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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메시지

2020 마태복음 제 14 강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작성자정이삭|작성시간20.06.08|조회수51 목록 댓글 0

2020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마태복음 9:1-17 요절/ 마태복음 9:13

2020.6.7

마태복음 14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여러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침받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인관계가 잘 풀리길 원합니다. 학생들은 학기말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평생을 함께 할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를 소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고자 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주고자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주고자 하는 것을 받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본 동네 가버나움에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불치병인 중풍병도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하시고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불안해하는 그에게 평강과 위로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중풍병자는 병 낫기 위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네 병이 나았다말씀하시지 않고 죄 사함을 선포하셨을까요? 이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중풍 병에서 고침 받는 것보다 더욱 시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병과 죄는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죄를 지어서 병이 찾아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침상에 누운 채 나온 것을 보면 그의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그가 중풍 병에서 고침을 받는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보면 중풍 병에서 고침을 받았어도 내면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예전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전에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생각으로만 죄를 지었지만 고침을 받은 후에는 몸을 움직여 죄를 지을 것입니다. 변화되지 못한 옛습관 때문에 중풍 병이 재발할 것입니다. 다이어트를 해도 생활습관이 바뀌지 않는다면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양구를 홍보하는 표어 가운데 하나는 양구에 오시면 10년은 젊어집니다입니다. 우리는 10년만 젊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지금과 다른 삶을 살게 될까요?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은 채 10년 전으로 돌아가면 10년 후에도 현재와 똑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중풍병자의 근본문제는 중풍 병이 아니라 죄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될 때만이 변화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근본문제인 죄를 사해 주신 것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허물을 사함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32:1,2) 돈과 권력과 명예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생충 영화에 등장하는 반지하방에 거주할지라도 죄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가장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로서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인간이 죄 사함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보았고,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으로는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예수님을 자기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다면 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능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두 가지 모두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생각한다면 중풍병자를 걷게 하는 것이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하신 후에 중풍병자를 일어나서 걷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알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이 일보다도 놀라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죄인일지라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구주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에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더라도 죄 문제만 해결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고 기쁨과 희망이 넘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을 하고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음성을 듣고 죄로부터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진실하게 고백하면 주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1:9).

 

  예수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9) 이는 실로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마태의 본명은 레위입니다.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섬기라는 뜻에서 아들에게 레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는 부모의 기대와는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로마 정부에 고용된 관리로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세리직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 정부를 위해서 일하는 세리들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고 있을 때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태는 돈을 따르고 탐욕을 따름으로서 부자가 되었고 큰 아파트에서 안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많을수록 그의 죄도 커졌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온통 이기적인 세리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만한 친구가 없었습니다. 가족들도 그를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점차 그는 자신의 인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것을 얻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습니다. 마태는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죄의 세력은 강했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태의 아픔과 절망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정죄의 눈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긍휼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마태야,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세관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세관의 자리는 마태에게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죄를 품고 있으면 어떤 환경에 있어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또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마태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아무도 마태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찾아오는 자들은 같은 세리들과 죄인들뿐이었습니다. 마태는 율법을 범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는 정죄의식으로 시달렸습니다. 사람들을 갑질하고 착취한 것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는 죄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말씀으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열두 제자의 한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것도 큰 은혜인데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더 큰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마태에게 큰 소망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통하여 이기심과 탐욕에 빠진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망대로 마태는 하나님의 긍휼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고, 역사에 빛을 발하는 위대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마태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으면 욕을 먹어도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생활의 염려에서 벗어나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세상 쾌락과 잔재미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이 부르시자 망설이지 않고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에게는 결단력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통회할 뿐 아니라 잘못된 삶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마태는 받은 은혜가 커서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돈을 아끼지 않고 음식을 풍성하게 차렸습니다. 식사 교제는 참으로 은혜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그 광경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공동체를 오염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한 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라며 낙인찍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죄인에게 어떤 소망도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말을 들으시고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예수님은 유대 격언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셨습니다. 건강한 자는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고 병든 자가 의사를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건강한 자는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병든 자는 세리와 죄인들을 지칭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대로 살고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자신들은 죄가 없는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죄인들은 율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정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했고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애통하였습니다. 의로운 심정이 가득했던 바리새인들은 이런 죄인들을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죄로 병든 자들로 보셨습니다. 죄로 병들어서 욕하고,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율법대로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런 병든 내면이 고침받기만 하면 건강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의사는 병든 사람들을 보고 왜 이렇게 병들었느냐 책망하지 않습니다. 병만 치료하면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치료해줍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치료받아야 할 영적인 환자로 보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고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셔서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탁월한 의사이십니다. 어떤 자라도 예수님께 나가면 죄로 인한 영혼의 병에서 고침을 받고 건강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병에서 고침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이 병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의사에게 자신의 병든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죄로 병든 자신을 깊이 인정하고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께 죄를 고백하고 치료해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죄 사함을 베풀어주시고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해주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성경의 깊은 뜻 특히 호세아서 6:6의 의미를 배우라고 하십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호세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식적인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어찌하든지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과 긍휼을 알 때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그들을 친구 삼으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고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부르러 오셨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자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하는 자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죄인들에게 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병든 사람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 외로움으로 고통하는 사람들, 죄책감과 정죄의식으로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부른다는 것은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는 구주가 필요합니다. 죄 사함의 권세자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들의 유일한 구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예수님께 들고 나가기만 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생명을 주시고 천국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놀라운 축복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새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새 부대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생각을 가리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져 둘 다 못 쓰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 시대의 축복들을 담기 위해서는 낡은 마음과 낡은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예수님이 가져오신 놀라운 복들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기 때문에 의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의인심정이 충만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죄 사함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죄로 병들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애통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고 죄 사함의 복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첨부파일 2020년 마태복음 14강 메시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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