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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사 자료(인물)

[인물 한국사]김육 - 대동법에 일생을 바친 조선 최고의 경세가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10.12.08|조회수320 목록 댓글 0

 

 

김육( 金堉, 1580~1658)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이 발발했던 조선 초유의 국난 시기를 살았던 인물로 그의 현실 개혁은 조선이 처해있던 위기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왜란과 호란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고, 정부는 국가 재정을 비롯한 전후 복구 문제가 급박한 실정이었다. 전란 후 재정복구책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인물이 바로 김육이었다. 당시의 위정자들은 파탄이 난 국가 재정만을 생각했지만, 김육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이라 생각했다. 10여 년간 농사꾼으로 살았던 김육이야 말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할 최고의 적임자였다.

 

 

 

조실부모한 천재소년

 

김육은 1580년 7월 14일 한양(옛 서울) 마포에 있는 외조부 조신창(趙新昌)의 집에서 태어났다.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혹은 회정당(晦靜堂)이다.

 

 

 

 

 

김육대에 와서 그의 가문은 명문 반열에 올라 섰지만, 청풍(淸風)이 관향인 김육의 집안이 중앙에 알려지게 된 것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고조부 김식(金湜, 1482-1520)이 서울에 세거하면서부터이다. 김식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당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며 사림의 공론을 주도한 인물이다. 김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면서 증조부부터 부친인 김흥우까지 중앙의 요직을 맡지는 못했지만, 김육의 집안은 기묘사림의 학풍을 계승하며 근기 지역 사림의 중심부에서 성장하였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에게 수학한 김육은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등과 긴밀한 교유를 맺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서인의 정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육의 모친인 한양 조씨는 조광조(趙光祖)의 아우 조숭조의 손녀였다.

 

김육은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외우는 비상한 자질를 타고난 아이였다. 1588년 조부인 김비(金棐)가 강동 고을 수령이 되자 부친과 함께 그 곳에서 생활하였다. 여기서 퇴계의 제자인 조호익(曺好益, 1545~1609) 밑에서 공부를 하였다. 조호익은 1575년 최황(崔滉)의 모함을 받아 가족과 함께 변방에 이주해야 하는 전가사변(全家徙邊)의 벌을 받고 이듬해 유배되어 강동 고지산 자락 아래에 살면서 학사를 열어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다. 김육은 1589년 강동으로 가서 이듬해 봄까지 안국사(安國寺)에서 학문에 열중했다.


영의정 잠곡 김육의 초상화. <출처 : 실학박물관>

 

 

 

 

 

 

김육은 문학소년이었다. 12세에 [육송처사전(六松處士傳)]과 [귀산거부(歸山居賦)]를 지어 글솜씨를 뽑냈고, [소학]을 읽다가는 “낮은 벼슬아치라도 진실로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두어야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 정자의 글을 읽고 백성 구제의 큰 뜻을 품기도 했다.

 

김육은 13세에 임진왜란을 경험하였다. 피난 중에도 옷소매에 항상 책을 지녀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 어린 김육을 고달프게 한 것은 전쟁만이 아니었다. 부친인 김흥우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임종 당시 부친은 김육을 불러서 가문을 일으킬 것을 명하고 평생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유언했다. 부친의 유언을 받은 김육은 평생 동안 청풍 김씨 가문을 일으키는 데 노력했고, 대동법 등 경세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전쟁의 발발과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 연이은 흉년으로 김육은 모친을 모시고 청주에 살던 이모부 남익수의 집으로 가서 의탁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연안 지봉촌이라는 곳으로 이주했지만, 모친마저 세상을 떴다. 당시 21세 청년이었던 김육은 평구(현재 남양주 삼패동)에 부친과 모친의 묘를 합장하였는데, 인부를 부를 돈이 없어 본인이 직접 흙과 잔디를 날라 묘역을 만들었다고 한다. 부모를 모두 잃은 뒤에는 서울에 사는 고모댁에 얹혀 살았는데 삼년상 동안 새벽마다 묘소까지 걸어가서 곡을 하고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벼슬길을 포기하고 농사꾼이 되다

 

