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말씀/ 마태복음 8:18-34 요절/ 마태복음 8:27 | 2026. 6. 14 | |
| 마태복음 제 11 강 |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우리는 예기치 않는 인생 광풍 앞에서 두려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이기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연계와 영계를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알고 믿음으로 어떤 문제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담대함과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치유하심으로 놀라운 긍휼과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에 많은 무리가 선한 목자 예수님을 에워 싸며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셨습니다. 그때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들이 있는 곳에 붙들어 두고자 하는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낯설고 험악한 곳일지라도 따르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그는 좋은 제자감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우와 대단하다! 나를 따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도록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자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이 없는 비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안정된 삶을 기대할 수 없고 여기 저기 옮겨 다니는 나그네의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서기관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가난과 희생을 각오해야 된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제자의 삶을 이상적으로만 보고 충동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그 인기를 자기도 누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능력 많으신 예수님을 따르면 부와 권력과 성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즉흥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깊은 은혜의 체험과 부르심이 없이 영광의 주님만을 보고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 험한 길을 가지 못하고 도중하차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해야 하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제자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제자 중 또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사람은 좁은 의미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넓은 의미의 제자로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마땅한 도리요 만사를 제치고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어떤 방향을 주십니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앞에 나오는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가리키고, 뒤에 나오는 죽은 자들은 실제 죽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의 문제가 분명한 결단이 없는 것임을 아시고 부친 장례라는 큰 문제 앞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고 결단하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의 제자에게 부친 장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부친 장례를 치루고 나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부친 장례식에 가게 되면 가정 일에 매여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세상을 따를 것인지 예수님을 따를 것인지 결단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가정의 문제는 다른 형제들에게 맡기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마음이 나뉘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제자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가족 섬기는 일이 충돌할 때는 가족 섬기는 일을 다른 형제들에게 맡기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택해야 할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며, 가족들의 원망과 비난도 각오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저편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호수 한 가운데를 항해할 때 갈릴리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광풍이었고 배는 순식간에 물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광풍이 불어 배가 흔들리고 제자들이 소리 지르며 난리법석인데, 예수님은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광풍 속에서도 단잠을 주무시는 예수님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셨기 때문에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제자들은 자신들의 기술과 힘을 다 동원했는데도 배가 침물 위기에 빠지게 되자 그때서야 다급하게 예수님께 나아와 깨우며 말했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우리가 죽어요” 이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도하면서도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평화의 주님이 그들 곁에 계시니 제자들은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곁에 두고도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지고 공포로 파랗게 질렸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잡히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광풍으로 인해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큰 문제는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두려움의 뿌리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위기에 처해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며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두려움의 반대 쪽에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작을 때 두려움은 커지게 됩니다. 믿음이 커질 때 두려움은 작아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광풍이 덮친 게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작은 것이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늦게라도 예수님을 깨우고 살려달라고 기도한 것을 보면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믿음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믿음은 온전하지 못했고 작은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믿음은 광풍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광풍이 몰아치고 배가 흔들리고 침몰할 위기 순간에도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이시요 사랑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그들을 죽음의 바다에 빠지도록 방치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함께 항해하자고 하셨기에 제자들을 보호하시고 책임지시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을 책망하신 예수님은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광풍이 불었나 싶을 정도로 바다는 평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성난 바람과 바다를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성난 바람과 바다를 꾸짖을 수 있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광풍이 지나가더라고 바다는 여파가 남게 되고 잔잔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자 바람이 즉시 그치고 바다는 즉시 잔잔해 졌습니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자들은 놀랍게 여겨 말했습니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그들은 그들을 집어 삼킬 것 같은 바다가 잔잔해 진 것에 놀랐습니다. 그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성난 바람과 바다를 순한 양처럼 순종하게 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고 여러 병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람과 바다도 순종시키는 예수님의 말씀 권세에 놀라고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우리는 광풍 훈련을 통해 제자들이 영적 눈이 떠지고 믿음이 성장하게 된 것을 배웁니다. 사람들은 순탄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인생 광풍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생의 배가 흔들리고 파선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시 실패로 인해 패배감에 빠져 방콕 생활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중병에 걸려 세상을 원망하고 슬픈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 허무와 절망에 빠져 방황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이스 피싱으로 소중한 재산을 잃고 미움과 분노로 고통합니다. 예기치 않는 교통사고로 장애를 갖게 될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두려움에 잡히게 됩니다. 직장에서 잘릴 때 세상에서 낙오된 것 같아 상실감이 밀려오고 이제 뭐하며 살아갈까 염려합니다. 목자들은 돌보던 양들이 떠나갈 때 내가 과연 한 명의 제자를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고, 양치는 목자의 삶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이런 인생 광풍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광풍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살피고 온전한 미음, 어떤 광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 무서운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나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는 믿음, 나에게 좋은 길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인생 광풍 훈련을 통해 우리의 영적 눈이 떠지고 우리의 믿음이 커짐으로 참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6-34절은 영계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소외된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소리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도 순종시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며 질문을 던졌는데, 그 답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본질이며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식적으로 알 뿐이지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귀신은 예수님께 반발하며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첨단 과학과 의학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귀신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하고, 예수님 없이 살아갑니다. 그들은 예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상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죄와 죽음과 사단으로부터 벗어나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고 거절한 사람들은 정죄를 받고 지옥에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그에게 나가라고 하셨기에 귀신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예수님께 한 가지 간청을 했습니다.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가다라 지방은 돼지를 많이 치는 곳이었고,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었기에 귀신들은 예수님에게 그 돼지 떼에 들여보내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귀신들은 그들의 새로운 거처로 돼지 떼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가라” 그러자 귀신들이 나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돼지들은 열이 나서 깡총 깡총 뛰다가 바다로 다이빙을 했고 싹 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돼지 치던 목동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였습니다. 특히 돼지 떼가 몰사했다는 것을 강조했을 겁니다. 온 시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사건 현장으로 가서 보고 그 모든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그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돼지 떼를 희생하지 않고도 귀신 들린 두 사람을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마을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도록 돼지 떼를 희생하셨습니다.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한 영혼은 돼지 떼를 희생할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병든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돼지 떼를 희생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 화목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연계를 다스시실 뿐 아니라 영계를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 참 생명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죄와 두려움 가운데 있는 캠퍼스 학우들과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