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마태복음 9:1-17 요절/ 마태복음 9:13 | 2026. 6. 21 | |
| 마태복음 제 12 강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2000년대 초반 ‘일요일이 좋다 X맨’이라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당연하지’라는 레전드 게임이 있었습니다. 일대일로 상대방이 어떤 곤란한 질문을 해도 멘탈이 흔들리지 않고 평온한 얼굴로 ‘당연하지’라고 대답해야 이기는 게임이었습니다. 만일 누가 우리에게 예수님이 죄사함을 주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 질문한다면 여기 계시는 분들은 ‘당연하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처음 하실 때 사람들은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참람하도다’, ‘어찌하여’ 하며 반응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의 선포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이 놀라운 복음의 선포를 듣고 하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가셨던 예수님께서 본 동네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이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2a절을 보십시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친구들이 전신마비로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를 침상 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중풍병은 뇌혈관이 막혀서 생기는 병으로 몸의 마비, 안면마비, 보행장애, 언어장애등이 나타나는 병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중풍병을 죄의 결과로 여겼습니다. 이로 인해 중풍병에 걸리면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여기고 정죄의식과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이런 병든 친구를 불쌍히 여기고 어찌하든지 예수님께 데려가고자 하였습니다. 중풍병자도 사람들 앞에 가는 것이 부끄럽고 고통스러웠지만 믿음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2b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작은 자야’는 말은 원어로 ‘아들아’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아들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심하라’ 하심으로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그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그와 그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죄사함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이 중풍병자의 뇌혈관을 뚫어주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막힌 담을 뚫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중풍병자는 그가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고 정죄와 두려움과 불안과 원망으로 영혼이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보다 훨씬 심각한 그의 죄를 보시고 믿음으로 나온 그에게 죄사함을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습니다. 메시지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졸기 잘하던 자도 눈을 뜨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종교 경찰 노릇을 하던 서기관들은 ‘어떻게 감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을 선포할 수 있어? 신성 모독죄로 고발해야 해’ 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배우려는 마음은 전혀 없이 고발 거리만 찾는 이들의 악한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4) 이는 둘 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죄사함만을 선포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말만 번지르게 하는 거짓 선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는 것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그것은 의도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죄사함의 권능이 있는 분이심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문둥병, 중풍병, 열병 등 불치병을 신기하게 잘 고치는 명의 정도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진실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죄 사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자신이 죄 사함의 권능을 가지셨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6b-8절을 보십시오.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겸손히 낮추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음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에게 불치병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것 바로 죄입니다. 암, 뇌 질환, 심장 질환 등 중증 질환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혼의 질병인 죄입니다. 질병은 육체에 큰 고통을 주지만 영혼을 파괴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죄는 우리 영혼을 파괴하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죄 아래 놓인 인간은 일생 죄의 종된 삶을 살다가 결국 죽고 심판 받을 운명에 놓여져 있습니다. 질병의 근본적인 뿌리도 죄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창조주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는 죄 사함의 권능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죄사함의 권세자 예수님을 믿고 죄 문제를 들고 나가면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불치병으로부터 치유 받는 것도 큰 은혜이지만 죄로부터 구원 받는 것은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026년 춘천전주 연합여름수양회 주제는 복음과 새로운 삶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주제입니다. 주제에 맞게 컬러플한 은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리모델링된 좋은 환경과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풍성한 교제의 시간이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빛나는 나의 컬러’, ‘AI시대에 복음으로 리컬러링하는 새로운 삶’ 등 특강이 준비되었습니다. 스피릿 충만한 싱스피레이션, 아름다운 특송, 감동적인 인생소감, 무엇보다 장복원, 최야곱, 홍갈렙 목자님들이 힘을 다해 준비한 주제 강의 말씀이 있습니다. 죄사함의 은혜, 복음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죄의 종이 되어 중풍병자처럼 살아가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정욕과 열등감과 무절제와 미움과 불평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남은 기간 중풍병자들의 친구들 같은 믿음으로 이들을 수양회에 초청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현재적으로 나의 영적 생명을 시들게 하는 죄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감으로 죄사함의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13절은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지나시다가 세리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 ‘보셨다’는 말은 세리 마태의 중심과 처지를 꿰뚫어 보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세리라는 그의 직업만 보고 매국노, 공인된 죄인으로 규정지어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 마태의 전부를 보셨습니다. 그의 본명인 레위 곧 ‘연합’이라는 뜻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연합시키는 삶을 살고자 했던 순수한 어린 시절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가난으로 인한 상처로 돈을 쫓아 세리라는 직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고뇌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세리들 사이에서 인생의 허무함과 외로움으로 고통하는 그 영혼을 보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만약에 저분이 나를 불러만 주신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당장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그의 영적 소원을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먼저 마태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말씀입니다. 