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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 몸의 생활 2. 지체로서 몸을 살아냄 (0911)

작성자최외철|작성시간19.08.28|조회수288 목록 댓글 0

2. 지체로서 몸을 살아냄

첨부파일 21. 몸의 생활 2. 지체로서 몸을 살아냄.hwp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12:1-2)


로마서 12장 이후는 몸의 생활에 관한 말씀이다. 몸이 있는 곳에 내 인생이 있으니까 내 몸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혼자 집에서 마음을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신앙생활이고 몸으로 교회에 와 있는 것은 교회 생활이다. 교회 생활은 몸으로 하는 것이므로 몸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몸이 교회에 와야 교회 생활이 되지 마음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생활은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생활이다.

 

. 한 몸인 교회

교회는 우주적으로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있다. 그러면 몸만 있으면 교회 생활이 되는가? 몸은 각 지체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은 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람 안에서 지체로 사는 것이다. 혼자 독립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 안에 있는 나로 사는 것이다. 교회는 큰 몸이고 나는 큰 몸 안의 지체인 것이다. 손가락도 나를 대표하고 눈도 나를 대표하며 입도 나를 대표한다. 그렇지만 그 어느 하나만을 나라고 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이 합해서 나다. 이와 같이 전체 안의 나, 큰 나 안의 작은 나로서 우리 자신의 기능을 살아내는 것이 교회 생활이다.

교회 생활은 몸을 드리고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생활이다.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나는 혼자 산다. 나는 혼자다.’라는 생각을 전체 안의 나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다는 생각으로 바꿔야 한다.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교회 생활은 지체의 삶이다. 이것은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살아내는 것이다. 은사는 선물인데 자기에게 주신 분량이 있으니까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귀는 귀대로, 입은 입대로 자기의 기능을 살아낼 때 우리 몸은 살아 있다. 이것이 몸의 살아 있는 생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살아내고 표현하는 한 몸이다. 이런 몸이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는 크시고 우리는 작기 때문이다. 작은 부분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룰 때 그분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 만유가 있다. 만유를 다 사용해도 하나님을 표현할까 말까 한 것이다. 아무리 내가 크고 위대하다고 해도 창조자 안에서는 지극히 작은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하나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꽃만 보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으며 물만 보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는가? 꽃만 보는 것도 아름답지만 배경이 있으면 더 아름답다. 단풍이 아름답지만 배경에 따라서 더 아름답기도 하고 덜 아름답기도 하다. 개체는 전체 속에서 역할을 함으로써 전체를 빛내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는 개인보다는 단체적인 한 몸이 필요하다.

 

. 몸과 지체들은 하나임

몸은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몸과 지체는 분리할 수 없다. 몸에는 손이 있고 손은 열 개의 손가락이 있으며 손가락마다 손톱이 있다. 몸에는 지체들이 많지만 한 몸이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살아내기 위한 한 몸인 것이다.

 

1) 우열의 관계가 아님

몸과 지체는 하나다. 어디까지는 지체고 어디까지는 몸인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다. 몸과 지체는 우열의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높고 낮은 관계도 아니다. 어느 지체가 더 큰 것도 아니고 어느 지체가 더 위대한 것도 아니라 서로 없으면 안 되는 관계다.

교회가 국교화 되면서 계급제도가 들어왔다. 천주교는 사제와 평신도를 구별해 이중 구조가 되었고 여기서부터 우열이 생기게 되었다. 교회가 계급화했다는 것은 우리의 지체가 계급화된 것과 같다. 손은 일등이고 발은 꼴찌가 된 셈이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에는 우열이 없다. 작아도 없어서는 안 되고 커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생명이다.

로마서 123절에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하였다. 손이 발에게 너는 왜 그렇게 더러우냐?”라고 할 수 없고 발은 손에게 너는 왜 그렇게 편안하게 사느냐?”라고 할 수 없다.

