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침략기 대한제국 독립 지지 … 빌헬름2세, 1902년 고종에 밀서
정상수 교수, 친서 원본 발견
“폐하가 오랫동안 통치해 축복받는 정부 되길 바라”
고종도 4년 뒤 밀서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성 알려
107년 만에 ‘봉인’이 풀린 황제의 밀서. 1902년 당시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1859~1941)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기원하며 고종 황제에게 보내려던 밀서가 처음 공개됐다. 1902년 7월 20일자로 작성된 이 편지엔 빌헬름 2세의 자필 서명과 함께 “(고종) 황제 폐하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통치해 축복받은 정부가 되길 바란다”는 내용이 담겼다. 편지는 당시 대한제국 주재 독일 영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보낸다는 점을 덧붙였다. 비밀리에 전달되는 ‘밀서’임을 밝힌 것이다.
당시 복잡한 국내외 상황 탓에 밀서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에 100여 년간 봉인돼 있었다. 동일한 내용의 빌헬름 2세 친서가 이듬해인 1903년 고종 황제에게 전달됐다는 독일 측 외교 기밀문서의 기록도 함께 발견됐다. 고종이 손에 쥐었을 그 밀서의 행방은 현재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정상수(45)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지난 8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에서 이 밀서를 발견해 28일 본지에 단독 공개했다. 밀서가 작성된 1902년은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의 즉위 40년, 탄생 51년이 되던 해다. 이를 기해 대한제국은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계획했다. 그해 1월 ‘영일동맹’이 체결돼 국제 정세가 요동치던 시점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특수한 이해’를 보장하는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독립이 더 위태로워지던 때다.
정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독일 황제의 밀서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적극 지지한다는 확신을 고종 황제에게 주기 위해 작성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빌헬름 2세의 밀서는 “독일제국과 대한제국의 관계가 앞으로 더욱 확고해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에 이어 ‘황제 폐하의 좋은 친구’라는 문구로 마무리된다.
빌헬름 2세의 1902년 밀서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같은 내용의 1903년 밀서는 고종 황제의 수중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황제는 이 밀서를 통해 독일 황제의 신뢰를 확인했기 때문에 1906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밀서를 빌헬름 2세에게 보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본지 2008년 2월 20일자 1면>
고종 황제의 문서는 현재 350여 건 전해지지만 외국의 국가수반으로부터 받은 편지는 한 건도 남아 있지 않다. 정 교수는 “이 밀서는 고종 황제의 독립외교가 나름의 결실을 맺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증거”라고 평가했다.
중앙일보 2009.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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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2세는 고종을 ‘왕’ 아닌 ‘황제’로 칭했다
고종에게 ‘부치지 않은’ 독일황제의 1902년 밀서
본지가 첫 공개한 1902년 독일황제 빌헬름 2세의 밀서는 고종황제의 독립외교 노력과 관련해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내년 국권침탈 100년을 맞는 시점에서 대한제국의 위상을 재평가할 수 있는 계기다. 빌헬름 2세는 밀서에서 고종을 ‘황제(Kaiser von Korea)’로 칭했다. ‘왕(Kοnig)’보다 격상된 고종과 대한제국의 위상을 분명히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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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 침탈의 위기 속에서 비밀스런 외교전을 펼쳤던 고종 황제(사진 왼쪽). 특히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던 독일과의 외교에 공을 들였다. 지속적인 외교전의 결과,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고종황제에게 밀서를 보내 “황제 폐하의 좋은 친구”임을 분명히 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했다. [중앙포토] | |
◆대한제국 독립외교의 재평가=빌헬름 2세 밀서는 잃어버린 역사의 실마리를 풀어낼 중요한 단서다. 1906년 고종황제는 을사늑약(1905)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며 독일 빌헬름 2세에게 극비리에 친서를 전하려 했다. 2008년 2월 20일 본지 단독보도를 통해 알려진 이 고종 황제 밀서는 을사늑약의 국제법 상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한 중요한 자료다. 그런데 고종 황제가 왜 굳이 독일 황제에게 밀서를 보냈는지는 의문으로 남았다. 하지만 1902년 ‘빌헬름 2세 밀서’의 존재를 생각하면 그 의문이 풀린다. 고종 황제는 빌헬름 2세로부터 이 밀서를 통해 대한제국 독립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독일에게 대한제국 독립의 수호자이길 기대했던 건 결과적으로 ‘외교적 패착’일 수 있다. 독일은 당시 한반도에 절대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고, 결국 1차 대전의 패전국이 됐기 때문이다. 독일은 1902년 초 ‘영·일 동맹’이 체결되자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맞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후원하는 나름의 외교적 계산을 한 셈이다.
역사적 결과론과 별개로 대한제국의 독립외교 노력은 나름의 평가를 해 줘야 한다는 게 정 교수의 주장이다. 정 교수는 “1900년대 초 독일 공사로 파견된 민철훈(1856~?)은 독일어에 능통했던 반면, 같은 시기 독일 주재 일본 공사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며 “대(對) 독일 외교전에서 대한제국이 일본보다 앞섰기 때문에 고종황제와 빌헬름 2세 사이에 밀서가 오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광무개혁을 추진한 고종황제는 ‘어학이 국력’이란 생각으로 관립 덕어(德語·독일어)학교 등 일종의 ‘외교 아카데미’를 키우는데 노력했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자립 외교가 좀 더 지속될 수 있었다면 이후 역사의 향방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해석이다.
◆고종 비자금의 행방은?=1902년 빌헬름 2세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이듬해 동일한 내용으로 고종황제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1903년 4월 부임하는 대한제국 주재 독일 변리공사 콘라트 폰 잘데른을 통해 밀서를 전달한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밀서 전달이 한 해 늦어진 것은 1902년에 계획된 고종 즉위 40년 기념식이 조선의 콜레라 창궐 등 여러 이유로 연기, 축소됐기 때문이다.
밀서를 전달한 인물이 잘데른이기 때문에 또 하나의 의문도 풀린다. 잘데른은 1903년 말 고종이 독일 베를린에 있는 디스콘토 게젤샤프트 은행(훗날 도이체방크에 병합)에 거액의 내탕금(內帑金·임금의 개인 재산)을 예치하도록 도왔다. 독일 황제의 밀서를 가져온 사신을 고종 황제가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고종의 비자금은 당시 돈으로 100만 마르크(현재 추정 가치 500억 원). 1908년 일제가 고종의 비자금을 압수할 때 잘데른은 “훗날 고종황제의 사절에게 넘기라”며 비자금의 액수를 절반으로 줄여 보고한다. 그러면 고종의 나머지 비자금은 어디로 갔을까? 빌헬름 2세의 밀서를 통해 궁금증이 커져가는 역사 미스터리의 또 한 장면이다.
중앙일보 2009.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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