김육의 모습을 담은 ‘송하한유도’. <출처 : 실학박물관>


부모를 일찍 여읜 슬픔 속에서도 김육은 열심히 과거 준비를 하였다. 1604년 한성에서 열린 사마 초시와 회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시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소과를 통과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대과인 문과시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광해군대로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서인의 정통을 계승한 김육으로는 조정에서 벼슬하고 싶지도 않았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김육은 1611년 별시 초시와 증광별시 등에 합격하였지만, 조정에 나갈 뜻을 접고 1613년 가평의 잠곡 청덕동 화개산 아래에서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처할 집이 없어 굴을 파고 헛가래를 얽어 살았고 낮에는 나무하고 저녁에는 송진으로 불을 밝혀 책을 읽었다. 김육은 잠곡에서 그야말로 잠거(潛居)하였다. 세상이 어려우면 몸을 숨겨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경세에 뜻을 둔 탓인지 산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평생을 살아야 할 운명은 아니었다. 잠곡에 은신한 지 10년 만인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곧바로 6품직의 벼슬을 받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마흔 넷의 나이에 처음 얻은 벼슬이었고 인조반정 세력이 가장 먼저 찾은 인물이기도 했다. 김육이 빠르게 벼슬길에 나간 것은 광해군대에 과거 응시의 뜻을 접고 산골짜기에서 몸소 농사를 지은 그의 행실이 크게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직이 싫었는지 벼슬을 그만두고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정식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시강원으로 있었던 김육은 세자를 따라 피난을 갔고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자신의 소신을 밝힌 시무책을 올리기도 했다. 김육의 강직한 성품은 왕을 능멸하는 것으로도 비춰졌다. 인조의 오해를 받아 1629년에 관직을 삭탈당하자 한강을 바라보는 경기도 양근 소천에서 우거하며 때를 기다렸다.

 

김육이 중앙으로 다시 진출한 것은 1632년 5월이었다. 홍문관 부수찬, 이조정랑,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고 인조의 깊은 신임을 받아 승정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중앙에서의 관직도 화려했지만, 목민관으로서의 치적도 탁월했다. 1635년 안변도호부사 시절에는 안변 관아의 무기고를 정비했고, 관북 지역 유생들의 학풍을 진작하고 병사들을 조련했다. 이 시기에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자신의 집안 문적을 정리하여 [청풍세고(淸風世稿)]를 엮었다.

 

 

 

 

위험한 뱃길로 떠난 중국 사행길

 

 

1636년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김육은 그해 6월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다. 이 시기 중국은 명이 쇠퇴하고 요동지역의 후금이 강성해진 시기였다. 김육은 요동을 통해 북경으로 가는 육로가 막히자 해로를 이용하여 북경으로 들어갔다. 6월에 떠난 사행은 12월이 되어서야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북경에서 병자호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명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할 생각으로 동분서주했지만, 이미 명은 지원병을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김육은 무거운 마음으로 귀국길에 올랐고, 산해관을 나와 영원, 장산도, 석다산을 경우하여 이듬해 5월 14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김육은 사행길의 여정을 일기로 쓴 [조경일록(朝京日錄)]을 남겼다.

때는 숭정 9년
사신으로 북경에 조회하러 가서
그믐밤 연경 숙소에 묵고 있을 때
병석에 누워 오랑캐 소식 듣고는
눈 가득 우극의 눈물 흘리면서
놀란 마음으로 귀국을 하였다네. (김육의 ‘조선으로 돌아온 후’ 중에서)

김육은 아마도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와준 것처럼 도와 줄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더 이상 과거 중원을 호령하던 명나라가 아니었다. 더 이상 기댈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김육은 조선 내부의 개혁에 온 정력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김육은 일생동안 4번을 중국에 갔다. 3번에 걸쳐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한번은 심양에서 장기간 체류하였다. 첫 사행 때인 1636년, 그의 나이는 57세 때였다. 당시 관직은 정3품 당상관으로 안변도호부사 임기를 마친 뒤였다. 보통 동지사는 정2품 이상의 고관을 파견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위험한 해로로 가는 것이어서 기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육은 정기 사행인 동지·성절·천추진하사에 임명되어 해로로 명조의 북경을 왕래했는데, 그의 사행은 명나라로 간 마지막 사행이었다. 10년 뒤인 1646년에는 사은사로, 1650년에는 대신 자격으로 북경을 왕래했다. 김육은 17세기 중반 동아시아 역사의 가장 중요한 고비에 중국에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느꼈고, 선진적인 중국 문물이나 제도를 조선에 도입하고자 했다. 이러한 경험들이 그가 다른 관념적인 성리학자들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회개혁 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동법 시행에 운명을 걸다

