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령의 반포와 불교 공인이 가지는 의의는 앞서 설명하였다. 법흥왕이 소수림왕의 경우를 충분히 살피고 이에 따랐다는 점에도 달리 이의가 없을 것 같다. 다만 두 왕 사이에는 두 가지 차이가 있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의 차이였다.
첫째는 두 사건이 일어난 순서이다. 고구려는 불교 공인이 먼저이고 이어 율령 반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라는 반대이다.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데, 그 사이도 8년이나 떨어져 있다. 고구려의 불교 공인과 율령 반포가 1년 사이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점과도 대조를 이룬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불교에 관한 한 신라는 극심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곡절은 언제 처음 불교가 신라에 들어왔는지부터 시작하였다.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의 불교 유입을 설명하는 유력한 주장만도 세 가지나 된다. 첫째, 눌지왕(417~458)과 비처왕(479~500) 시대라는 [삼국사기]의 주장, 둘째, 법흥왕(514~540) 때라는 [해동고승전]의 주장, 셋째, 미추왕(262~284) 때라는 [수이전]의 주장이 그것이다. 신라에게 불교가 얼마나 골치 아픈 상대였는지 말해주는 반증이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경로는 여러 가지였고,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려는 시도 또한 여러 차례였음을 말한다. 그만큼 전파가 쉽지 않았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겨우 성공을 거두었다. 새롭게 들어오는 불교는 민간신앙과 그 격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어, 기존 세력의 경계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어려운 상황의 핵심적인 배경이었다.
기존 세력이 새로운 불교세력을 경계하는 가장 큰 까닭은 왕이 그들을 비호한다는 데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법흥왕 이후 왕실은 보다 강력한 통치체제를 만들어 기존의 귀족세력보다 큰 힘을 행사하려 했다. 불교라는 종교는 새로운 이념을 제공해주기에 족했다. 그들은 왕족을 부처님의 일족으로 격상시키며 신성한 권력을 만들어 나가려 했다. 법흥왕은 그런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불교를 공식종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왕은 부처의 신성성을 얻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권위로 신하를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법흥왕의 불교 공인에는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법흥왕은 여기에 이차돈이라는 젊은 신하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기존 세력의 저항에 새로운 젊은 세력을 붙여 대항시킨 것이다. 게다가 이차돈의 불심(佛心)은 정치적인 목적이 깔려 있는 법흥왕의 의도보다 더 높았다. 그는 왕에게 당당히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부처의 날과 임금의 평안을 위해 두 사람 사이에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이차돈의 순교에 관해서는 ‘인물과 역사’의 이차돈 편 참조)
한 사람이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불교 공인을 이뤄내야 할 만큼 신라의 상황은 고구려와 달랐다. 소수림왕이 전격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고 사찰을 지은 것과는 아연 다르다. 불교 공인 후 율령을 반포하는 보다 순조로운 정치적 역정을 걸었던 소수림왕에 비해 법흥왕은 도리어 여기에서 걸려 시간을 끌고 있었다. 우리는 율령 반포가 먼저 이루어진 신라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잘 살펴야 한다.
둘째는 불교에 대한 소수림왕과 법흥왕의 태도이다. 불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소수림왕 자신이 독실한 불교신자였는지 알 수 없다. 이에 비해 법흥왕은 단순한 정치적 목적을 떠나 자신이 불교에 심취했다. 그가 죽은 후 왕비는 출가하기까지 한다. 법흥왕은 불교 공인 이듬해인 16년에 살생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의 불교 공인이 정치적 제스처만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더욱이 필요에 따라 전격 수입된 느낌을 주는 고구려와 달리 신라는 아래로부터 불교가 뿌리 내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