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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마태복음 제 19 강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작성자정이삭|작성시간20.07.13|조회수59 목록 댓글 0

2020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말씀/ 마태복음 12:22-50 요절/ 마태복음 12:29

2020.7.12

마태복음 1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서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양 살아갑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으니 바로 영적 세계입니다. 영적 세계는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영적 세계를 알지 못한 사람은 어둡고 절망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영적 세계를 알고 영적인 권세를 덧입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영적 세계를 잘 알 아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영적 세계를 알게 되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안식일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충돌한 예수님은 조용히 물러나셨습니다. 그리고 몰려오는 사회적 약자들을 다 영접하시고 그들의 병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로 그 메시아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목자이십니다. 22-37절은 귀신들린 한 사람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역사에 대해 악평하는 바리새인들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친구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나온 사람은 눈 멀고 말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이중의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가족들과 친구들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런 장애를 갖게 되었을까요? 귀신이 들려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귀신은 사람에게 침투하여 마음의 병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때로는 육체의 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귀신에게 붙들려 시각 장애인이 되었고,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없고,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어머니도 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장애로 인해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을 겪어야 했습니다.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그의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는 것을 아시고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로 귀신이 떠나가자 그는 말도 하고 예수님도 보고 친구들도 보고 원더플한 하늘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무리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전에도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가진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자 사람들은 더 놀라서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사역 중에 눈 먼 자를 보게 하고 말 못하는 이를 말하게 하는 치유사역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능력을 행한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한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를 기대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놀라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치명적인 장애인을 단 번에 고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바리새인들은 좌불안석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님께로 가버리면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 것 같아서 예수님의 역사에 대해 악플을 달았습니다. ‘예수의 신유역사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단의 역사입니다. 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 입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 아니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권세 다시 말해서 사단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악평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든 사람을 고친 사건의 팩트 자체는 인정했습니다. 증거가 명백하기에 예수님의 능력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라고 함으로서 예수님의 역사를 폄하하고 예수님을 무너뜨리고자 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예수님의 하신 일이 하나님의 역사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어떻게 증거하셨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사단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하십니다. 같은 편끼리 분쟁하는 나라나 동네나 집은 황폐하여질 것입니다. 사단은 그 수하인 귀신들과 함께 어두움의 나라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단이 같은 편인 귀신을 쫓아낸다면 어떻게 그 나라가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사단과 귀신은 똘똘 뭉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대적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 다시 말해 사단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바리새인들의 아들들 다시 말해 그들의 추종자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들의 축귀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라라면 예수님의 축귀역사도 당연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축귀역사는 사단의 권세로 행해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권세로 행해집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행하며 병을 고치기도 합니다. 귀신을 쫓아냈으니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이는 실제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위장하는 것입니다. 사단과 귀신은 같은 편으로 사람들을 조종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당시 바리새인들 중에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고도 근원적인 치료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게 하고 말 못하게 하는 귀신아, 나가라!” 하자 귀신은 벌벌 떨며 떠나갔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단번에 귀신이 제압당하고 눈이 떠지고 입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귀신이 나감으로 그 사람은 새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습니다.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로와졌고 참 기쁨과 평강과 소망이 강물처럼 흐르게 되었습니다. 귀신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실재하는 것이며 내 안에 있고 교회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복음전파와 삶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전진하고 확장되며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사단과 귀신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라사 광인과 같이 파괴적이고 좀비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과 같이 영적 소경이요 영적 벙어리 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죽음과 파멸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말씀을 통해 영적 눈을 뜨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그 놀라운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런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여기서 강한 자는 사단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된 것은 치열한 영적 전투의 결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사단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다스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쉽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사단과 치열하게 싸우시고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서 얻게 된 놀라운 구원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가치있는 것입니다. 저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희생을 하셨는가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저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주님께 졌습니다. 일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복음을 전하기 어렵다고 핑계를 댄 것을 회개합니다. 