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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일찍 여읜 슬픔 속에서도 김육은 열심히 과거 준비를 하였다. 1604년 한성에서 열린 사마 초시와 회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시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소과를 통과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대과인 문과시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광해군대로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서인의 정통을 계승한 김육으로는 조정에서 벼슬하고 싶지도 않았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김육은 1611년 별시 초시와 증광별시 등에 합격하였지만, 조정에 나갈 뜻을 접고 1613년 가평의 잠곡 청덕동 화개산 아래에서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처할 집이 없어 굴을 파고 헛가래를 얽어 살았고 낮에는 나무하고 저녁에는 송진으로 불을 밝혀 책을 읽었다. 김육은 잠곡에서 그야말로 잠거(潛居)하였다. 세상이 어려우면 몸을 숨겨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경세에 뜻을 둔 탓인지 산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평생을 살아야 할 운명은 아니었다. 잠곡에 은신한 지 10년 만인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곧바로 6품직의 벼슬을 받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마흔 넷의 나이에 처음 얻은 벼슬이었고 인조반정 세력이 가장 먼저 찾은 인물이기도 했다. 김육이 빠르게 벼슬길에 나간 것은 광해군대에 과거 응시의 뜻을 접고 산골짜기에서 몸소 농사를 지은 그의 행실이 크게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직이 싫었는지 벼슬을 그만두고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정식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시강원으로 있었던 김육은 세자를 따라 피난을 갔고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자신의 소신을 밝힌 시무책을 올리기도 했다. 김육의 강직한 성품은 왕을 능멸하는 것으로도 비춰졌다. 인조의 오해를 받아 1629년에 관직을 삭탈당하자 한강을 바라보는 경기도 양근 소천에서 우거하며 때를 기다렸다.
김육이 중앙으로 다시 진출한 것은 1632년 5월이었다. 홍문관 부수찬, 이조정랑,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고 인조의 깊은 신임을 받아 승정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중앙에서의 관직도 화려했지만, 목민관으로서의 치적도 탁월했다. 1635년 안변도호부사 시절에는 안변 관아의 무기고를 정비했고, 관북 지역 유생들의 학풍을 진작하고 병사들을 조련했다. 이 시기에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자신의 집안 문적을 정리하여 [청풍세고(淸風世稿)]를 엮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