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죽임을 당한 어린양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13:8~10).”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7~10)”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1:18~21).”
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통해 구원이 예정됨
대제사장이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막14:62).” 하셨다. 모두 다 실족해버린 자리에서 내가 그라고 말씀하셨다.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서 실족하고 실패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14:62).” 하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물어보는 자리는 ‘너 같은 것이 찬송 받을 자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인생이 찬송 받을 자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흙으로 지어지고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이 어떻게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라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 구원의 영원한 계획이 바로 그 자리에 있다.
최초에 아담이 생명나무를 버렸다. 그것이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에 버린 것이다. 만일 생명나무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면 아담은 생명나무를 버리지 않고 취했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할 만큼 그렇게 멸시할 수밖에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버리게 되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어린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은 어린양만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생명나무를 버렸던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를 다시 버리게 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실족했고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분노했다. 그래서 결국 예수는 버린바 되었는데 바로 이 사람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13:8)”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통해서 구원할 것을 예정하고 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7~10).” 했다.
모든 지혜와 총명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 안에서 지혜와 총명이 나온다.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어디서 알렸는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알렸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라고 했다.
누가 귀 있는 자인가? 누가 듣고 싶지 않아서 안 듣겠는가? 누가 귀를 막고 있겠는가? 죽임을 당한 자를 통해서 그 뜻을 알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 말을 알아듣고, 어떤 사람은 못 알아듣는다. 죽임을 당한 자 안에서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했다.
시편이나 잠언을 보면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말씀들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말씀은 모두 죽임을 당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시1:1).” 하면 보통 말 같이 들린다. 악한 자의 꾀를 쫓으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죽임을 당한 자가 아니면 악한 자의 꾀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죽임을 당한 자만이 결국 악한 자의 꾀에 빠지지 않게 된다.
사람이 사탄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가? 사람은 사탄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 죽은 체하지 않으면 싸워서 이길 수 없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을 때, 산 체하면 죽는 것이고 죽은 체하면 산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죽은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 세우며 가로되 뛰어내려 보아라, 그러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때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였다. 이것은 죽은 자라는 뜻이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며 나에게 절하라. 그러면 네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니까 예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다고 대답했다. 이것도 역시 죽었다는 말이다(마4:1~11참).
사탄을 대항해서 싸울 사람은 죽은 자가 아니면 이길 수가 없다. 지혜와 총명은 어디에 있는가? 사탄에게 속지 않는 것이 지혜와 총명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똑똑해서 지혜와 총명으로 차 있으려고 한다. 그런데 사탄이 사람을 속인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이 아무리 자기가 지혜롭고 총명하려고 하더라도 사탄을 이길 수가 없다. 사탄이 원래 타고 나기를 사람보다 지혜롭고 총명하므로 우리가 지혜를 개발하고 총명을 개발할수록 더욱 속는다. 사람의 모든 지식과 사람의 모든 지혜가 자기를 넘어지게 하는 올무가 되고 만다.
현대인이 되면 더 지혜로울 줄 생각하고 더 총명할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탄에게는 더욱 밥이다. 똑똑하면 이길 줄 알았는데 똑똑하면 더욱 밥이다. 왜냐하면 사람보다 더욱 똑똑한 것이 천사이다. 사람보다 더욱 지혜롭고 총명한 것이 천사다. 우리가 그 앞에서는 죽은 자가 되는 것밖에는 이길 길이 없다. 힘센 자 앞에 가서 맞지 않으려면 죽은 자가 되는 것밖에는 맞지 않을 길이 없다.
아담이 거기서 ‘나는 인생이다. 나는 흙으로 지어진 자이니까 천사인 너와는 대항이 될 수 없다. 나는 너를 이길 수 없다.’고 했으면 그가 와서 건드릴 수가 없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지 않을 줄로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미련한 사람이 속을 줄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잘난 줄 생각하는 사람이 항상 속는다. 사고를 저지르는 사람도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고를 저지르게 된다. 아예 자기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고를 저지르지 않는다.
죽은 자와 죽임을 당한 자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했다. 우리가 그 죽은 자 안에서 비로소 지혜와 총명으로 넘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님 뜻의 비밀을 누가 아느냐? 바로 그 사람이 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 비밀을 알았다. 문둥이 시몬이 그 비밀을 알았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하게 보였지만 그가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다.
모세는 분명히 처음에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다음에는 미련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 뜻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그는 아주 무능력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죽임을 당한 자 안에서 하나님 뜻의 비밀을 알 수 있다.
나. 때가 찬 경륜이 필요함
“때가 찬 경륜(엡1:9)”이라는 것은 이렇게 우리 인간의 모든 지혜와 총명이 실패하고, 우리의 능력이 다 실패된 다음이 때가 찬 경륜이다. 그것이 바로 때가 찬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때가 찼다. 해 보고 해 보고 다 해 보다가 때가 찼다. 그리고 모세는 해 보다 해 보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왔는데 그것이 바로 때가 찬 경륜이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언제 나타나시는가? 항상 이 때가 찬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경륜의 때가 완전히 완성될 때, 그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이 사람이 아직 때가 덜 찼구나 하고 보여지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때가 다 차서 꼭지만 따면 되는 사람이 있다. 때가 찬 경륜이 다 된 사람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때를 기다리고 있는 분이시다.
