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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사 자료(인물)

[역사추적] 관우는 왜 조선에서 신이 되었나?

작성자미스터빈|작성시간09.04.26|조회수600 목록 댓글 0

 제17회: 관우는 왜 조선에서 신이 되었나?  
kbs 20090404   
        

[제17회]
관우는 왜 조선에서 신이 되었나?


▣방송 :2009. 4. 4 (토) 21:40~22:3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이완희 PD
▣글 : 정윤미 작가

 

소설 삼국지의 영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 관우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시대에 시작된 관우신앙은
궁중을 비롯한 서민들에게까지 이어졌는데...

소설 속 영웅 관우가 어떻게 신으로까지 모셔지게 되었는가?

관우는 어떤 사연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숭배하게 되었는가?

소설<삼국지연의>가 관우신앙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소설 속 영웅 관우, 신이 되다"
임진왜란 때 들어온 관우신앙
▲ 서울 사당동 남관왕묘

서울 사당동의 ‘남관왕묘’에는 삼국지의 영웅인 관우를 모시고 있다.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왕묘가 서울 시내에 어떻게 세워진 것일까?

"전일에 진 유격이 하처(下處) 후원(後園) 위의 구가(舊家)를 그대로 이용하여
관왕묘(關王廟)를 세우고 소상(塑像)을 설치하였는데 공역(功役)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4월 25일 4번째기사 -

선조 31년, 당시 진 유격은 명나라에서 파병 온 장수. 임진왜란 참전 당시 부상을 입고 회복된 뒤, 관왕묘를 지었다. 유격 외에도 명나라 장수들은 관우 덕분에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믿음으로 그들의 주둔지에 관왕묘를 짓는다. 명나라 황제까지 나서서 관왕묘를 짓는 것이 강요되고, 서울에 오늘날의 동묘가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관우를 숭배하는 낯선 외국의 신앙이 조선인들에게는 부정적으로 다가오는데...

“임금부터 어린아이까지 읽은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의 인기와 관우신앙의 확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정사를 바탕으로 각색된 소설이다. 청나라 역사학자 장학성은 <삼국지연의>를 칠실삼허(七實三虛), 즉 7은 사실 3은 거짓이라고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정사와 혼동했다. 이것에 대해 조선의 학자들은 크게 황당하고 무익한 책으로 보았다.

‘장비(張飛)의 고함에 만군(萬軍)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正史)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삼국지연의(三國志衍義)》에 있다고 들었다.’ 하였습니다.......
동승(董承)의 의대(衣帶) 속의 조서(詔書)라든가 적벽(赤壁) 싸움에서 이긴 것 등은 각각 괴상하고 허탄한 일과 근거없는 말로 부연하여 만든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2년 6월 20일 1번째 기사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연의>의 인기는 갈수록 궁중에서부터 백성들에게까지 크게 확산되었고, 이러한 인기와 더불어 소설에서 영웅으로 재탄생한 관우에 대한 관심도 커지게 된다. 그렇다면 왜 <삼국지연의>는 관우를 영웅으로 만든 것일까?
▲ 남원 관왕묘에 그려져 있는 적토마
소설 <삼국지연의>의 내용이 관우신앙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공자사당 3000개, 관우사당은 30만개”
관우를 신으로 만든 촉한정통론

▲ 중국 낙양의 관림 : 관우의 묘

중국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은 3000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은 30만개로 그만큼 중국인들의 관우숭배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관우는 어떻게 숭배의 대상에 오를 수 있었을까?

중국 송나라가 거란족의 위협을 받던 상황에서 한족의 자긍심과 전통을 대변한 사상이 주희로 대표되는 성리학 이었다.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은 성리학적 명분론을 바탕으로, 삼국시대를 재평가 하면서 유비가 건국한 촉나라가 중국의 정통왕조이며, 위나라는 비정통이라 규정했다. 이것이 바로 촉한정통론으로, 유비에게 충의를 다했던 관우는 더욱 높이 평가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반영된 것이 바로 조선인들에게도 사랑받았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이다.
처음에는 한 명의 장수에 불과했던 관우의 지위가 송나라 때는 무안왕, 관성제군 으로 점점 상승되어 청나라 때에는 관성대제라는 신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 <춘추>를 들고 있는 관우신상

“관우신앙, 국가의 제사가 되다”
왕권강화를 위해 관우를 모신 조선의 왕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어 있던 관왕묘는 숙종에 의해 새로운 관심을 받게 된다. 숙종 17년 2월, 선조 이래 처음으로 관왕묘인 동묘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평소에 내가 수정공을 사모함은 절의와 정충이 만고에 높아서이네.
광복에 마음 쓰다 몸이 먼저 갔기에 천추토록 열사들 가슴에 눈물 그득하네”
- 숙종이 동묘와 남묘에 걸어 놓은 시문 -

숙종은 관우를 경모하며 직접 시문을 지어 관왕묘인 동묘와 남묘에 걸어둔다.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신하들의 충의를 강조하는 자리로 관왕묘를 선택한 것이다. 숙종 이후 영조대에는 관왕묘 제사가 정식 국가의례로 편입되었고, 정조대에는 기존의 소사(小祀)에서 중사(中祀)로 격상된다. 왕권을 강화하고 신하들에게 충의를 강조하고자, 조선의 왕들은 관왕묘를 숭상한 것이다.
▲ 지금은 공원인 동묘 내의 관우상과 공사 전의 모습

“민간신앙에 파고 들어온 관우”
관우신앙의 위기와 변화

국가의 제사로까지 승격되었던 관왕묘 제사는 을사조약 이후 국권침탈의 상황에서 변화를 맞게 된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금지되고 사당들도 없어지게 된다.

"제7조 대보단 만동묘 숭의묘 동관묘 남관묘 북관묘
급지방(안동 성주 완도 남원 전주 개성 평양) 관묘의 제사를 폐지하고..."
-
<대한제국관보> '칙령 제50호 향사이정에 관한 건' (1908.7.23) -

그러나 민중들의 삶에는 더욱 가까워진다. 외세의 힘 앞에 나라가 위태로울 때, 영웅을 기다리던 염원이 관우신앙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실제 1920년에는 관우숭배를 바탕으로 한 관성교가 창립되기도 하였다.
현재 관우는 불교, 도교, 미륵신앙, 무속신앙에서 지존의 신들을 보호하는 수호신장으로 숭배되고 있다.
▲ 현재, 관우를 모시고 있는 강화 동관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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