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
|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 마태복음 5:17-48 요절/ 마태복음 5:48 | 2020.4.12 |
마태복음 7강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께서 삼일만에 살아나사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부활절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40일간 지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활신앙과 하나님 나라 소망을 심으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순절에 오셨고 교회를 탄생시키시고 놀라운 구원역사를 이루셨고, 코로나19 사태 가운데서도 구원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부활절부터 성령님이 오신 날까지의 50일간은 기쁨의 부활시즌입니다. 우리가 이 기간에 예수님의 부활을 깊이 묵상하며 부활신앙과 부활권세를 덧입고 부활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율법의 참된 의미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천국 백성으로 부름 받은 제자들은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겠습니까? 자연세계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연법칙대로 움직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있지만 자연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하나님의 권능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피조물인 인간도 감정과 욕심을 좇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양심에 희미하게 남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서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연약함과 허물이 많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 질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말씀에 대한 자세를 새롭게 함으로서 마음의 변화를 받고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율법은 모세오경을, 선자자는 선지자들이 기록한 말씀 다시 말해 여호수아서부터 말라기까지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모세오경 즉 율법을 중시했고 그 율법을 준행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많이 달랐습니다. 팔복 말씀은 이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말씀이었습니다. 서기관들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위급한 환자가 있어도 죽지 않을 정도로 응급처치만 하고 안식일이 지난 후에 치료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지만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매일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렸습니다. 율법을 존중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동을 보며 이 사람은 율법을 폐하러 온 혁명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율법을 무효화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담긴 궁극적인 의미를 밝혀서 온전하게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율법의 작은 말씀이라도 폐하여지지 않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진리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 같이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일컬음을 받습니다. 반면에 작은 계명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크다고 일컬음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작은 부분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배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율법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고 타의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글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모세오경을 암송했고, 그 율법대로 살고자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을 정했습니다. 그 중에는 안식일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정했는데 약 1킬로미터입니다. 모세오경에 기록된 율법은 613가지입니다. 장로들은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많은 세칙들을 만들었고, 그런 전통을 어찌하든지 지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의’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는 칭의가 아니라 율법을 행함에 있어서 의입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완벽하게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에 담긴 정신이나 참된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켰는가, 지키지 못했는가만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보다 율법에 담긴 정신과 참된 의미가 더욱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창시자요 수여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율법을 해석하신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새롭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십계명 중에서 여섯 번째 계명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22) ‘라가’라는 말은 아람어로 ‘텅 빈’이란 뜻으로 골 빈 놈, 돌대가리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놈’은 바보라는 욕설로 예수님 당시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욕설은 마음 속의 미움과 분노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음 속에 분노가 가득하면 욕을 하고 폭행하고 결국에는 살인까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노하며 욕을 하는 것을 살인에 해당하는 죄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도 형제에 대한 미움은 곧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습니까? 아벨에 대한 미움과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면 말과 행동이 거칠어집니다. 작은 허물에도 화를 내고 욕을 합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면 큰 잘못과 실수도 용납되고 감당해 줍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겉으로 나타난 살인행위만 심각한 죄로 인식했습니다. 행위로 살인하지만 않으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음의 살인, 말로 하는 살인도 심각한 죄로 여기고 그 죄에서 벗어나도록 도우셨습니다. 천국 백성 된 예수님의 제자는 살인 뿐 아니라 마음 속의 미움과 분노까지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 속에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마음에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이며 결코 천국을 맛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냐에게 상처준 것만 기억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모욕감을 주어서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형제에게 무시하는 말을 하고 그 일로 인해 화를 내면 “그 만한 일로 화를 내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일이 있는가? 돌아보도록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이 일은 매우 힘들고 번거로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물을 드리다가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갈릴리에 갔다고 다시 돌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많은 수고와 노력이 들더라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줍니다. 만일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데도 그 문제를 방치해두면 어떻게 될까요? 형제의 마음에 분을 일으켜서 폭력이나 살인과 같은 죄를 짓도록 하든지, 분한 마음에 괴로움을 당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형제를 괴롭게 하면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겠습니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적극적으로 형제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과도 화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분노뿐만 아니라 형제의 마음 속에 있는 원망까지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자도야말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문자적으로만 지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간음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십계명 중 일곱 번째 계명입니다. 남의 아내와 간음하면 반드시 둘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레20:10). 사람들은 간음을 심각한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드라마에서 불륜을 행한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 사람들은 내로남불일 때가 많습니다. 간음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합니다. 아내도 사랑하고 애인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밀회를 통해 인생의 재미를 찾고자 합니다. 하지만 간음을 하면 자신의 몸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아내와 자녀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간음을 행한 자는 돌로 쳐 죽여서 그 죄가 퍼지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마음 속에 음욕을 품어도 실제로 간음만 행하지 않으면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속에 간음을 행하는 것을 실제 간음을 행하는 것과 똑같이 취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있는 탐욕스러운 생각과 시선까지도 엄중하게 금지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고, 성은 부부라는 틀 안에서만 허락하셨습니다.