마태는 세리로 성공하기 위해 양심의 가책 속에서도 정한 세율 이상을 받고 사람들에게 갑질하고 세리 친구들을 따라 육체의 향락을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한 정죄의식과 죄의 세력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말씀으로 그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그를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아니 국회의원에 뽑혀도 100만원 이상의 벌금이 나오면 의원직이 박탈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섬길 제자 그룹에 공인된 죄인인 세리 출신을 뽑는다니 말이 됩니까? 사람들은 온갖 뒷담화와 비난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루머와 모든 비난을 감수하셨습니다. 이는 마태 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에게 큰 소망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레위에서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의 마태로 바꾸어 주시고 존귀히 여겨 주셨습니다. 그를 12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 뽑아 주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은혜로 말미암아 마태는 자기와 같은 세리와 죄인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자신을 세리 마태라고 밝히며 겸손히 주님을 따랐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돈을 따르는 삶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천국의 서기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고 산상수훈이 담겨 있으며 하나님을 긍휼을 깊이 드러내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마태의 동업자였던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자들을 붙들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에 제자들을 대신해 예수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의사가 빛을 발할 때가 언제입니까? 병든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래서 의사는 병든 사람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함께 하며 치료해 줍니다. 제가 근무하는 한의원에 하루는 영업이 끝나갈 때 쯤 어떤 남자가 술을 먹고 밖에서 대판 싸움을 했는지 벌건 얼굴과 퉁퉁 부은 손을 하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접수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나 좀 치료해 주쇼’ 하였습니다. 접수하시는 분이 급히 ‘사무장님’ 하며 저를 찾았고 간호사들은 이 남자가 난동을 부릴까봐 조마 조마 하였습니다. 저도 처음 당하는 일이라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여차하면 이 한 몸을 바쳐 대항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의사 원장님은 전혀 피하지 않고 ‘조용히 하세요. 치료해 주겠습니다’하고 진정시키고 상처 난 손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의사는 병자를 거부하지 않고 치료해 줍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시고 환영하며 함께 하여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한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으로 정죄하고 낙인 찍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의인 심정이 충만한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당시 랍비들은 성경을 오해하는 초보자들에게 ‘가서 배우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경 박사요 율법 선생임을 자부하며 쉽게 판단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호세아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우상숭배와 살인과 도적질과 간음과 포악의 죄를 반복해 지으며 형식적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을 어찌하든지 돌이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아셨기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말구유에 낮아져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병든 죄인들이 스스로 올 수 없으니 친히 왕진하셔서 죄인들을 찾아오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부른다’는 것은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병들고 소외되고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환영하시고 함께 하시며 죄사함을 주시고 천국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와 같이 이기적이고 돈을 쫓아 사는 저도 불러 주셨습니다. 어릴 적 저는 형들과 과자를 먹으면 더 많이 먹기 위해 먹는 척 하다가 허벅지 사이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그 과자를 따로 모아서 혼자 몰래 먹었습니다. 가난으로 인한 상처와 열등감이 많았던 저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대기업에 들어가서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스터디그룹을 만들었는데 스터디그룹에서 만든 자료를 외부로 유출하지 말자고 적극 주장하다가 그룹원들과 많이 부딪쳤습니다. 저는 세리들이 많은 학과에서도 악명 높은 세리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이기적인 죄인이 군에서 외롭고 허무하고 두려움으로 마음이 겸손해져 있을 때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예수님의 제자요 캠퍼스 목자로 살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죄인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제가 영적 교만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배워야 함을 보게 됩니다. 저는 바뻐서 한림대에 올라갈 시간이 없다고 하길 잘하였는데 돌아보니 이는 제가 한림대 영혼들을 위한 긍휼의 마음이 많이 부족함을 돌아보고 회개하게 됩니다. 저의 일대일 목자님은 차도 없는데 주일 예배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학곡리까지 와서 한참을 걸어서 면회 신청을 하고 일대일을 하고 가셨습니다. 주일 오후를 소망 없어 보이는 군인 양을 돕고자 다 보낸 것입니다. 제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긍휼을 배움으로 한림대 전도와 일대일 성경공부에 다시 도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17절은 예수님이 가져오신 천국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에 힘써야 하는지를 깨우쳐 줍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결혼식에 가서 금식하는 법은 없습니다. 만약 결혼식에서 기뻐하지 않는 손님이 있다면 그는 신부의 전 애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결혼식은 축제의 날, 기쁨의 날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신랑이요 그의 제자들은 혼인집에 초청 받은 손님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은 혼인 잔치와 같습니다.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둘 다 못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기쁨을 주고 활력을 줍니다. 복음은 새 포도주처럼 그 안에 생명이 있어서 팽창하는 힘이 있습니다. 낡은 가족 부대와 같은 딱딱한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복음을 담을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을 비우고 겸손하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만이 생명과 기쁨이 충만한 예수님의 복음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능자이시며,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자,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죄 사함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죄로 병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죄 사함의 복을 받고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김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