교회 안의 지체는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 마땅히 서로 없으면 안 되는 관계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은 일을 많이 하는데 어떤 사람은 일을 하지 않는다. 일을 많이 한다고 우월한 것도 아니고 일을 안한다고 해서 열등한 것도 아니다. 몸 안에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더 큰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작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몸에는 쓰이지 않는 것 같은 지체도 있다.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으면 편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더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것도 어느 날에는 꼭 필요하다. 목공소에는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는 연장도 많고 일 년에 한 번 쓰이는 것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의 지체도 그렇다.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해도 안 되고 남보다 낫다고 생각해도 안 된다. 자기 분량대로만, 지체대로만 생각하고 남과 비교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 ‘저 사람은 저런데 나는 왜 이런가? 나는 이런데 저 사람은 왜 저런가?’ 하며 비교하는 것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손가락이 손가락이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고 발가락이 발가락이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다. 자기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니므로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가 된 것은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니다. 나도 부름을 받아 왔고 저 사람도 부름을 받아 온 것이다. 자기가 고기 잡다 부름을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고기 잡다 부름을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다. 밭을 갈다가 부름을 받을 수도 있고 장사하다가 부름을 받을 수도 있다. 어디서 부름을 받았든지 우리는 한 분에게 부름받고 한 몸을 위해 왔다. 어디에서 부름을 받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은 비교할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크고 어떤 사람은 작다. 내가 크고 싶다고 해서 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작고 싶다고 작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왜 저 사람보다 작은가?’라고 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면 크게 할 수도 있고 작게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작아야만 필요하기 때문에 작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떠하든지 몸이 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 감사하다.

몸 안에서 자기 역할이 따로 있고 자기 분량이 따로 있다. 우리는 다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다. ‘기둥이면 좋은데 나는 왜 서까래가 되어 잘못하면 비가 새는가?’라고 할 일이 아니다. 서까래로 쓰신 이도 그분이고 기둥으로 쓰신 이도 그분이다. 서까래가 그 뜻을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둥 스스로 자기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 사람은 돈이 많은데 나는 왜 돈이 없는가?’ 하며 비교할 문제도 아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을 이유가 있어서 많은 것이고 적은 사람은 적을 이유가 있어서 적은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니다.

지체의 역할을 비교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야만 정상적으로 지체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손이 나는 왜 머리가 못 되었는가?’ 하면 손의 역할을 못한다. ‘내 속에는 왜 뇌가 없어서 아무 생각도 없고 머리가 하라는 대로만 해야 하는가?’ 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가만히 있고 싶은데 왜 자꾸 시키느냐? 나도 명령을 해 보고 싶다.’라고 생각하면 우울증에 빠지고 말 것이다. 머리는 머리대로 마땅히 생각할 생각을 해야 되고 손가락은 손가락대로 마땅히 생각할 생각만 해야 한다. 어떤 면으로는 손이 뇌보다 더 강하고 좋다. 손가락은 적어도 하라는 대로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지만 뇌는 조금만 잘못되면 기능을 못한다. 어제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고 네가 누구냐?”고 해도 모른다. 각자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누가 낫고 누가 못하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하였다. ‘지혜롭게건전하게. 자기 분수대로 건전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상호 협력하고 서로 보완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비교해서 누구는 높고 누구는 낮은 존재가 아니다. 비교하는 것은 지식에서 온 것이다. 생명은 전혀 비교가 없다.

 

2) 각각의 직분이 있음

각자에게는 각자의 직분이 있다. ‘직분은 행위(action). 각자에게는 각자의 행위가 있다. 손은 손으로서의 행위가 있고 발은 발로서의 행위가 있고 입은 입으로서의 행위가 있다. 눈이 하는 것을 손이 할 수 없고 손이 하는 것을 눈이 할 수 없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고 하지만 눈이 하는 일을 코가 할 수 있으며 코가 하는 일을 눈이 할 수 있겠는가.

몸에는 각각의 직분, 각각의 행위가 따로 있고 그 각각의 행위가 몸을 이루고 있다. 눈은 보고 코는 숨을 쉬며 입은 먹고 말하고 귀는 듣는다. 그런 각각의 직분이 서로 합해져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3) 서로 지체가 됨

서로라는 말은 주격 형태가 없다. ‘’, ‘’, ‘우리는 주격이 있지만 서로는 주격이 없어서 누가 주인인지 모른다. 서로라는 말은 주격 형태가 없는 상호 대명사다. 우리는 서로지체가 된다. 누구는 주격이고 누구는 보격인 것이 아니다. 누구를 위한 누구의 지체가 아니라 서로 지체가 되는 것이다.

몸의 지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지체가 된다. 손은 발에게, 발은 손에게, 눈은 코에게, 코는 눈에게 지체가 된다. 이것은 각기 다르지만 독립된 것도 아니고 분열된 것도 아니다. ‘서로는 다른데도 독립된 것이 아니다.