죽임을 당한 자를 통해서 예비 된 구원은 때가 차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하나님의 구원이 죽임을 당한 자를 통하여 예정한 것이 아니라면 그 때라는 것이 필요 없다. 경륜이라는 것이 필요 없다. 그런데 죽임을 당한 자를 통하여 예정된 구원이기 때문에 이것은 꼭 때가 찬 경륜이 필요하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이 필요했던가? 왜 80살의 모세가 필요한가? 왜 100살이라는 아브라함의 경륜이 필요한가? 모두 때의 경륜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어야만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으로 다 통일된다. 복종한다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으로 인해서 지어진 모든 만유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이것이 완전한 질서이고 완전한 은혜이고 완전한 풍성이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구원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질 것인가? 죽임을 당한 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넘치게 하사 그의 뜻의 비밀을 알려서, 이것이 그리스도 안으로 통일되도록, 그리스도 머리되심 안으로 순종하도록 그렇게 예정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만유가 지어진 대로,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 그 순서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화이고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 구원을 무엇을 통해서 완성할 수 있는가? 죽임을 당한 자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죽임을 당한 자 안에서 모든 지혜와 총명이 넘치고 하나님 뜻의 비밀이 알려지고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만유의 순종, 이것이 바로 죽임을 당한 자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세상의 위대한 자들을 통해서는 절대로 만유의 순종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 위대한 자가 나오면 나올수록 사람들은 점점 불순종에 이르게 된다.
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으로 통일됨
죽임을 당한 자가 우리 눈 앞에 아름답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되겠는가? 모두 순종의 질서 안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가 통일되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0).”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으로 다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이 놀라운 사람을 만들어서 만유를 통일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고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통해서 만유를 통일하게 된다. 이것이 놀라운 일이다.
만유의 순종,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우리에게 있어 무엇이 구원이냐? 나와 내게 속한 모든 것이 순종 안에 있는 것, 순종이라는 노선 안에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사람들은 어떤 교리를 배워서 죄 사함을 받았으니, 구원을 받았느니, 피로 구원을 받았다느니 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방법이다. 교리적 방법에 의한 순종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하더라도 내가 그 순종의 노선 안에 있지 않다면 구원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죽임을 당한 자를 통해서 구원을 예정하셨다. 그러면 성경에 있는 모든 구원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 안에 있는 구원이다. 절대로 다른 구원은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무슨 방법, 새로 구원을 얻을 방법을 개발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부 어린양 안에서 예정되어 있다. 죽임을 당하신 자 안에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구원은 절대로 없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창세로부터 미리 알려진 바 된 자이다. 새로 나타난 자가 아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라는 분이 새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창세 전에 미리 있었다고 한다.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벧전1:20).”라고 했다. 창세로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되신 자가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다. 그 동안에 감춰져 있다가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드러내신 바가 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 이후에 아담 때문에 창세로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가 감춰져 있었다. 그때부터 계속 위대한 자가 드러난다. 네피림이 드러나고 바벨탑이 드러나고 계속 위대한 자를 찾게 되었다. 그래서 미리 알리신 바 되었던 자가, 흙으로 지어졌던 자가,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이,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자가 감춰진 것이다. 그래서 온 세상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이 그리스도가 완전히 감춰져 있었다. 세상에 어디를 가도 없다. 나온 것은 다 위대한 것만 나와 있다. 굉장한 것만 나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도무지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다. 만일 그리스도가 나타내신 바가 되었을 때, 우리 눈에 감춰져 있던 분이 드러나게 된다면, 그때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전부 위대한 것만 보았다. 굉장한 것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위해서 나타내신 바 된 어린양이 보인다. 창세 전에 있었던, 다시 말하면 창세기 1장과 2장 안에 있었던 그 지정된 사람이 내게 보인다면 그것은 구원의 사람을 본 것이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벧전1:21).” 했다.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 우리가 실족했던 그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고 하나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다. 죽임을 당한 자를 보고 우리는 실족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가 실족했는데 우리가 실족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거기서 실족할 수밖에 없었다.
