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일 061426 가해 강론
탈출 19:2-6ㄴ; 로마 5:6-11; 마태 9:36-10:8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그런 군중을 상상해본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폭력이나 굶주림을 피해 도망치는 난민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축 처진 어깨, 흔들리는 걸음걸이, 힘없이 가라앉아 움푹 들어간 눈, 그리고 너덜너덜한 옷이 우리에게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다"는 의미를 적나라하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다는 데 대한 위의 "정의"는 너무 좁은 의미의 정의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고통이라는 특별한 상황에만 주의를 기울이신 것이 아니라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연민의 정에 압도를 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신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양들은 그 모든 고을과 마을의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처해져 있던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시선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실 때, 그 시달리고 기가 꺾여 헤매는 사람들의 현실은 결코 먼 곳의 현실이 아닙니다.
그런 현실은 곧 내가 살아가는 자리이며, 나의 이웃과 공동체의 현실입니다. 그렇듯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은 내 주변에 가득하고, 때로는 나 자신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양치기에게 삶은 어떤 삶일까요? 양치기는 필요할 때 포식자로부터 양들을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그들의 주요 임무는 단순히 양을 안내하여 목적 없는 방황의 지칠 줄 모르는 허황된 노력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양치기의 삶인 것입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혹시 목적 없이 헤매며 허황된 노력을 하고 있는 방랑자들일 수가 있을까요?
만약 제가 신호등 앞에서 바쁜 길을 건너가기 위해 조급한 마음으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뚜렷한 목적도 없이 뭘 그리 급하게 헤매고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 사람들은 저를 미친 사람 취급을 하면서도, 왜 목적도 없이 이렇게 바쁘게 움직일 것 같아 보느냐는 핀잔을 줄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이나 가야 하는 곳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곳에 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특정 직업, 적절한 거래, 유용한 인맥, 좋은 건강, 노력, 약간의 행운, 그리고 조금 더 많은 시간이 그들이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심각하게 그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어본다면, 그 사람들은 그런 궁극적인 목적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성공", "행복", "부(富)", "유용감(有用感)" 등이 그 사람들의 목적이라는 답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제 인생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이 각자의 삶 앞에서 무력해지고 기가 꺾여 있지 않다고 솔직히 말할 수가 있을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와 제가 아는 이들은 모두,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시선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연민과 자비의 눈길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복음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길 잃은 이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시기를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뿐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일꾼들을 보내 주시어, 마치 추수할 곡식처럼 우리를 하느님 품으로 거두어들이십니다.
그러나 추상적인 기도만으로는 그런 일이 이루어지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이 되어 드리지 않고, 즉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서 만 세상의 문제를 돌보아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으로 하시는 일은 기도하라고 말씀해주신 사람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의 이름이 복음서에 기록은 되어 있지만, 그 이름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열 두 제자의 이름조차 복음서마다 조금씩 달라서 정확히 모두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특정된 그 누구였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부르심(召命)을 주시기 위해 선택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특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선택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자면, ‘그 아무개’라도 괜찮았던 것입니다.
사실, 그런 면에서,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수확할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수확의 주인께 청하여라”(마태 9,38) 하고 명하신 말씀에 순종한다면, 바로 우리 자신이 그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을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일꾼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워졌다"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도록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메시지의 진실을 증명하는 증거는 바로,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그저 병자들을 치유하는 일을 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회복시키며, 사람들이 겪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덜어주며, 그러한 우리의 봉사와 기쁜 소식을 모두에게 성심성의껏 제공하는 우리의 노력입니다.
그리스도교 교인으로서의 제 삶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열 두 명이 선택된 것처럼 저도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사도들이 파견된 바와 같이 저도 파견되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딘가에는 제가 하느님의 선물이 되어 주게 될 사람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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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예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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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예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2 신부님늘감사합니다 늘주님의사랑이가득하시길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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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예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2 신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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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예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2 신부님! 오늘이 사제 성화의날 이네요~
축하드립니다~ -
작성자예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2 신부님 사제성화의 날
맞이하여 축하드립니다.🥳
늘 영육간의 건강하시고
거룩한 사제되시길~♡
함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