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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마태복음 제 22 강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작성자정이삭|작성시간20.08.03|조회수58 목록 댓글 0

2020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14:1-36 요절/ 마태복음 14:20,21

2020.8.2

마태복음 22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우리는 하루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코로나 이후 시대에 일자리가 없어지게 됨에 따라 먹는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방역이냐 경제냐 고민하다가 당장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방역보다 경제를 택한 나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염려는 현대인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도 늘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병들고 배고픈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현실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 경제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경제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배불리 먹여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어떤 환경에서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신 이후를 가리킵니다. 제자들은 각 촌으로 흩어져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자들을 고치며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했습니다. 제자들로 인해 예수님의 이름은 온 유대 땅에 쫙 퍼졌습니다. 왕궁에 있던 헤롯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나서 활동한다고 말했습니다. 3-12절은 세례 요한이 어떻게 순교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왕의 간음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헤롯은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요한을 감옥에 가둠으로서 그의 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일파티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음란한 춤으로 그를 기쁘게 하자 그는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악심을 품고 있던 헤로디아는 그의 딸에게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라고 했고, 그로 인해 의인 요한은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야 할 헤롯은 백성들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죄의 낙을 즐기는데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는 체면을 구기지 않고자 의로운 사람을 죽였습니다. 헤롯의 이야기는 그 시대가 참으로 불의하고 고통이 많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13절을 보면 예수님은 헤롯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음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헤롯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그의 통치 지역을 벗어나 빈들로 가셨습니다. 빈들에서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갖고 좋은 추억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무리들은 예수님 일행을 따라왔습니다. 왜 그토록 열렬히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예수님에게서 참 목자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시고 동참하셨습니다. 헤롯 왕이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 밑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은 목자 잃은 양과 같았습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목자 잃은 양은 길을 잃고 방황합니다. 들풀에 걸려서 넘어지거나 독초를 먹거나 짐승에게 잡혀서 죽게 됩니다. 이처럼 백성들도 자신들을 돌봐주며 진리의 길로 인도해 줄 목자가 없어서 방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돌봐주십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크게 환영하시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러 가지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꿀과 같은 말씀을 듣다보니 어느 덧 저녁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무리들의 배고픔도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고픈 무리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곳은 빈들이었고, 때는 저물었고, 사람들은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법은 더치페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보내어서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 라고 예수님께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는 무리들이 알아서 먹도록 하지 말고 너희가 그들의 먹을 것을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의 주머니는 비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경제사정을 잘 아신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첫째, 무리들에 대한 책임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을 먹일 수 없기 때문에 알아서 먹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심으로서 어찌하든지 먹이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무리들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양들을 돌보아야 하는 목자요 영적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자신이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만 생각하지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싱글로 자유롭게 살던 사람도 결혼을 하면 어찌하든지 가정을 책임지고 돌보고자 합니다. 자식들을 낳으면 잘 양육하고자 하고, 잘 교육시키고자 합니다. 이처럼 남편 혹은 아내로서, 부모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섬기고자 하는 사람이 성장하게 됩니다. 51세인 저의 막내동생이 어제 어머니 88세 미수 생일잔치에 결혼할 배필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켰습니다. 돌봐줄 배필이 생기니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정현종 형제가 목동선서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결단을 받으시고 책임감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통해서 먹일 수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 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이것으로는 한 사람도 배부르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형편을 잘 아셨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 스스로는 먹일 수 없지만 예수님을 통해서는 먹일 수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그것을 기초로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명하여 잔디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축복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소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축복하셔서 오천 명을 먹이는 생명의 씨앗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뭔가 대단한 것이 있어야 양들을 먹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라도 우리에게 있는 것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그것을 통해서 양들을 먹이십니다. 사람들은 재물이 많아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있어야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그것을 통해서 양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조지 뮬러는 성경을 읽다가 시편 685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을 요절로 붙들고 길거리에 버려진 가난한 고아들을 데려다가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한 두 사람에서 시작해서 이천 명까지 늘었습니다. 