이런 신기한 세계가 몸의 생활의 세계다. 교회를 몸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지만 각자의 지체의 역할 로 보면 하나님의 몸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집이라고 하면 단지 들어가서 사는 곳이지만 몸이라고 하면 살아서 움직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몸 안에서 우리는 서로 지체가 되어 내가 못하는 것은 저 사람이 하고 저 사람이 못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르지만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은 세상을 사는 데도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같고 행동이 같아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문제가 생기고 살기가 어려운 것이다. 마치 서까래를 기둥으로 만들거나 기둥을 서까래로 만들려는 것과 같다. 서까래를 기둥으로 만들려면 휘어서 안 되고 기둥을 서까래로 만들려면 깎아 내야 하니까 어렵다. 집을 짓기 위해 산에서 나무를 고를 때 목수는 어떤 것은 서까래감으로 어떤 것은 기둥감으로 정해서 잘라온다. 서까래 재목이 다르고 기둥 재목이 다르다.

부부간에도 어느 한편에서 상대방을 자기와 같게 만들려고 하면 어렵다. 자기와 같으면 좋을 것 같지만 자기와 다른 점이 필요하고 유익하다.

김장을 하려면 마늘도 필요하고 파도 필요하다.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가지만 그것만으로 김장을 할 수 없다. 적더라도 여러 가지 재료가 골고루 있어야 한다.

연애하던 사람들이 결혼을 하면 잘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연애할 때는 상대방에게서 자기와 다른 면에 호기심이 이는데 결혼하면 자기와 같기를 바라므로 싸운다. 결혼 생활은 교회 생활이고 몸의 생활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다른 지체에게서 나와 다른 점이 나에게 필요하다.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면 다른 점이 오히려 자기에게 화가 되고 마는 것이다. 똑같은 사람들끼리 사는 집은 적막강산이지만 다른 사람들끼리 사는 집은 북적대기도 하고 사람이 사는 것 같다.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이다.

교리로 획일화하여 교회에 똑같은 사람들만 있으면 적막강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몸이 된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다양한 역할을 한다. 때로는 시끄럽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하기도 하고 엉뚱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여 늘 재미있고 새롭다.

우리는 서로 지체가 되기에 나와 다른 것이 꼭 나에게 필요하고 유용하다. 구체적으로는 어느 누구 때문에 내가 속상해 하는 그것이 꼭 나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저것은 꼭 고쳐야겠다.’고 하는 그 문제가 바로 자기에게 복이 되는 문제다. 기어코 고치려고 하면 화가 되지만 서로 조화를 시키면 복이 된다.

생명은 모든 것이 하나로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도록 창조하셨다. 그런데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에 따라 억지로 만들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교회에서 질서 있게 간증을 하면 좋겠지만 뛰어나오기도 하고 나오다 부딪치기도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재미있다. 조용히 있다가 나가면 될 텐데 왜 뛰어 나가는가? 다 조용한 사람만 있으면 간증이 안 된다. 조용히 앉아 있다가도 남이 뛰어 나가는 것을 보면 자기도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흘러가는 대로 흐르다 보면 재미도 있고 서로의 기능도 활발하게 발휘될 것이다.

나는 억지로 해서 된 일이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구경만 해야지 내가 계획을 하면 안 된다. 지금까지 내가 계획한 것은 된 일이 없고 오히려 계획하지 않은 것만 되었다. 그런데도 그것이 감사하다.

세상에서는 자기 계획대로 안 되면 인생을 한탄한다.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까 한이 많고 죽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한 한을 품고 가는 것이다. 우리는 한이 있으면 풀어야 한다. 어떻게 한이 없어지는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가 지체가 되면 한이 있을 이유가 없다.

몸의 지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지체가 된다. ‘없는 나도 없고 없는 너도 없다. 그리고 궁극적인 는 하나님이다. 나와 우리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심으로 인해서다.

 

. 은혜대로 생명의 은사를 발휘함

지체들은 어떻게 은사를 발휘하는가? 어떻게 활동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로마서 126절에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하였다.

은혜는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대로 누릴 수 없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곧 생명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은 그분 안에서 누리는 은혜, 이것이 생명의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은사는 은혜대로 발휘하는 것이다. ‘은사는 기적의 능력이 아니라 생명의 선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방언을 하는 것이나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생명에서 나온 은사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다. 바울은 분명히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은 은사를 행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하신 것이다.

