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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의 빛과 그림자

망한 나라에 간 사신―. 이 사행(使行)은 묘하게도 머잖아 닥칠 백제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찬란한 문화의 꽃을 마지막으로 불태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백제의 미래를 보여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양나라의 멸망은 한반도 내에서 백제의 역학구도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만약 양나라가 좀 더 지속되고 힘을 잃지 않았다면 한반도 내 통일 왕조의 주인공은 달라졌을 수 있다.
운명의 첫 발을 내디딘 왕이 성왕이다. 그는 무녕왕(武寧王)의 아들로 태어나, 이름은 명농(明穠)이었다. 무녕왕이 523년 5월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는 그를 평하여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으며 일을 잘 결단하였다”고 적었다.
즉위한 다음 해, 양나라로부터 ‘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으로 책봉 받았다. 양나라와의 관계는 양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같은 해, 신라와도 수교하였다. 신라・일본과 연대를 꾀해 고구려에 대항하려 하는 백제의 전통적인 외교태세를 다시 굳게 했다. 그러나 뜻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529년, 고구려의 안장왕이 군사를 이끌고 직접 쳐들어 왔을 때는 2,000명의 군사를 잃었다.
성왕은 538년에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도읍을 공주에서 부여로 옮기고, ‘남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고친 것이다. 사실 백제만큼 도읍을 자주 옮긴 나라도 없다. 처음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한 이래, B.C. 5년 한산(경기도 광주)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고,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371년에 북한성(경기도 양주)으로 도읍을 옮겨 105년을 지냈다.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한 475년에 공주로 옮겨 63년을 지냈었다.
처음의 위례성에서 마지막의 부여까지 모두 다섯 군데이다. 물론 이들은 한강 주변의 도읍과 백마강 주변의 도읍으로 크게 나눠진다. 한강 시대에서 백마강 시대로의 전환이라는, 백제 역사의 큰 틀이 여기서 드러난다. 백제는 왜 한강을 버리고 백마강을 택했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맞물리는 듯싶다. 한강 유역을 포함해 한반도의 남쪽에 눈 돌린 고구려의 예봉을 꺾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그래서 패퇴(敗退)하는 의미의 천도였다고만 말할 수 없다. 백제 나름 새로운 분위기와 문화의 창조를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하였다.
기실 백제의 백제다움은 공주로 옮긴 다음인 475년부터 만들어진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부터 백제는 중국 남부 지역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다. 고구려의 큰 그림자 아래 놓였던 한강 시대의 백제는,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모든 면에서 고구려의 짝퉁이었다. 왕조의 출신 자체가 그렇고, 고구려를 통한 북방 문화가 거의 직수입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백마강 시대의 백제는 달랐다. 이런 변화의 핵심에 성왕이 있다.
성왕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554년, 신라와 관산성(충북 옥천군)에서 벌어진 싸움 도중 왕자 창(昌)이 고립되었다. 창은 성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위덕왕이다. 성왕은 직접 왕자를 구하러 달려갔다. 그러나 도중의 구천(狗川)에서 신라의 복병에게 기습을 당했다. 왕은 현장에서 전사했다. 재위 32년째 되는 해였다.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일본의 고대 왕실이 백제계라는 말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나왔다. 심지어 흠명왕(欽明王)이 성왕이라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이다. 지나친 추정을 접어두고라도 815년 일본 왕실에서 만들어진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백제의 동성왕 이후 백제와 일본의 가까운 관계를 짐작할만한 자료가 들어있다. 동성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아버지를 이어 왕에 올라 무녕왕이 되고, 작은 아들은 일본의 계체왕(繼體王)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1914년 와카야마 현의 한 신사에서 발견되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인물화상경에 새겨진 글자, ‘사마(斯麻)가 남동생인 왕을 위해 보낸다’는 문장이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 사마는 다름 아닌 무녕왕의 이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