어 장군직에 올랐던 경대승과 비교해 보면 최충헌은 초창기 관운은 없었던 편이다. 정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그의 지위는 고작 섭장군에 머물러 있었다.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출신들이 상급자로 군림하는 것을 지켜본 최충헌은 결국 이들과 상당한 갈등을 빚었고 결국 진주 안찰사직에서 파면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이후 그는 중요한 직책은 거의 맡지 못하고 한직에 머무르는 신세가 되었다. 이 당시 그의 처지는 “여러 해 동안 막히고 오그라들” 정도였다고 한다.

 

오십을 바라보던 최충헌이 배척받던 세력을 규합하여 이의민과 그의 추종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한 것은 1196년(명종 26년)의 일이었다.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헌의 아우 최충수의 비둘기를 강탈한 것을 구실삼아 이의민을 제거하였다. 절치부심의 야심가 최충헌은 이의민 정권에 대한 불신을 적절히 이용, 쿠데타를 일으켜 부활에 성공하였다. 당시 이의민 일당 제거에 직접 참여한 사람은 동생 충수뿐만 아니라 생질인 박진재와 친족 노석숭, 그리고 대장군 이경유와 최문청 등이었다. 이들의 협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최충헌은 반대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혐의가 있는 자까지도 철저하게 숙청시켜 버렸다. 많은 문무 관원들이 수차례에 걸쳐 죽임을 당하였고 거사를 도왔던 이경유와 최문청까지도 숙청하며 자신의 독재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최충헌 형제의 정변으로 1184년(명종 14년)에서 1196년(명종 26년)까지 13년간 지속한 이의민 정권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고려사] 이의민 열전에는 그의 실각을 예고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 한 토막이 실려져 있다.

 

이의민은 까막눈에다 무당을 몹시 신봉하였다. 그의 고향 경주에 나무로 만든 귀신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두두을(豆豆乙)’이라고 불렀다. 이의민은 자기 집에다 사당을 짓고 그 귀신을 가져다가 날마다 제사하면서 복을 빌었는데 하루는 사당에서 귀신의 곡성이 들렸다. 괴상히 여긴 이의민이 연유를 물으니 그 귀신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너의 집을 오랫동안 지켜주었는데 이제 하늘이 재화를 내리려 하니 내가 의탁할 곳이 없어져 우는 것이다.”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4명의 왕을 갈아치워

최충헌이 공식적으로 대권을 장악한 것은 1201년(신종 4년) 이후의 일로 정중부의 난이 일어난 지 이미 43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이후 최충헌은 17년간 고려 무신집권기 최고지배자로 권력을 향유했다. 정중부에서 최충헌에 이른 60년간 무인들이 폐립한 왕은 모두 6명이나 되었고, 그 가운데서도 최충헌이 갈아 치운 왕은 명종을 포함하여 신종·희종·강종에 이르기까지 4명이나 됐다. 왕이 될 욕심까지는 갖지 않았지만, 왕을 갈아치우는 데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최충헌의 관직은 점점 높아만 갔다. 특히 희종은 그를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고 은문상국(恩門相國)이란 특별한 호칭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던 최충헌은 ‘흥녕부’란 관청을 따로 설치하여 여기에 요속을 따로 두었고, 흥덕궁을 자신의 궁궐처럼 사용했다. 게다가 민가 1백여 채를 허물어 왕실 궁궐에 못지않은 대저택을 지었으며 집에서 외국의 사신을 맞아 잔치를 베풀면 그 규모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초호화판이었다.

 

17년간 왕 못지않은 권력을 누렸던 최충헌이지만, 그에게도 절체절명의 위기가 있었다. 그를 죽음까지 몰아간 인물은 고려 21대 왕 희종(熙宗)이다. 1204년 1월, 신종은 노환으로 왕위를 자신의 맏아들인 태자 영에게 물려주었는데 이가 희종이다. 희종은 앞서 무신집권자들이 옹립한 명종·신종과 달리 적통자로서 별다른 문제없이 왕위에 오른 군주였다. 따라서 정통성과 대의명분이 뚜렷했고 이와 같은 배경은 왕권을 회복시킬 수 있었던 좋은 기반이었다. 게다가 희종 또한 최충헌의 독단에 크게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최충헌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은 희종의 즉위와 함께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희종이 즉위한 해인 1204년에 급사동정 지구수의 집에서 장군 이광실 등 30여 명이 모여 최충헌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고, 1209년(희종 5년) 4월에는 개경 부근의 청교역리 3명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암살 기도가 꼬리를 물자 최충헌은 영은관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여 자신을 죽이려는 반대자들을 색출하였다. 이후에도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해체하지 않고 자신의 독재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권력기구로 삼아 버렸다. 최충헌은 무신들의 합좌기관인 중방을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시키고 대신 교정도감을 중심으로 모든 국사를 처리해 나갔다.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통해 자신의 정권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모두 배제하고 권력세습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최충헌의 서슬 퍼런 독재정치 아래서도 또다시 그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는데 이때는 국왕 희종도 직접 가담하였다. 최충헌의 무단통치를 7년간이나 묵묵히 지켜보던 희종이 마침내 자신의 측근 내시들과 함께 모의하여 최충헌을 제거하기로 나선 것이다. 1211년(희종 7년) 12월 경자일, 희종을 뵈러 수창궁으로 들어온 최충헌은 무방비 상태에서 습격을 당하였다. 급하게 몸을 피한 최충헌이 희종이 있는 곳을 달려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희종은 외면하였다. 희종의 내심을 알아차린 최충헌은 급한 김에 지주방(知奏房, 궁중 출납창고) 문틈에 몸을 숨겨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였다.

