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호 신부님의 연중 제12주일 강론
예와 아니오로 이루어진 한 생애
ㅡ 어떻게 이 세상에서
주인으로 살 것인가
1.
세월은 언제나 찰나처럼 야속하게 흘러갑니다.
지나온 날들은 한 편의 영화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돌아보니 어느듯 사제 서품 후 반세기의 시간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서품을 받고 난 뒤, 제가 처음 받은 임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새 사제의 축복과 위로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첫 미사의 감격도 있었고, 꽃다발과 따뜻한 환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사제직의 첫 실제 임무는 뜻밖에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는 전두환 군부독재의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했고, 진실을 말하는 일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분도출판사를 운영하시던 독일인 임 세바스티안 신부님께서 제게 16mm 흑백영화 「사계절의 사나이」를 맡기셨습니다.
저는 작업복을 입고 필름과 영사기를 챙겨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국을 다니며, 암암리에 이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돌아보면 그것은 화려한 강론대의 사목이 아니었습니다.
낡은 영사기의 소리, 어두운 방 안의 침묵, 조용히 모여 앉은 사람들의 눈빛이 제 첫 사목의 자리였습니다.
저는 영화를 틀었지만, 사실 그 어둠 속에서 비추어진 것은 단순한 화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양심의 빛이었고, 진리의 빛이었으며, 두려움 속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라는 복음의 빛이었습니다.
2.
그 영화의 주인공 성 토마스 모어는 영국의 대법관이었고, 학자였으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인간 권력과 하느님의 진리 사이에 서게 됩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신앙과 양심을 거스르는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침묵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권력의 말에 따랐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모어는 끝까지 양심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을 미워하지 않았고, 나라를 배반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인간 권력이 하느님의 진리보다 앞설 수 없다는 사실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요란하게 싸우지 않았고, 자신을 과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침묵 속에서, 감옥 속에서, 하느님 앞에서 자기 양심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예'라는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음으로 유복한가정이 파괴되고
모든인간관계가 파탄되고 마침내 자신은 죽음에로 몰리게 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양심의 목소리
ㅡ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의 육신은 권력의 칼 앞에 쓰러졌지만, 그의 영혼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를 패배자로 만들었지만, 그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복음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증언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1년 동안 전국에서 상영하며, 토마스 모어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깨달았습니다. 사실은 그 영화가 저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모어의 침묵이 저를 가르쳤고, 그의 양심이 저를 꾸짖었고, 그의 죽음이 제 사제직의 첫걸음에 깊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너는 누구의 눈치를 보고 살 것인가.
너는 누구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설 것인가.
너는 몸의 안전을 위해 영혼의 진실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
3.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세상에서 우리는자유롭게 사는 것 같으면서도 남의 눈치에 묶여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평가, 주변의 눈빛, 다수의 분위기, 손해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붙듭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몸은 안전할지 몰라도 내면의 영혼은 점점 작아집니다.
내가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선과 세상의 요구에 떠밀려 살아가다 보면, 삶의 중심은 흔들리고, 자신의 목소리는 희미해지며, 기도는 힘을 잃고, 마침내 양심마저 침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를 깨웁니다.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진리는 하느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빛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보다, 하느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게 하는 은총입니다.
임제 선사의 말로 전해지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스스로 주인이 되면, 그 서 있는 자리가 모두 참된 자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제멋대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남을 무시하며 자기 뜻만 내세우라는 말도 아닙니다.
어떤 자리에서도 자기 마음의 중심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그 중심은 하느님 앞에 선 양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수처작주”란 내 마음대로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양심의 주체로 서는 것입니다.
“입처개진”이란 어느 자리에 있든 하느님의 진리 안에 서면, 그 자리가 거룩한 증언의 자리가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감옥에서도 자기 양심의 주인이었습니다. 처형장에서도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감옥은 진리의 자리가 되었고, 그의 처형장은 자유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4.
제가 젊은 사제로 작업복을 입고 영화를 틀던 그 어두운 상영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겉으로는 초라한 자리였지만, 그곳은 복음이 조용히 빛나는 자리였습니다. 말할 수 없는 시대에, 한 편의 영화가 양심을 깨우는 작은 제단이 되었습니다.
제12주일 복음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초대합니다.
사람의 평가에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보존에서 복음의 증언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안전하게 살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진실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몸을 지키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진실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더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상처가 있어도 무너지지 않고, 외로움이 있어도 길을 잃지 않으며, 손해가 두려워도 진리를 버리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남의 눈치에 끌려다니기보다 하느님 앞에서 양심의 주인으로 서 서 살기를 원하는사람입니다.
그 첫 임무는 제게 조용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세상에서 언제 “예”라고 말해야 하며, 언제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가를.
진리 앞에서는 “예”라고 말하고, 영혼을 팔라는 세상의 요구 앞에서는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을 살리는 사랑 앞에서는 자신을 내어놓아야 하지만,
양심을 죽이는 권력 앞에서는 침묵 속에서도 굽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5.
이제 돌아보니, 그것은 제 사제직의 은혜로운 첫 복음 수업이었습니다.
그 어느 축하의 말보다 깊고, 꽃다발보다 오래 남는 축복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누구 앞에 서야 하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미리 보여 준 암시적 축복이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편안하게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를 하느님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선 사람만이, 비로소 세상 속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서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남을 지배하거나 자기 뜻을 관철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영혼을 남의 시선에 맡기지 않는 일이며, 권력의 눈치와 다수의 분위기와 시대의 흐름 앞에서도 끝까지 자기 양심을 값싸게 내어주지 않는 일입니다.
아마도 그날, 어둠 속에서 조용히 돌아가던 낡은 필름은 저는 늘 기억합니다.
빛은 어둠을 피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 한가운데서 자기 사명을 시작한다는 것을.
믿음의 사람은 평온한 자리에서가 아니라, 선택의 자리에서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을. 그리고 한 생애는 결국 수많은 “예”와 “아니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느님께는 “예”를, 거짓에는 “아니오”를.
사랑에는 “예”를, 두려움에는 “아니오”를.
복음에는 “예”를, 영혼을 팔라는 세상의 요구에는 “아니오”를 말하는 것.
그것이 부족한 제게 맡겨진 첫 번째 축복이었습니다.
그. 축복은 때때로 두려고
때로는 한없이 초라했고 또 때로는
처절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제마음속에서
조용히 상영되고 있는,사제직의 첫 복음입니다.
그 흑백 이미지 속 토마스 모어경의
단호한 눈 빛이 저에게 묻습니다.
예,혹은 아니오, 그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