음란동영상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호기심으로 자주 보다가 마음에 음란한 생각이 가득 차게 됩니다. 여자들을 볼 때 음란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다가 혼자 걸어가는 여자들을 보고 성추행을 하기도 합니다. 욕심을 채우려다가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음란한 생각이 들어올 때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로마서 8장 6절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씀합니다. 생각의 복음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말씀묵상과 암송이 특효약입니다. 우리가 음란이 지배하는 시대에 말씀의 힘으로 생각의 복음화를 이루어가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눈과 손은 유혹의 첫 관문입니다. 예수님은 눈이 노출된 신체를 보고 음욕을 품게 한다면 “빼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른 손이 실족하게 하거든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찍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짓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의 몸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눈과 손이 성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눈을 빼어 버리고 손을 잘라버린다고 음욕이 사라집니까? 불구의 몸으로도 음욕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음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을 유혹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그 시초부터 완벽하게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개척역사를 섬길 때 한 학생이 오늘의 말씀 앞에서 음란물을 즐기는 죄를 소감을 써서 회개하고, 죄를 짓게 만들었던 음란비디오를 망치로 깨서 없애 버렸습니다. 그 후로 그는 순결하고 능력 있는 목자가 되었고, 훌륭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가 보편화되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우습게 생각하고 커피를 마시듯이 죄를 즐깁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천국이 임할 수 없습니다. 천국 백성은 죄를 멀리하며 거룩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오른 눈과 오른 손은 우리 몸의 중요한 지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죄를 짓게 한다면 빼어 버리든지, 찍어 버려야 합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죄를 짓게 한다면 제거하거나 제동을 걸어 놓아야 합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환경이나 세상친구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이런 분명한 결단이 있을 때 천국을 누릴 수 있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맹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헛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은 지키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맹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짓말을 자주해서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말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맹세를 합니다. 맹세는 구속력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연약해서 맹세를 잘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 백성 된 제자들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진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진실한 삶을 통해서 맹세를 하지 않아도 말과 행동을 신뢰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정직하게 말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야 겠습니다.
38-42절은 보복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입니다. 레위기 24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하라.” 이 법의 목적은 남을 해치는 것을 미리 막고자 함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면 악한 자가 두려워하여 함부로 악을 행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악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사회든지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형벌을 가합니다. 훔치면 옥에 가두고, 사람을 죽이면 사형을 시킵니다. 중국에서는 공개처형을 해서 악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필리핀에서는 코로나 자가 격리 규정을 어긴 자를 사형시켰습니다. 이렇게 하면 악이 제거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해도 악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악을 막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복을 하면 원한만 더욱 깊어집니다. 무협지를 보면 자기 자식에게 “내 원수를 갚아다오” 하며 유언을 남깁니다. 보복 대신 선을 행해야 합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야 합니다. 나에게 모욕을 주는 자에게 똑같이 갚아주고자 하는 마음을 다스리고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해야 합니다. 악을 선으로 대할 때 악인이 부끄럽게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미움과 증오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악은 악으로 없앨 수 없고 선이 악을 이깁니다. 무한한 용서와 사랑만이 악을 제거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까? 내면에 역사하던 미움과 증오심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사랑 때문에 내면에 역사하던 미움과 증오심이 사라졌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천국 백성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용서의 사랑으로 품어줍니다. 분이 나고 마음이 상할지라도 분풀이를 하지 않고 마음을 할퀴는 독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말, 감사의 말, 축복의 말을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한 영혼을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43-48절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웃조차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 백성 된 제자들에게 이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할 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악인들을 볼 때 “벼락 맞아 죽을 놈”이라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악인들조차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한 가룟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병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이기적인 세리들도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에게만 문안하고 관계가 불편한 사람들은 모른 체 한다면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놀라운 말씀을 주십니까? 4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흠도 없고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처럼 제자들도 온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이상으로만 품고 있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천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힘써 배우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감으로서 온전한 사람이요 성숙한 천국 백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