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주일메시지

2020 마태복음 제 13 강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작성자정이삭|작성시간20.06.01|조회수30 목록 댓글 0

2020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8:18-34 요절/ 마태복음 8:26

2020.5.31

마태복음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코로나19의 상황은 우리에게 큰 위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소풍가듯이 즐거운 마음으로만 따를 수는 없습니다. 꽃길만을 걸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제자가 되려면 고생하고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가시밭길이라도 포기치 않고 걸어가고자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제자도란 무엇인지 생각하고 코로나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끝난 저녁에 사람들이 데려온 귀신들린 자들,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환영하지 않고 배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소수의 제자들을 양육하는 데 집중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서기관은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입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했는데 본문의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감동되어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는 좋은 제자후보감으로 보입니다. 우리 목자들은 이런 양을 보면 환영하고 커피라도 대접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환대하지 않고 찬물을 끼언는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는 서기관이 제자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이상적인 생각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이 아닌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율법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함으로 학문적 욕구를 채울 수 있고, 말씀의 능력을 덧입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자기 목적을 충족시킨 후에는 자기 길을 갈 것입니다. 그에게는 제자로서 기본적인 자세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주님이란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구주이시오 영원토록 따르며 섬겨야 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학문적 이상이나 자기 꿈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인기와 명예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제자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는 것이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결단이 없다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머리를 둘만한 장소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집이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박해를 당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안정된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고난 받을 각오,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자기 이상과 꿈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분명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프란체스코는 중세 때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었을 때는 향락을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기사가 될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세 때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해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청빈한 삶을 살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 분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모든 것을 팔아도 아깝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영생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바울 목자님은 유럽선교여행을 통해 선교사의 삶이 밭에 감추인 보화가 같은 것임을 깨닫고 법원직 직장을 버리고 슬로바키아로 갔습니다. 김베드로 목자님은 목자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족들과 친구들을 버리고 춘천으로 왔습니다. 문이사야 목자님은 서울에서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있었지만 제자요 목자로 살기 위해서 춘천에 남았고 이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상적인 생각만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고 고난과 희생을 각오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제자 중 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는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주여라고 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제자로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보다 아버지를 장사하는 일을 더 우선시하고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부친을 장사지낸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1세기 유대사회에서 부모의 장례를 치루는 일은 율법의 어떤 의무보다 우선하는 최고의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먼저 무엇을 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여기서 앞의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뒤의 죽은 자들은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는 먼저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을 보면 죽은 자들 장사할 사람이 충분하다면 토라를 배우는 학생은 장례 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국가의 중요한 사명을 떠맡은 사람이나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는 부모가 돌아가시더라도 자신이 맡은 사명을 끝까지 감당합니다. 이것은 장례를 치루는 일보다 사명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가족에 대한 그 어떤 의무보다 우선하는 일입니다. 학업이나 직장의 일보다도 우선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을 얻고 난 후에, 또 어떤 사람은 자기 꿈을 성취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 어떤 일보다 제자의 삶에 최우선권를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에 대한 연민이나 자기 이상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한 훌륭한 제자 후보가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사랑하였고 복음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고생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몇 년 동안만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린 후에 제자생활을 하겠다고 말하고 떠났습니다. 그는 좋은 직장을 얻어서 빠르게 승진했습니다. 그러다가 골수암에 걸려서 어머니도 봉양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에게 최우선권을 두고 따르지 않는 것을 후회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따른다는 명분 때문에 부모에 대한 의무를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섬겨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를 섬기는 일이 예수님을 섬기는 일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며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최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 오를 때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저녁에는 광풍도 없고 바다가 잔잔하기에 항해하기에 좋았습니다. 제자들은 오래만에 예수님과 함께 휴가를 즐기게 되어 갈릴리처녀노래를 부르며 기분을 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는 잔잔한 갈릴리 바다를 미끄러지듯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바다 한 가운데 왔을 때 갑자지 큰 놀이 일어났습니다. ‘큰 놀은 아주 사나운 풍랑을 말합니다. 풍랑으로 인해 배는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았습니다. 엄청난 파도가 배를 덮쳤습니다. 배 안은 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위기상황 앞에서 어부 출신인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거친 풍랑을 헤쳐 나가고자 사력을 다 했지만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거대한 바람과 파도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죽게 되었다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파도 소리와 제자들의 울부짖음도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단잠을 주무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아셨기 때문에 광풍 앞에서도 요동함이 없으셨습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신뢰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만 바라보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하는 항해와 같습니다. 항해 길에는 때로는 먹구름이 끼고 비고 오고 파도가 칩니다. 폭풍이 일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도 예기치 못한 사고와 실패와 질병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의 삶에도 견디기 힘든 폭풍우가 몰아칠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시고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피하게 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힘든 상황이 닥치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주님이 정말로 함께 하시는가 하며 의심합니다. 주님이 나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 같아 낙심합니다.

