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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영상매체의 문학적 이해] 영화 '세 얼간이'를 보고(교육과A 200810030 정겨운)

작성자정겨운|작성시간11.12.14|조회수125 목록 댓글 0

‘임용 고시생’이라는 신분으로, 평소의 따분하고 별다른 새로울 것이 없는 생활의 반복이 너무나도 팍팍하게 느껴져서, 과제라는 미명하에 오랜만에 ‘영화 한편’이라는 일상의 작은 탈출구로 삼게 된 게 이 영화였다. 인도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고, 포스터를 보는 순간 나의 뇌리 속으로 무언가 또 다른 인도 영화인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느낌으로 다가왔던 ‘세 얼간이’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얼간이는 파르한, 라주, 란초이다. 그 중 가장 얼간이의 이름은 란초이다. 이 영화는 두 얼간이와 성공한 모범생이 란초를 찾는 데서 시작한다. 란초를 찾으러 가면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형식이다.

이 세 얼간이와 범생이는 인도에서 가장 잘나가는 공학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이 대학 총장은 ‘인생은 레이스’라며 경쟁을 당연시하고 학생들에게 이 살벌한 규칙과 규범 속에 벌어지는 레이스에서 살아남길 권고한다. 하지만 란초는 처음 신입생환영회 때부터 이 규범을 타파한다. 그 이후에도 하는 짓마다 엉뚱한 짓을 벌이고 다니며 교장의 눈 밖에 난다. 이렇게 말썽을 부리면서도 란초는 항상 ‘알 이즈 웰’을 외치며 걱정하지 않고 사건사고를 잘 극복해 나간다. 이런 살벌한 규칙과 규범 속에 자살하는 학생까지 생기지만 교장은 당최 변할 생각,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란초는 이런 교장에게 ‘살인자’라고 말하지만 교장은 끝내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란초를 내쫓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란초의 친구들도 한 무리가 되어서 엉뚱한 짓을 벌이고 다니지만 란초는 일등, 나머지 둘은 꼴등이다. 란초는 공학을 성적과 성공의 수단이 아닌 공학 그 자체로 사랑하기 때문에 일등이라고 말하며 다른 두 친구들에게 자신의 길을 갈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이 친구들에게는 자신들만 바라보고 기대하는 가족들이 있기에,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두 얼간이들도 큰 사건사고를 겪으면서 결국 란초와 자신 스스로를 믿고 자신의 길을 가기위해 노력한다.

이 엉뚱한 사고뭉치 란초에게도 사랑이 찾아오는데 정말 기이한 운명으로, 자신을 그토록 싫어하는 교장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과 연관되어 이 세 얼간이들은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를 겪지만 란초는 이 위기 속에서 교장의 마음을 돌리는 감동적인 일을 벌인다. 바로 교장의 임신한 큰딸이 출산고를 겪는데 비가 많이 와서 병원을 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 상황에서 란초는 진정한 공학도의 기지를 발휘하여 아이를 낳게 한다. 이 상황에서 교장은 자신의 가장 뛰어난 제자에게 주려고 마음먹었던 만년필을 란초에게 쥐어주며 퇴학을 취소한다. 이렇게 교장의 인정까지 받고 학교도 1등으로 졸업한 란초는 졸업과 동시에 잠적하고 만다.

그렇게 10년이 지나 란초에게 밀려 2등만 하던 범생이가 두 얼간이에게 란초의 위치를 안다며 두 얼간이를 부른다. 이 범생이는 대학생 때 란초에게 굴욕 당했던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란초보다 더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란초를 찾는데 협조한다. 이렇게 셋이서 란초를 찾아갔지만 그곳에는 란초의 이름을 한 다른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했던 란초는 자신의 주인을 위해 대신 학위를 땄던 것이고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학위를 따자마자 잠적했던 것이다. 이 셋은 포기하지 않고 진짜 란초를 찾기 위해 떠나는데 그 도중에 전 란초의 애인이자 교장의 딸이 결혼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그 여자를 설득하여 같이 란초를 찾으러 간다. 란초는 시골 마을에서 학교 선생님을 하며 자유롭게 지내고 있었다. 모두 반가워하며 서로 사랑을 확인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범생이는 자신의 승리를 확인했다는 우월감 속에서 란초를 비꼬며 비즈니스를 위해 간다. 그 비즈니스라는 것이 인도에서 가장 많은 발명특허를 갖고 있는 푼수크 왕두라는 발명가와 만나 거래를 하는 것이다. 모두들 예상했겠지만 바로 이 최고의 발명가 푼수크 왕두가 란초의 진짜 이름이었으니 결국 이 범생이는 패배했고, 결국 ‘알 이즈 웰’이 승리한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인도영화는 처음이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노래와 춤이 나오는 뮤지컬 같은 분위기와 배우들의 능글맞은 표정이 어색하게 다가왔지만 밝고 유쾌한 분위기라 그나마 부담 없이 봤다.