생명에서 나온 활동은 수고롭지 않다. 운동장에서 뛰는 사람들은 전혀 수고로워 보이지 않는다. 아픈 사람에게 뛰라고 하면 힘들고 괴로울 텐데 속에서 힘이 넘쳐나는 사람이 뛰니까 수고롭지 않고 뛸수록 더욱 상쾌하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주후 56~59년 경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였고 일 년 후에 고린도 교회에서 로마서를 썼다. 그는 기적의 은사들을 철저하게 경험했다. 기적의 결과와 문제점을 보고 나서 교회는 기적의 은사로가 아니라 생명의 은사로 되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로마서 12장 이후에 나오는 은사들은 전부 생명의 은사다.

생명의 은사와 기적의 은사는 다르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거나 자기 몸에 불덩이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는 식의 은사는 기적의 은사들이다. 그런 은사를 통해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는 봉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교회가 되지 않는다. 교회 생활은 생명의 선물로 하는 것이다. 몸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은사가 필요하다.

기적의 은사로 대표적인 것이 발람의 당나귀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민수기 22장에는 나귀가 말을 하여 발람에게 교훈을 했는데 그것은 생명과는 관계가 없는 기적이다. 오늘날도 기독교인이 아니던 사람이 부흥회에 왔다가 방언을 하는 수도 있다. 생명과는 무관한 그런 은사로는 교회가 되지 않는다.

교회가 되려면 구속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함에 이르고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생명이 성장해야 한다. 어린아이에게 모든 기능이 있지만 성장함으로 기능이 점점 더 완전해지는 것이다.

교회는 살아 있는 몸이다. 생명은 시간을 두고 자라난다. 은사도 하루아침에 나타나지 않고 생명의 분량에 따라 자란다.

우리 몸에서 갑자기 자라는 것은 암이다. 생명의 법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자라고 퍼지는 무법자다. 정상적인 세포는 생명의 법의 통제를 받지만 암은 통제를 받지 않는다. 먹는 대로 크다가 자폭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 안에 그런 것이 있으면 우리 몸은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몸에는 정상적인 법의 통제를 받고 자라는 세포가 필요한 것이다.

은사는 생명의 분량에 비례한다. 건강한 것만큼 활력이 넘치는 것과 같다. 활력이 넘치게 하려고 술을 먹으면 우선은 활력이 넘치는 것 같아도 결국 몸을 상하게 한다. 건강의 은사, 이것이 생명의 은사다.

교회 생활은 몸의 생활로서 생명의 분량대로 하는 생활이다. 남이 한다고 자기도 그렇게 하려고 하거나 남이 하지 않는다고 자기도 하지 않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있어도 나는 못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못하는 것을 내가 할 수도 있다. 봉사하는 것도 자기의 생명만큼 되는 것이지 생명 이상으로 될 수 없다.

 

1)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함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라고 하였다.(12:6) ‘예언은 미리 말하는 것이며 해석하고 권고하는 것이다. 예언의 은사는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하였는데 분수대로배당된 대로’, ‘어울리게라는 의미다. 예언은 믿음에 어울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믿음에 어울리지 않는 예언은 문제가 된다. 어느 중학생이 환상을 보고 19921028일에 휴거가 있다는 예언을 했다. 그것을 믿은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그날 휴거해서 올라가는데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에 어울리지 않는 예언이었다. 그들의 생명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 예언보다 그렇게 예언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어야 했다. 중학생 아이의 예언은 남을 설득하고 남을 권유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자기의 믿음에 어울리도록 해야 한다.

예언은 그 사람을 보고 들어야 한다. 예언만 들으면 속을 수밖에 없다. 개가 해도 예언이고 소가 해도 예언이고 어린아이가 해도 예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언은 어울리게 해야 한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사야와 어울린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예레미야에게 어울린다. 성경 어디에도 어떤 아이가 갑자기 예언을 했다는 곳이 없다. 선지자들은 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예언을 한 것이지 자기와 상관없는 예언을 한 것이 아니다.