 

  두려움과 의심과 낙심의 광풍이 몰아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자들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주님, 죽게 된 우리를 왜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은 절망 가운데서 예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주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은 도와 주십니다. 예수님은 흔들어 깨우는 제자들로 인해 단잠에서 깨어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예수님은 다 죽게 된 제자들을 위로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믿음이 작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능력이 없다고, 실수가 많다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작을 때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의심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낙심에 빠집니다.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과 염려를 물리치고 평강과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의심과 낙심은 없어지고 확신과 도전정신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은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생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매순간 주님이 주신 사명을 붙들고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먼저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해 주시고 자녀들도 축복해 주십니다. 위기상황에 직면할 때 그 사람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코로나19 위기상황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인지 죽은 믿음인지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셨지만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 항해 속에서 선장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기 위해서 예기치 못한 광풍훈련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문제로 훈련하시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문제로 훈련하시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인간관계문제로 훈련하십니다. 이런 훈련들을 피하기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믿음이 커지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신 후 예수님은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향해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그러자 사납게 뛰놀던 풍랑이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바람과 바다는 즉각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자들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예수님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잠재우고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셨습니다. 이곳은 이방인들의 거주지요,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황무지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배에서 나오자 귀신들린 두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귀신들렸다는 것은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존재하는 것처럼 귀신도 실제로 존재합니다. 귀신은 사단에 속한 악한 영들입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영혼은 귀신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귀신들은 더러운 곳을 좋아합니다. 대부분 귀신들린 사람을 보면 더럽고 냄새가 납니다. 그 내면은 더러운 생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성령은 깨끗하고 정결한 곳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의 내면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귀신들이 좋아하는 더러운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무덤은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음산한 곳입니다. 그들은 몹시 사납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귀신은 귀신같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았지만 경배하지 않았고, 관계성을 맺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멸하러 온 줄 알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버려두고 떠나가기를 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면 반발하고 적개심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그 사람 안에서 귀신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관계성을 맺기를 거부합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의 권세에 눌려 그 사람들에게서 나가고자 했습니다.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예수님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은 즉시 나와서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들판에서 조용하게 먹고 있던 돼지들은 귀신들이 들어오자 미쳐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고열로 견딜 수 없어서 바다에 뛰어들어 몰사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고 온전케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귀신은 인간의 고귀한 성품을 파괴하고 영혼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합니다. 죄에 매어서 살아가게 하고 결국 멸망하게 합니다. 이런 귀신의 역사로 말미암아 수많은 영혼들이 죽임을 당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때 귀신의 세력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은 말씀의 권세를 통해서 귀신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2천 마리의 돼지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이를 본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이 살아나는 것보다 2천 마리의 돼지가 더 소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소중하고 값진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생활에는 고난과 희생이 필수적입니다. 우리 모두 제자로서의 부르심을 새롭게 하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사람을 돌보는데서 끝나지 않고 한 사람을 제자로 양육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함께 섬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첨부파일 2020년 마태복음 13강 메시지.hwp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