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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마태복음 제 18 강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작성자정이삭|작성시간20.07.06|조회수496 목록 댓글 0


2020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말씀/ 마태복음 12:1-21 요절/ 마태복음 12:20

2020.7.5

마태복음 18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코로나19로 인해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져 살아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또한 강자는 살아남지만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국가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더 많이 돌보게 되었지만 여전히 소외되고 돌봄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절망적인 시대에 우리가 누구에게 희망을 두어야 하는가를 알려 줍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구주요 목자이십니다. 이 예수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코로나19도 이기고 어떤 시련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밀밭 사이로 가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늘 배고팠던 제자들은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비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남의 밀밭에서 밀 이삭을 허락 없이 잘라 먹어도 될까요? 신명기에 의하면 낫을 대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손으로 이삭을 잘라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23:24,25). 포도원에 들어가서도 그릇에 담지만 않으면 배부르게 따 먹을 수 있었습니다.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가난 때문에 굶주리지 않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를 볼 때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멀리서 예수님의 일행을 주시하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행동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법을 어긴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당시 할례와 안식일 준수는 유대교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유대교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을 준수하기 위해서 인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을 정했습니다. 그 중에는 밭갈이, 파종, 수확, 건물을 짓거나 부스는 일, 바느질, 빵 굽는 일, 불을 켜는 일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힘이 들 정도로 무거운 짐을 들거나 1킬로미터 이상 걸어도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한 규정에 의하면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요,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탈곡이요, 입으로 부는 것은 키질에 해당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할례와 안식일을 철저하게 준수함으로서 강하게 침투해 들어오는 헬라의 세속문화로부터 유대교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엄격하게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준수합니다. 안식일에는 식사준비도 하지 않고 승강기 버튼도 누르지 않습니다. 안식일에는 전쟁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할례와 율법을 어찌하든지 지키고자 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유대교가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 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절대적으로 지키는 비율은 상당히 낮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일성수를 하지 않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예배 형태가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굳이 힘들게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는 것이 더욱 감동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교제하고 성찬과 예찬을 나누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예배를 경시하고 절대적으로 드리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기독교 신앙이 약화될 것입니다. 주일공동예배는 신자들의 삶의 원천이며 교회 공동체 모든 활동의 목표요 최고의 가치입니다. 주일예배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와 예배공동체의 모습은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지 아닌지를 잘 보여줍니다. 건강한 교회는 신자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고, 신자들이 예배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고자 한 것은 잘 했지만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하지 않고자 한 것은 잘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더라면 배고파 밀 이삭을 따먹은 제자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어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사무엘상 21장을 보면 다윗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사울을 피해서 놉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며칠 동안 먹지 못해서 몹시 배고팠고,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먹을 것을 구했습니다. 아히멜렉에게는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주지 않으면 굶어죽기 때문에 아히멜렉은 진설병이라도 주어 살게 했습니다. 다윗과 제사장 아히멜렉은 성전 법을 어겼지만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법보다 생명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응급환자를 실은 구급차가 교통법규를 초월해서 달리는 것도 법보다 생명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로서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향을 피운 후에 기도를 합니다. 그들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일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안식일이라고 해서 제사장들이 일을 하지 않고 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백성들은 죄사함을 받을 수도 없고 안식을 얻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심으로서 인간의 죄를 위해서 드리는 모든 제사를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분이시오, 눈에 보이는 성전을 대체하시는 새로운 성전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예수님은 호세아 66절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제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데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헌신된 종교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드리는 수많은 기름진 제사는 하나님이 받을 수 없는 헛된 제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자비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얽매여 있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십니다. 죄에 얽매이고 인생의 무거운 짐에 눌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주어서 참된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알고 예수님 안에서 주일을 보내면서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또한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주일을 보내야 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십니다(8).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안식일은 예수님 중심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후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신약시대에 신자들이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게 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참된 안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죄사함의 은혜와 모든 억눌림에서 자유롭게 해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는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오른 손이 말랐다고 했습니다. 한 손이 마르면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은 한 손 마른 것 때문에 열등감과 자의식이 심했을 것입니다. 그는 한 손 마른 것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한 손 마른 사람의 인생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정한 규례대로 안식일이 지켜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고자 질문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생명이 위태롭지 않으면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위험이 있을 때에는 죽지 않을 정도만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도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는데 하물며 양보다 귀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생명을 살리고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손을 내밀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손을 내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 자신의 치부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싶겠습니까? 저도 몇 주 전에 치질로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치부를 보이기 싫어 의사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몇 날을 버티다가 많은 기도 가운데 저의 연약함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의사에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술하지 않고, 약의 도움과 말씀과 기도의 힘으로 나을 수 있었습니다. 자의식과 열등감이 심한 사람일수록 치부를 내놓기가 어렵습니다. 어릴 적 사고로 한 손이 마른 한 형제는 마른 손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악수를 청하면 왼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마른 손만큼 마음도 말랐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한 손 마른 사람의 이런 심정을 배려한다면 몰래 고쳐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왜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첫째, 그 사람의 믿음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그 사람을 통해서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도 예수님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손을 내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마른 손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에만 마른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손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한 손 마른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낫고자 하는 소원과 낫게 해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마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부끄럽고 떨리지만 주님이 고쳐주시기를 바라면서 순종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마른 손이 곧 회복되어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손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힘든 인생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감추고 있으면 고침 받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병든 손, 병든 마음을 주님께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깨끗하게 고쳐 주실 것입니다. 마른 손을 내밀 때마다 치유되어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마른 손이 문제가 아니라 마른 손을 예수님께 내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와 영적 교제를 통해 마른 손을 예수님께 내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공개적으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자 가만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 법을 준수하고자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의를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병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나 영광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셨습니다.