라. 하나님 보좌 우편의 영광을 발견함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이다. 그가 왜 감춰졌는가? 우리 눈에 시시하기 때문에 감춰졌다. 우리 눈에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감춰졌다. 그런데 우리 눈에 그것이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보좌 우편의 영광으로 발견되는 날이 우리가 구원을 받는 날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운명이 영광스러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그 버려진 바 된 운명이, 감춰진 바 된 운명이, 우리가 부끄러워했던 그 운명이 영광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다.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말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 이 사람이 바로 세상에서는 버린 바 되고 감춰진 바 되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무엇인가를 담당한 사람이다. 나의 무엇인가를 담당한 사람,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께로 갈 수 없었던 어떤 것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이다. 원래 사람은 양(羊)으로 창조되었다. 원래 하나님 앞에서 제물로 창조된 것이다. 사람은 그것이 싫었다는 것이다. 오늘도 복음을 전해 보면 가장 문제 되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제물로 지어졌다는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면 세상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다.
그런데 누가 이것을 받아들이려고 하겠는가? 왜냐하면 그 자리가 항상 감춰진 자리이고 부끄러운 자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들이 모두 거부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좋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야 더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제물이 되는 것은 싫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드려진 제물이 된 것을 보고 제자들이 실족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믿지 않는 부모들이 우리 형제들을 보고 실족한다. 왜 실족하는가? 나쁜 짓을 하여 실족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불효하여 실족하는 것도 아니다. 다 잘하는데 왜 실족하는가? 제물이 되는 것을 보고 실족한다. 자기 아들이 잘되기를 원하고 똑똑해지기를 원한다. 그런데 제물이 되는 모습이 보여서 반대하고 불쾌하게 생각한다. 결국 부모들이 인정할 때는 자기한테 너무 잘하니까 할 수 없이 인정하는 것이다. 제물이 되는 것은 싫지만 자기에게는 너무 좋으니까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의 어떤 문제를 감당해 줄 자는 누구인가? 제물인 그 사람밖에 없다. 위대하게 되는 것이 좋을 줄 알지만 위대하게 된 자는 그 부모를 돌아보지 않는다. 자기 눈에 볼 때 제물이 되는 것 같아서 반대하는데 그 아들이 결국 자기 짐을 지고 간다. 제물인 그 사람이 자기의 짐을 짊어진다. 그래서 마침내는 결국 우리 교회로 온다. 자기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자기 아들 안에서 봤기 때문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본 것이다. 이천 년 전에 있는 양이 아니라 현재 있는 양이다.
나이 많으신 어른들은 이래서 모두 구원이 되었다. 우리 형제들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었기 때문에 구원이 되었다. 창세로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들이다. 우리가 그들의 죄를 담당하지 않으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짐을 감당하지 않으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제물만 보고는 아무도 따라오지 않게 될 것이고, 제물만 보고는 아무도 동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이 제물이 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다. 그런데 자기 죄를 감당해 주니 구원이 된다.
마.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사람들
이 사람은 창세 이후 지금까지 죽임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다. 계시록 13장을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계13:8~9).”고 말하고 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래로 녹명되지 못한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했다는 것이다.
이 짐승은 누구인가? 창세기 3장에 보니까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창3:1).” 했다. 어린양은 가축이다.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다. 그러나 들짐승은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짐승이다. 들짐승은 간교하다고 표현되었다. 들짐승 중에서 제일 간교한 짐승이 뱀이라고 했다. 그래서 뱀을 사탄이라고 말한다. 이 간교한 뱀은 커져서 용이 되었는데 용은 어떻게 커졌는가? 간교함으로 커진 자이다. 자기의 간교함으로 커진 자이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한다. 이 짐승은 쉽게 말하면 사람보다 못한 자이다. 짐승을 창조한 다음에 사람을 지었다. 사람이 짐승에게 경배한다는 것은 멸망이다. 짐승 위에 사람인데 사람이 짐승을 경배하는 그것이 바로 멸망이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누구인가? 결국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 안에서 발견된 사람이 아니면, 다 짐승에게 경배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결국은 천사에게 경배하게 될 것이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 안에서 만유의 구원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고, 거기에 생명책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간교한 자에게 경배하는 자를 보면 그 사람 자신도 간교한 사람이다. 간교한 사람은 간교한 사람을 경배한다.
죽임을 당한 생명책에 기록된 자가 아니면 모두 다 짐승에게 경배한다는 것이다. 어린양만이 어린양에게 경배하게 된다. 십사만 사천을 보면 바로 그것이 어린양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14:1).”고 했다. 어린양이 대장이면 그 부하도 어린양이다. 어린양만이 어린양에게 경배한다.
우리의 구원이 어디에 있는가? 죽임을 당한 어린양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 거기서 우리는 만유의 통일을 볼 수 있게 된다. 거기서 모든 만유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으로, 다시 말하면 어린양이 머리된 세계가 생긴다. 어린양을 머리로 삼는 그런 세계가 생긴다는 것이다. 어린양을 머리로 삼는 세계야말로 얼마나 평화로운 세계이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바 되고 그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이다. 우리 인생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일이고, 잃었던 생명을 다시 찾는 일이고, 우리가 썩어질 것 속에서 썩지 아니할 것을 찾는 일이 되었다. 욕될 것을 심고 욕되지 아니할 것을 거두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전체적으로 구원하신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