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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과에 급제한 이후 지눌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결사운동을 약속하였다. 불교 본연의 모습이 아닌, 분쟁의 소용돌이에서 싸움꾼으로 전락하는 승려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생애를 걸고 해결사의 역할을 해낸 데에는 크게 세 번의 계기가 있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세 번의 심기일전(心機一轉)이라 말한다.
첫째는 승과에 급제한 직후 전라도 나주의 청량사에서 이루어졌다. 지눌은 이곳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하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은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육조단경]은 중국 선정의 제6조 혜능(慧能)이 지은 책이다. 지눌은 이 깨달음을 통해 혜능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나중에 송광사의 산 이름을 조계산으로 한 것 또한 혜능의 조계 보림사에서 따왔다.
둘째는 1185년 충청도 예천의 보문사에서 이루어졌다. 지눌은 여기서 교종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3년간 [화엄경] 공부에 몰두한다. 교종의 여러 승려를 찾았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 공부하여 깨치기로 마음먹었다. [화엄경]에서는 여래출현품의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다”라는 구절이, 이통현(李通玄)의 [화엄신론]에서는 “몸은 지혜의 그림자”라는 구절이 다가와 크게 깨달았다.
지눌은 생각했다.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조사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이는 결코 둘이 아닌 하나다. 그는 곧 행동으로 자신이 깨달은 바를 옮겼다. 1190년, 처음에 약속한 동지를 모은 뒤 정혜사(定慧社)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었다. 결사의 이름은 나중에 수선사(修禪社)로 바꿨으나, 이 결사문은 한국 불교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명문이었다.
셋째는 1197년 지리산의 상무주암에서 이루어졌다. 지눌의 결사운동이 10여 년 이어지는 동안 성과와 함께 문제점도 드러났다. 결사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는 지눌의 뜻과 행동에 방향을 같이 하면서도 제 고집과 이익을 쉬 버리려 하지 않았다. 지눌을 그들을 설득하는 데에 지쳐버렸다. 상무주암으로 들어간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실패로 돌아가는 듯하던 결사운동은 시련 끝에 더욱 단단해졌다. 지눌은 송나라 대혜(大慧)의 [어록]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대혜는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일상 인연에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가리지 말고 참구(參究)해야 한다. 눈이 열리기만 하면 선은 그대와 함께 있다’ 말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눌은 심기일전을 통해 언제나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갔다. 1205년 지리산에서 송광사로 옮기고, 수선사 곧 오늘날 조계종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