코로나19도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모임과 교제가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들레지 않으신 예수님을 본받아 조용히 기도할 수 있고, 조용히 한 사람을 도울 수 있고, 조용히 말씀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수에 메이지 않고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도록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온라인 예배와 성경공부와 교육에 대해서도 배우게 하시고 복음의 지평을 넓혀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겠다고 하신대로 코로나 상황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구원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잘 보고 따라감으로 새 은혜를 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하나님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아니하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훼방하는 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했지만 실상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음으로 예수님의 대적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훼방하는 사단의 종이 되었습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든가, 예수님의 대적자가 되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바리새인들의 죄는 얼마나 심각합니까? 31,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일반적으로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한 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통해 명백히 드러난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대적한 것이 바로 그 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하신 일이 성령의 역사임을 알고도 고의적으로 모독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명백히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사단의 역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구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시며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자가 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섬기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말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나무와 열매는 뗄 수 없는 관계로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고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선한 일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악평했습니다.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하면서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악평을 하는 것은 마음에 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냅니다. 바리새인들은 나무 즉 그 사람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성령의 역사를 비난하고 악평한 것입니다. 말은 얼마나 큰 위력을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6,37) 나의 말로 의롭다 함을 받기도 하고 나의 말로 정죄함을 받기도 합니다. 말을 훈련하고 정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을 함부로 할 때가 많습니다. 불신의 말, 판단하는 말, 상처 주는 말, 무시하는 말, 교만한 말을 쏟아냅니다. 심판 날에 우리가 한 말이 소환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말을 근거로 재판하십니다. 말에 의해 심판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해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말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떨어뜨리는 말,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말,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감사의 말, 믿음의 말, 사랑의 말, 위로의 말, 칭찬의 말을 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말은 천냥 빚도 갚고 사람을 살려내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생명과 양분을 공급받아서 좋은 나무가 되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할 줄 몰랐고 더 화끈한 표적을 보여주어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시며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구약의 선지자로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수 나라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배를 타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풍랑 앞에서 바다에 던져졌고 물고기 밥이 되었습니다. 그는 밤낮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맛보며 기도했습니다. 그 후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했고 극적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예수님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입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나보다 큰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은 사람들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솔로몬 왕보다 더 큰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보다 더 위대한 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거절한 사람들은 솔로몬 왕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온 남방 여왕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분이시오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시오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의 직분을 동시에 행하시는 인류의 구원자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표적신앙을 싫어하시고 말씀신앙을 좋아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합니다. 방언을 구하고 신유의 능력을 구합니다. 사업을 크게 일으키거나 안정된 직장을 얻고자 합니다. 표적이 없이 말씀만을 믿고 신앙생활하는 것에 대해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위기의 때에 우리를 버티게 하고 승리하게 하는 것은 말씀신앙입니다. 표적신앙은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내지 못합니다. 말씀신앙은 우리의 인격을 변화사키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시편 기자는 어떤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까?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1:1,2). 바울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장해야 한다고 하면서 가장 큰 무기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요 다른 하나는 성령 안에서 무시로 하나님께 올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입니다. 우리가 말씀신앙을 견고히 함으로서 어떤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천성을 향해 순례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나중에 더 못쓰게 된 집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귀신 아래서 고통 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귀신이 나가고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집 나간 귀신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했으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옛 집이 그리워 가 보았습니다. 그 집은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어 살기 좋았습니다. 귀신은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은혜를 누리고 있었으나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에 힘쓰지 않음으로 과거보다 더 비참한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말씀공부를 통해 심령이 깨끗해지고 은혜와 기쁨과 활력이 넘치는 새 삶을 맛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 번 은혜를 맛본 후에 다 된 양 착각하여 꾸준한 말씀공부와 기도생활에 힘쓰지 않음으로 과거보다 더 비참하게 됩니다.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귀신이 다시 들어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46-50절은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 열두 제자들이야말로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 나라의 가족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가족들보다도 영적인 가족들을 더 귀히 여기고 서로 돌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육신의 가족들도 예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 구원역사의 동역자들이 되도록 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2020년 마태복음 19강 메시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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