옛날 같았으면 정말 이 감동적이고 희망찬 스토리를 마음속에 새기며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안고 앞으로의 내 모습을 떠올렸겠지만, 현재 세속에 찌들어버린 나로서는 마음 편하게 감동할 수 없었다. 이 영화와 현실의 괴리를 생각하기에 바빴고 내가 이 영화처럼 할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하는데 더 머리를 쓰기 바빴다. 이래서 어른이 순수하지 않다고 하였던가, 영화를 영화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메시지마저 진정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변명할 거리부터 찾는 내 모습이 너무 슬프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내 감상이니 솔직하게 적겠다.

이 영화를 보면서 ‘죽은 시인의 사회’가 떠올랐다. 어느 정도 대응관계도 이룬다. 여기서의 ‘알 이즈 웰’은 ‘카르페디엠’과 대응될 수 있겠고 란초는 ‘캡틴’선생님, 학교는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고, 세 얼간이는 ‘죽은 시인의 사회’단체라 할 수 있겠고, 이 지독한 질서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죽은 불쌍한 영혼이 있다는 것 등등 비슷한 점이 많은 영화다. 가장 중요한 서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나는 비슷하게 느꼈다. 좀 다른 점이라면 ‘죽은 시인의 사회’는 새드엔딩으로 여운을 남기지만 ‘세 얼간이’는 해피엔딩으로 밝게 끝난다는 것 정도. 두 영화는 모두 이 지독하게 촘촘히 짜여진 규범과 규칙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난 와 닿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내면에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찾고 들어내기만 하면 다 성공할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각자 가지고 있는 잠재성에도 정도가 있다. 기본적으로 특기라고 하면 남보다 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뜻하고 그 자신의 특기를 살리라는 말은 결국 경쟁을 전제로 한다. 사람들 모두 자기가 즐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직업, 잘 할 수 있는 직업. 하지만 누군가 자신보다 그 일을 더 잘한다면 나는 더욱 열심히 해야 할 것이고 그 일은 즐거워지지 않을 것이다. 다 알면서도 이 위험부담을 피하기 위해 그나마 중간이 있는, 묻혀갈 수 있는 사회의 획일화된 흐름을 찾아 파고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더 안정되니까. 결국 어디서나 경쟁의 칼날은 도사리고 있고 그나마 무딘 칼날을 찾아다닐 뿐인 것이다.

가끔씩 TV에서 나오는 자신의 색다른 도전을 통해 성공한 란초 같은 사람들이 나온다. 하지만 이들은 아주 특이한 경우이고 다른 사람들이 용감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용기가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알 이즈 웰’이 적당한 양의 알콜과 같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며 더욱 효율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들처럼 용감했다면 이들도 긴장해야 될 것이다.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둘은 더 재능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만을 쫓아가다보면 사회가 잘 돌아갈지도 의문이다. 누가 쓰레기 줍는 일을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하겠으며,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이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일이라 하겠는가.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듯이 우리는 사회의 큰 흐름에서 언제든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준비된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학교는 공통교육과정을 바탕으로 학생들은 교육하는 것인데 이를 획일화된 교육과정이라고 싸잡아 비판만 하면 곤란하다. 이 공통교육과정에서 기본기가 잘 쌓여진 사람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 획일화된 기본과정에서 벗어나봤자 또 다른 곳에서 경쟁을 하고 있고 어느 정도는 위험부담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경쟁을 즐길 수 있느냐는 자신의 위험부담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느냐와 상통될 뿐이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서 감독은 ‘얼간이’와 ‘모범생’의 관계를 반어적으로 연관지어 전달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얼간이’가 ‘모범생’을 이겼다고, 하지만 ‘모범생’은 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굴곡 없이 순탄하게 성공했고 우리 대부분이 바라는 전형적인 상일 수도 있다. ‘모범생’은 희화화되어 나타나지만 ‘란초’ 라는 천재 하나에게 졌을 뿐이고, 친구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자랑할 정도로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죽은 시인의 사회’는 새드엔딩으로 공상과 공허함만 안겨주었고 ‘세 얼간이’는 공상과 허황됨을 안겨주었다. ‘카르페디엠’이라고 외치며 현재의 순간순간 기쁨을 챙기며 살아갈지, ‘알 이즈 웰’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달래며 위험부담을 극복할 용기를 만들어 내든지, ‘마쉐멜로우’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 순간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인내할지 등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무작정 ‘알 이즈 웰’이라고 외치며 자신을 안심시키며 속이는 짓을 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요즘 성공하는 방법을 다루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중 자신과 맞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나도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성공스토리를 쓴 자서전을 읽어봤지만 그때그때 감동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 남의 성공을 받아들이려니 혼란스러울 뿐이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자신의 적성을 찾아 직업적으로 성공을 하였어도 인간관계, 가족, 건강 등 다른 면에서 불행할 수 있는 것이고 직업적으로는 억지로 의미 없이 일을 하며 살고 있어도 다른 곳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내 결론은 이보다 자신에게 성공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간이’가 되든 ‘모범생’이 되든 그 선택은 기준을 세운 뒤에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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