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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마태복음 제 11 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작성자정이삭|작성시간20.05.18|조회수49 목록 댓글 0

2020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 마태복음 7:13-29 요절/ 마태복음 7:13-14

2020.5.17

마태복음 1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우리는 지난 몇 주간 예수님의 주옥 같은 말씀, 산상수훈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천국백성의 헌장인 산상수훈을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문과 두 종류의 건축의 비유를 통해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 앞에는 좁은 문과 넓은 문,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생명을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삶의 현장에서는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진중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한 말씀이라도 순종하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의 말씀, 복음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참 제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 넓은 문과 넓은 길은 인생에 대한 비유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좁고 협착한 길이 나옵니다. 반면에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길이 나옵니다. ‘좁다’는 것은 불편하고 힘들다는 의미이고, ‘넓다’는 것은 쉽고 편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불편하고 힘든 길보다는 쉽고 편한 길을 선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까?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이요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뜻을 이루고 자기 욕심대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자기의 뜻과 욕심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 없이 세상 유행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한 말씀은 받아들이고 부담스러운 말씀은 배척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항상 자기 욕심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얻고자 했습니다. 결국에는 소돔 땅에 정착해서 살다가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때문에 겨우 구원을 받았습니다. 롯처럼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말씀에 얽매이지 않고 편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쾌락과 잔재미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에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말씀에 붙들려 살기 때문에 불편하고 손해와 희생이 따릅니다. 하지만 좋은 열매가 맺히고 결국에는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의 길이 힘들기 때문에 도중하차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이 좋아서 성경공부와 예배에 나오지만 말씀 때문에 자기 희생이 따르게 되면 부담을 느끼고 세상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힘든 길이기에 인기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들 중에 청년의 때에 양들을 돌보기 위해 물질과 청춘을 희생한 분들이 많습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그 시절을 양들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았더라면 세상에서 크게 성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내는 것보다 한 영혼을 살리는 데 인생을 걸었습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에 청춘을 드렸습니다. 이런 목자들의 희생을 통해 많은 생명들이 살아났고 세계선교 장막터가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이 자라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언제까지 희생해야 되는가 좀 쉬고 싶다하는 마음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이 제자의 삶보다 더 좋아 보이고 자기 중심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성경공부와 기도와 예배보다 가정생활과 직장생활과 취미생활에 더 많은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좁은 문은 인기가 없고 많은 희생이 따르지만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멈추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느 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매순간 선택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니까 그 길은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적을지라도 이 길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확신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결국 생명을 얻고 현재의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들은 넓은 문과 넓은 길로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역사를 방해하고 백성들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가르치기만 하고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목자로 부름받은 우리도 가르치기만 하고 가르친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참과 거짓을 판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양들을 노략질하기 위해서 양의 옷을 입고 교회에 들어옵니다. 얼핏 보면 그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 따릅니다. 우리나라에 신천지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기 위해서 듣기에 좋은 말만 합니다. 축복과 번영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부담스러운 회개의 메시지는 전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을 양산합니다. 구약성경에도 이런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들은 주로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촉구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축복과 평안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20) 겉모습이나 아름다운 말로 자신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성품과 행실의 열매는 꾸밀 수 없습니다. ‘너도밤나무’와 ‘나도밤나무’가 있습니다. 두 나무는 밤나무와 흡사하지만 열매는 전혀 다릅니다. 이처럼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삶과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나타나는 열매는 거짓과 교만과 불순종과 허영심과 탐욕과 같은 나쁜 열매입니다. 반면에 참 선지자의 가르침을 통해서 나타나는 열매는 겸손과 순종과 충성과 온유와 인내와 절제와 기쁨과 평안과 사랑과 같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좋은 나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순종합니다. 다시 말해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서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 없이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못된 나무입니다.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고 결국에는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열매를 보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20).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좋은 열매는 구원의 열매이고 성령의 열매이며, 제자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며 예수님의 성품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며, 내가 또 하나의 생명을 낳고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참 포도나무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을 힘써 배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좋은 양이 되고 좋은 제자가 될 때 좋은 열매를 자연스럽게 맺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해지고 나의 삶이 풍성해집니다. 더 나아가 코로나19로 인해 불안과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생명의 구주 예수님께 인도할 뿐 아니라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21-23절은 진정한 제자가 누구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로마서 10장 13절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주여, 주여” 라고 부르는 사람은 분명 자신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뿐인 신앙과 참된 제자도를 구분하셨습니다. 말만 있고 진정한 믿음이 받쳐주지 못한 자들은 참 제자가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진정성을 갖고 부르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 하고 입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능력이 많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날’은 마지막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날에 심판자가 되십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는가” 하는 기준에 의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많은 능력이 자신의 구원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사람들을 보면 당연히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방언과 예언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겠는가? 특별한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이런 은사를 사모하며 체험해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생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내면이 답답할 때 뭔가 신비한 체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인생 속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나타내시기도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목자님은 기도를 통해 종양이 사라져 수술하지 않고 나음 받은 체험을 했습니다. 놀라운 신유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그러나 신비한 능력이나 초자연적인 기적이 신앙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요 순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놀라운 일을 하여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은 사람은 천국백성으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입니다. 주님이 나를 알아주셔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안다고 백번을 말해도 주님이 나를 모른다고 한 번 말하시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주님이 나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제대도 알 때 제대로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행함으로 나타나고 열매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주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데 더욱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4-27절은 두 종류의 건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나의 이 말’은 산상수훈을 가리킵니다. 산상수훈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습니다. 반면에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집을 지었습니다. 한 사람은 기초를 반석 위에 놓았고,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두 집은 외견상 별로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자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은 여름이 건기이고 겨울이 우기입니다. 한 해 동안 거의 비가 내리지 않다가 겨울이 되면 폭우가 쏟아집니다. 한 순간에 물이 범람하여 집들을 덮칩니다. 이때 기초가 약한 집들은 무너지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물살에 휩쓸려 갑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홍수와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집을 지었는가입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었는가? 아니면 반석 위에 집을 지었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집이 무너지기도 하고 무너지지 않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왜 모래 위에 집을 짓습니까? 쉽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땅을 깊이 파지 않아도 됩니다. 돈과 시간이 적게 들어갑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려면 반석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파야 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은 힘이 들고 돈과 시간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현재만을 생각하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며 집을 짓습니다. 당장은 힘들고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지만 장차 올 홍수를 대비해서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주추를 놓습니다. 이렇게 지은 집은 비가 오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인생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집을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워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인생관, 가치관, 사명관, 역사관, 결혼관, 물질관, 직업관 등을 정립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유행이나 유혹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시련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은 죽음입니다. 죽음의 광풍이 몰아칠 때 기초가 약한 인생은 무너져 버립니다. 하지만 기초가 튼튼한 인생은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저는 질병과 입시실패와 가난의 환란 앞에 인생의 집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저를 모든 시련에서 건져내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를 구원하시고 생명구원역사에 부르시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심판의 날에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성공했는가? 얼마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명예를 얻었는가? 하는 것으로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했는가 아니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으로 평가하십니다. 산상수훈 말씀을 듣고 행한 사람은 생명으로 인도되지만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집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가 생명이냐 죽음이냐를 결정합니다. 우리 앞에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넓은 문이 아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2020 마태복음 11강 메시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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