 

  저자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주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리켜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 사랑하는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셨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이든지 임의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기도의 씨름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을 감내하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예수님 자신의 힘으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이런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말씀역사와 치유역사 다시 말해 구원역사는 하나님의 영,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양들의 생명을 살리고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면 가능합니다. 열심이 많고 능력이 많다고 구원역사를 흥왕하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지식이 많다고 해서 양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물질과 젊음과 많은 것을 희생한다고 해서 제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신 예수님,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배우고 매순간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다투거나 들레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기분 나쁘다고 사람들과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자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든지 자신을 감추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인간의 부패한 마음에는 허영심이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용히 일하시는 예수님, 다투거나 들레지 않으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맡은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의 인정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갈대는 약함의 대명사입니다. 갈대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강풍이 불면 부러집니다. 하물며 상한 갈대는 그 연약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상한 갈대는 꺽어버리는 것이 속 편합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기름이 닳아서 더 이상 불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그냥 놔두면 그을음만 냅니다. 그래서 꺼져가는 심지는 빨리 꺼버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는 소망을 둘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한 사람, 늘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사람은 소망을 끊고 외면하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내면이 깊이 병든 사람에게 소망을 두면 실망만 하고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빨리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상한 갈대라도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십니다. 소망 둘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겸손과 온유로 용납하시며 소망을 두시고 인내하시며 도우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창기와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일지라도 소망을 꺽지 않으셨습니다. 그들도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도 받아 주셨고, 일곱 귀신들려서 비참한 인생을 살던 마리아도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세리 마태도 받아 주셨습니다. 특히 그를 제자로 부르시고 3년 동안 함께 하셨습니다. 헌신적인 사랑과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그의 병든 내면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랬을 때 상한 갈대가 튼튼한 갈대가 되었고, 꺼져가는 심지가 활활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처럼 소망을 둘 수 없는 우리 각 사람을 소망을 두고 키우십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불신과 회의를 심어서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망을 끊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소망이 없던 사람이 살아나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구원자요 빛이요 온 인류의 소망이십니다


첨부파일 2020년 마태복음 18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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