그에게는 가진 재산이 없어서 날마다 다음 식사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자신에게 있는 두 손을 모아서 기도의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은 그때마다 이천 명이 넘는 고아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오병이어를 드려 양들을 섬기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병이어가 우리 손에 있으면 오병이어로 끝나버리지만 주님의 손에 들어가면 계속 불어나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데 귀히 쓰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신 후에 그것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떡과 물고기를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 후에 다시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시 떡과 물고기를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떼고 또 떼어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여자와 어린이까지 합하여 만 명이 넘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것을 열두 바구니에 가득 채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육 간에 풍족하게 먹이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UBF 역사는 오병이어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는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방황하는 캠퍼스 영혼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이 가진 것들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먼저는 매일 저녁에 모여서 양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5명이 모이든, 10명이 모이든, 50명이 모이든 모이면 동그랗게 둘러앉아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다보면 자정을 넘길 때가 많았습니다. 또한 배고픈 양들을 먹이기 위해서 먼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차비를 아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양들을 먹일 물질을 모았습니다. 양들에게 말씀의 꼴을 먹이기 위해서 부족하지만 배운 말씀을 잘 정리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오병이어, 물질의 오병이어, 일대일의 오병이어를 드렸을 때 예수님은 이를 축사하셔서 배고픈 캠퍼스 양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런 역사가 광주와 서울과 각 지방, 더 나아가 동남아와 독일과 미국과 전세계 캠퍼스를 먹이는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오병이어를 통해서 세계 캠퍼스 영혼들을 먹이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전히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코로나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무력감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8월 말에 갖는 희망포럼은 오병이어와 같이 작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청년학생들이 이 작은 것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 받으시고 영적으로 배고픈 영혼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하나님의 희망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22-36절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로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기도에 힘쓰셨습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영적인 안식이요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양식이요 능력의 원친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로 들어섰을 때 갑자기 역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파도가 일어났고 배는 이리저리 출렁거렸습니다. 제자들은 거스르는 바람과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고자 힘을 다해 노를 저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밤은 더욱 깊어져서 온 주위가 깜깜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추위에 떨며 밤새도록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밤 사경 즉 새벽 3-6시 사이에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사람은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고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본래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전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고난이 닥치자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마음이 딱딱해졌습니다. 그들은 사람 같이 보이는 것이 나타나자 두려워서 유령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공포에 질린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즉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니(에고 에이미)’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낼 때 사용하시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신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동안 제자들을 고난 가운데 버려두셨지만, 그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시간에 물 위를 걸어오셔서 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다 세시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작은 일까지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형편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이란 소리를 듣고 자신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가 왜 이런 요청을 했을까요? 자신도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단순한 사람입니다. 믿음은 단순함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평생동안 성경을 연구한 사람들보다 믿음이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모하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의 요구대로 물 위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성경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말씀을 믿고 한 양을 먹이는 목자의 삶에 도전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고 물질의 산을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나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을 믿고 연약함의 산, 질병의 산을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에서 뛰어내려 물 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심정은 신비롭고 흥분되었을 것입니다. 발로 물을 밟아도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발이 물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무서워서 예수님께 소리 질렀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베드로는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작을 때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게 하며,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는 통로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물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장래가 보장된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다가도 베드로처럼 바람을 보고 두려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대학시절에는 취업에 대한 염려의 바람이 붑니다. 취직한 후에는 결혼에 대한 염려, 승진에 대한 염려의 바람이 붑니다. 결혼 후에는 자녀들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노후에 대한 염려의 바람이 붑니다. 목자들은 힘든 캠퍼스 상황을 볼 때마다 믿음을 잃고 두려움의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이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환난 날에 주님께 부르짖는 자를 주님께서 건져주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붙들고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배 위에 있던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당하는 고난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고 담대한 믿음을 소유하게 합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크고 작은 고난들을 잘 감당함으로 성숙한 제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우리는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합니다. 상황이 급변하더라도 교회는 그것을 극복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 풍랑이 불어도 교회를 보호하실 것이며, 바다에 떨어져 빠져 들어갈 때에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라면 물 위로 걸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강한 믿음, 큰 믿음으로 말씀역사를 이루고 한 생명을 살려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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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2020년 마태복음 22강 메시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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