 

이후 궁궐 밖에 있던 측근들의 도움으로 전세를 역전 시킨 최충헌은 관련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쫓아 버렸다. 이와 함께 태자 지는 인주(인천)로, 덕양후 서(희종의 아우)는 교동으로, 시녕후 위(희종의 차자)는 백령도로 각각 추방했다. 이로써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위된 희종은 그 후 자연도(현재 영종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노년에는 법천정사로 옮겨 1237년(고종 24년) 5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고려 왕 4명을 갈아치운 독재자 최충헌이지만, 결코 왕을 시해하지는 않았다. 무신란 때 의종을 죽인 이의민이 ‘왕을 시해한 자로’ 낙인 찍힌 것을 익히 보아온 탓일 것이다.

 

 

남다른 안목과 식견을 지녔지만, 독재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는 잔혹한 성품을 지녀

최충헌 정권이 다른 무인정권과 달리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최충헌은 문신 출신으로 남다른 안목과 식견을 지녔고, 권력을 나누던 동생마저 죽일 수 있는 냉혹한 인물로 독재자로서 장수할 수 있는 기본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아는 인물이었다.

 

이의민과 두경승, 그리고 명종을 연이어 제거했던 최충헌은 쿠데타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동생 최충수를 제거해야 했다.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세자비로 삼으려는 계획을 막아선 최충헌은 동생 충수를 반란죄로 엮어 처단하였다. 이 사건은 강력한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반대파에게는 냉혹하면서도 과단성 있는 사람으로, 왕실에는 고려 사직을 지켜내는 이미지를 새긴 것이다. 일개 섭장군의 신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당대 최고의 무인인 두경승을 제거하고 명종을 폐위시키는 한편, 동생 최충수 세력마저 제거하면서 초기 불안정했던 집정에서 확고한 자기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고, 이는 곧 60년간의 최씨 무인정권의 기틀이 되었다.

 

왕을 갈아치울 수 있는 능력자. 최충헌이 누린 영화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자신의 저택 북쪽에다 ‘십자각’이란 호화 별당도 지었고, 이를 위해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원성이 자자했다. 그 당시 백성 사이에는 최충헌이 남자아이 5명과 여자아이 5명을 잡아다가 오색 옷을 입혀서 집터의 네 귀퉁이에 묻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그의 권세가 대단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최충헌은 자신의 아내 임씨를 수성택주라 부르고 강종의 서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정화택주로 삼았는데 ‘택주(宅主)’란 본래 왕녀에게만 허용되어 있던 칭호였다.

 

어느 제왕 못지않은 권력을 누리고 왕녀를 첩으로까지 삼았던 최충헌은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반역으로 몰아 죽였고, 국난의 위기에서도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횡포를 일삼기도 했었다. 1218년(고종 5년) 서북면 원수 조충과 병마사 김취려가 몽골·동진과 연합전선을 펴서 거란군을 격퇴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최충헌은 오히려 그들의 공을 시기하여 아무런 상훈도 내리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손영 등 10여 명의 장병이 주막에서 술을 마시며 “거란과 싸워 전공을 많이 세웠는데도 뇌물을 바치지 못해 벼슬을 못한다.”라고 한탄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최충헌은 1백여 명이 넘는 불평분자를 색출하여 보정문 밖에서 죽였다. 이 무렵 낭장 기인보도 최충헌에게 불만을 품고 반란을 꾀하였다가 오히려 잡혀 죽었다.

 

 

다른 무인정권과는 다르게 천수를 누린 최충헌의 독재정권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백관이나 일반 백성에게까지 갖은 못된 짓을 다 하고 국가를 혼란에 빠트린 최충헌은 그 위인이 정중부나 이의민 이상으로 몹시 음흉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잔학하였는데도 천수를 다 누리고 1219년(고종 6년) 9월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국가의 대권을 장악한 것이 그 아들 최이였으므로 죽은 최충헌에게는 경성(景成)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백관은 소복을 입고 장례에 참석했다. 그의 장례식은 어느 제왕에 못지않은 대규모의 것이었다.

 

 

 

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글쓴이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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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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