 

2) 섬김으로 봉사함

봉사에 대해서는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라고 하였다.(12:7) ‘봉사는 사역이고 직무다. 사역은 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나는 어차피 누군가를 위해서 살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면 섬기기가 쉽다. 내가 남을 섬기려고 하면 무시하는 사람도 도와 주지 않는 사람도 나를 따돌리는 사람도 없다. 자기가 남에게 섬김을 받으려고 하니까 불평과 불만이 나오는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소모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형제들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소모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3) 교사와 권면함과 구제함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해야 한다, 교사는 잘 가르치는 마음으로, 권면은 격려하는 마음으로, 구제할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권면하는 것은 격려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권면을 하러 갔다가 그 사람을 책망만 하면 역효과가 난다.

남을 구제할 때 복잡한 생각으로 하면 안 된다.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소박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남을 도우려면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단순하게 도와야 한다.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는 받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빌려 주어야 한다. 도와 주었으면 잊어버려야지 그것을 계속 기억하고 있으면 자기에게 복이 안 된다.

 

4) 부지런함으로 다스림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하라 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장로들에게 한 말이다. 남을 인도하는 사람은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 자기 몸만 생각하고 자기 유익만 생각하는 사람은 인도자가 될 수 없다. 자기 몫부터 먼저 챙기거나 좋을 때는 하지만 싫을 때는 안 하거나, 좋은 것은 하지만 싫은 것은 안하는 사람은 인도자가 될 수 없다. 인도자가 되려면 자기를 버려야 한다. 자기 몫을 다 챙기고 인도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5) 즐거움으로 긍휼을 베품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하였다. 남을 도와줄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돕지 않은 것만 못하다. ‘즐거움(λασμο)’은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 제물이다. 긍휼은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 지체로서의 삶은 변화된 삶임

지체로서의 삶은 변화된 삶이다. 무엇이 변화된 것인가? 나 중심에서 몸 중심으로, 작은 나에서 큰 나로 변화되는 것이다. ‘라는 개인주의가 없어지므로 자연히 분열이 없어지고 서로 지체가 되는 삶이니까 독선이 없어진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서 위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빛을 남긴 것 같아도 오히려 교회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십 년을 했다고 하면 그것을 본받으려고 하고, 서로 지체가 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신앙인, 슈퍼 크리스천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교회를 방해하는 문제다.

지체로서의 삶은 전체 속의 나를 의식하게 되는 것, 사회인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밖에 모르지만 자라면서 사회를 알게 된다. ‘내 주변에는 이런 것 저런 것이 있구나. 내 마음대로만 할 수 없구나.’라고 알게 된다. 성장했다는 것은 사회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외의 사회가 있다. 나는 사회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다.’라고 인식한 사람이 성장한 사람이다.

지체로서의 삶은 성장한 삶이다. 우리는 지체로서 교회 생활을 하고 있다. 내가 크든 작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지체로서의 삶은 변화된 삶이다. 개인주의를 벗어난 것, 독선에서 벗어난 것, 그리스도를 살아내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이나 의견, 주장이나 목적을 버리고 교회와 지체들을 위해서, 서로 살아가기 위해서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은 인격이 성장한 놀라운 변화다. 이것은 교회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교회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인격을 완성시키는 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원래 하나로 지어졌고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 개에서 한 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고 수많은 밀알들이 되었다. 그 많은 밀들은 여러 개의 밀이 아니라 하나의 밀알이 된 것이다. 이것이 교회다.

우리는 하나로 지어져서 전체적인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의 개체에서 출발해서 전체적인 하나로 성장하는 것이다. 나무가 산에 있을 때는 하나 하나였지만 건축 속에 들어오면 건축 안의 나무가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대로 완성된 사람이다. 우리를 부르신 것은 전체가 하나인 사람, 지체로서 전체를 이루는 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소원이며 하나님 목적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라고 간구하셨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해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고 자기를 낮추며 자기가 없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이것은 세상의 위대한 도덕군자에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다. 세상에서는 도를 통하고 천지를 통달해도 전체를 위해서 자기가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우리는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간단하게 교회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 교회를 위해서라면 내 주장이 없어야 되겠구나. 교회를 위해서라면 내 생각을 버려야 되겠구나.’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매일 만나고 좋든 싫든 같이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의 문제도 아니고 심오한 도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한 몸으로 사는 현실적인 문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서 세상의 어떤 도덕군자도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가 일상 속에서 쉽게 해결되고 있다. 교회는 이렇게 신기하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당신의 몸으로 재창조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몸을 드려서 지체로 한 몸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영광스러운 세계 안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높고 귀하며 찬란하고 영광스러우며 아름답고 비할 데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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