 

병자호란 와중에 귀국한 김육은 1638년 7월 정태화의 후임으로 충청도관찰사가 되자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어서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辟瘟方)]을 간행하고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수차(水車)를 만들어서 관개(灌漑)에 쓰게 하는 등 부국(富國)을 위해 힘썼다. 임기를 마친 뒤에는 서울에 올라와 홍문관 부제학, 호조참의, 한성부우윤 등 두루 고위직을 거쳤고 청렴한 성품으로 인조의 총애를 받았다.

 

 

 

 

 

김육의 생애는 광해군대 10년 간의 은거 생활과 인조·효종 년간의 중국 사행 체험이 그의 경세적 학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 1613년부터 1623년 인조반정 직전까지 10년 동안 경기도 가평의 잠곡에서 주경야독하던 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였고, 네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을 통해 중국 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경험이 대동법과 용전론(用錢論)에 바탕을 둔 경세학을 탄생시켰다.

 

대동법은 조선후기 시행되었던 가장 합리적인 세법(稅法)이었다. 대동법은 토지 1결당 백미 12두만을 납부하게 하는 세법으로 그간 공물·진상·관수(官需)·쇄마(刷馬) 등 각종 명목으로 잡다하게 거둬들여 균등하지 못했던 조세를 형평하게 만든 것이다.

 

대동법은 이미 이원익한백겸의 건의로 1608년(광해군 원년) 경기도에 실시한 적이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확대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38년(인조 16년) 김육이 충청감사로 제수되면서 대동법 시행을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김육은 대동법의 실시가 백성을 구제하는 방편이면서 국가 재정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시책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이 국가 재정을 부족하게 만드는 세법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실제 운영에는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효종의 등극과 함께 김육이 우의정에 제수되면서 전기가 마련되었다. 김육은 효종에게 충청도와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고 대동법이야말로 곤궁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구민책이라 주장하였다. 결국 김집(金集, 1574-1656) 등 산림 출신들과 불화를 낳기도 했지만 결국 효종 2년 호서지방에서도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김육은 호서대동법에 만족치 않고 호남으로 확대실시를 꾀하였고, 호서대동법의 성공적인 시행에 힘을 얻어 1658년(효종 9년)에 호남지역에도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청풍 김씨 족보 <출처 : 실학박물관>

 

 

 

 

 

개혁가 김육의 확고한 믿음, 백성 구제

 

 

김육은 대동법 외에도 상평통보의 주조, 마차 및 수차의 제조와 보급, 새로운 역법(曆法)인 시헌력(時憲曆)의 사용 등 혁신적인 제도개혁을 주장하였고, 이 가운데서도 특히 대동법의 전국적인 시행을 필생의 사업으로 심혈을 기울였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도 전라도 대동법안을 유언으로 상소할만큼 강한 의지와 집념을 보였다.

 

김육은 1658년 향년 79세로 일기로 세상을 떴다. 부친의 유명을 받아 가문을 일으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실제로 그의 집안은 조선후기 명문 반열에 올랐다. 그의 아들인 김우명(金佑明)은 현종의 장인이 되었고, 손녀인 명성왕후는 숙종의 모후였다.

 

쓰러져 가는 가문을 일으키고, 극한 반대에도 대동법을 성공시킨 그의 일생을 보면, 그야 말로 집념의 화신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추진력은 독불장군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효종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김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金集)과 의견이 맞지 않자 김육이 불만을 품고 상소로 여러 차례에 걸쳐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그가 죽자 상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효종실록 효종 9년(1658년) 9월 5일자)

 

 

 

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글쓴이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발행일  2010.12.03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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