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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연중 제 30주일 (2026.10,25) 가해 강론

작성자예찬|작성시간10:00|조회수105 목록 댓글 0

연중 제30주일 102526 가해 강론
탈출 22:20-26; 1테살 1:5ㄷ-10; 마태 22:34-40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일종의 근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경에 적힌 내용만을 고집스럽게 믿었습니다. 당시 그 사람들의 성경에는 부활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사두가이인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전면 부정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신앙의 유산 속에서 이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와 가능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열려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사람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서 사두가이파의 입장에 반대하시자, 바리사이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우군으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예수님께 율법에 관한 전형적인 율법학자식 질문을 던지며, 나름의 예우를 갖추어 접근했습니다.

그 당시 유다교에는 613개 조항에 달하는 계명이 있었고, 그 중에는 당연히 더 중요한 계명들이 존재했습니다. 어떤 계명들은 다른 율법들을 해석하는 핵심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하면 과연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무엇을 “무겁고 중요한 계명”으로 보고 무엇을 “가벼운 계명”으로 여기는지 알면, 그 라비의 신앙적 깊이와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유다인들이 늘 가슴에 품고 고백하는 “세마 셰마 (Shema)”, 곧 유다인의 신앙 고백문으로 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어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두 번째 계명 역시 청중에게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다른 스승들도 이 두 계명을 연결 짓곤 했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신앙적 근간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완전히 새로운 두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말씀은, 이 두 가지 계명이 서로 동등하다는 점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 안에서 드러나고, 이웃 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을 증명해 보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이웃 사랑 없이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반대로 하느님 사랑 없이는 진정한 이웃 사랑을 할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이거늘, 어째서 한쪽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한쪽을 사랑하는 것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해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강생 (Incarnation 성탄/육화)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우리 중 하나가 되게 하셨을 때,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그 모든 구체적인 삶의 자리들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해야 할 거룩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추상적인 개념속에서 사랑받으신 분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구체적인 세부 사항들 안에서 사랑받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길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해야만 비로소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장 하느님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채 이웃을 사랑하는 무신론자들도 있지 않은가?”

신앙이 없는 이들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알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그 관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관계에 대한 충실성이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 사람들 자신은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들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 하느님의 그 어떤 계시라도 바르게 깨닫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 두 계명을 통해서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처음에 살펴보았던 사두가이인들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계시를 이해하는 그 사람들의 방식은 그저 글자 그대로의 문자에만 집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 문자 뒤에 계신 하느님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 사람들이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았더라면,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는 사랑과 그분의 사랑을 베푸시는 은총은 결코 죽음 따위에 패배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랑 이야말로 하늘 나라로 향하는 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스스로 100% 확신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등한 것으로 놓으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커다란 위로와 축복이 됩니다. 내가 단 한 명의 이웃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이미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면, 내 입으로 아무리 거창하게 말하고 스스로 아무리 그렇게 느낀다 할지라도,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 그리고 그것을 통한 하느님 사랑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정 – 특히 하느님께 대한 감사하는 마음 – 도 물론 중요한 일부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나누는 거룩한 예식을 거룩한 미사 “유카리스티아 εὐχαριστία (Euchaistia, 감사례/미사)”라고 무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타인을 위한 봉사에 봉헌하겠다는 “결단과 선택”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이웃이란, 내 사랑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그 모든 이, 곧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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