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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신갑주]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

작성자바울|작성시간07.10.03|조회수290 목록 댓글 0

기독교와 천주교


장신대 조직신학 교수 김명룡

(월간<교회와신앙> 99년 11월호)


***  로마카톨릭교회(천주교)와 기독교(개신교회)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개신교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앞서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톨릭 국가들은 두세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2류 국가로 전락이 되어 있습니다.


왜, 가톨릭 국가들이 개신교 국가에 비해서 현격하게 뒤쳐져 있는가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많은 논문들의 결론은 대개 같습니다.

그것은 가톨릭 정신이 개신교 정신에 비해서 상당히 열등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국가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 여론 조사를 해보면 가톨릭이 가장 호감을 갖는 종교로 되어 있어요.

반면 우리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나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우리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교회로 많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개선이 아니고 잘못된 국력에 침체를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우리나라가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징조입니다.

왜그렇습니까?

그것은 우월한 종교에서 더 저급한 종교로 이동되고 있으며, 종교는 국가정책에 큰 뒷받침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개신교와 가톨릭이 어떤 차이가 있기에 이런 고급과 저급을 언급할 수 있습니까?

가장 핵심적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첫째는 죄와 회개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가톨릭은 성사가 중심이 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세례, 성찬, 신품(신부인준), 고백(고해성사), 견진(입교문답), 혼인(결혼), 종부(임종)성사 이렇게 7가지죠.

가톨릭 교회의 성사는 모두 죄사함의 제도입니다.

그리고 그 죄사함의 실질적인 권세가 예수님이 아닌 신부(교회)의 주권하에 있는 종교입니다.

가톨릭교회에 의하면 세례에 의해서 원죄가, 그 외의 성사를 통해서 자범죄가 사해집니다.

즉 성찬할 때, 신부가 될 때, 죄를 고백할때, 입교문답할때, 결혼할때, 죽음에 이를때,

성사를 통하여 신부가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포하면 그 죄가 사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 이론에 의하면 사제가 없으면 참된 의미에서의 구원의 확실한 보증이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인위적으로 꾸민 하나님의 말씀에 비해 저급한 제도임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대죄(살인, 간음, 이간질, 질투, 미사 불참....)와 소죄를 구별하는 전통이 있어요.

대죄를 행한 사람들은 반드시 신부님께 가서 고해를 해야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하기 때문에 신부님들이 다 죄를 알죠.

이것은 교회의 권위를 세우는 아주 유용한 제도입니다.

대죄를 지은자가 고백하므로 신부는 그것을 다 알게 되고,

만약 고백이 어려원 고백하지 못하면 그는 늘 신앙양심에 가책을 받고 살게되지요.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인 범죄를 고해한 후 한참 동안 신부님을 피하는 경우가 그 예이지요.

물론, 신부님이 고해한 것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 알고 있는 것이니까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해봐요.

이것은 진정한 죄의 해결이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신부님이 술을 마시고 혹시 실수를 했다고 해도 "어떻게 신부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어요?"

하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게되죠.

그러나 개신교회에서는 자기 죄를 다 숨겨놓고 목사님을 보고 있기 때문에 한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목사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어요?"라며 따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조금만 잘못하면 그것이 걸려서 목사님들이 대단히 혼이 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이죠.


이것이 가톨릭과 기독교의 중요한 차이를 볼 수 있게 되지요.

가톨릭은 신자의 모든 죄에 대하여 신부가 그 면죄권을 갖고 있는 것이고,

기독교는 죄의 용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싸함 받게 되는 그것입니다.

가톨릭에 비해 기독교의 죄 사함의 교리가 단연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것이지요.


이런 교리적 차원에서 중세 가톨릭에서는 교회에서 면죄부를 만들어 팔 수 있었고,

지금도 이론적으로 가톨릭교회는 면죄부를 팔아먹을 수가 있는 교리적 뒷받침을 갖고 있어요.

지금도 가톨릭 교회는 이 면죄부 교리를 대단히 교육적인 방법으로 이 일을 행합니다.

죄를 크게 지은 사람일 경우는 장애인 시설 등을 만드는 자금을 지불케 하여 그 죄를 사하게 할 수 있죠.

그래서 지금도 교회가 마음만 먹으면 면죄부를 팔아먹을 수 있는 이론적인 기초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신부가 직접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죄의 용서가 사제를 통해 일어납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의 권한이 사제/목사/장로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신적이 없어요.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의 사건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되지요.

이렇게 개신교회가 직접성의 종교라면 가톨릭은 간접성의 종교입니다.


둘째로는 일반 신자들의 성경에 대한 접근성입니다.

이런 교리들이 가톨릭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신자들이 성경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가톨릭교회의 성사에 의한 죄 사함의 교리는 구약의 제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요.

가톨릭의 예배를 미사하고 하는데 그 미사란 제사를 의미합니다.

가톨릭은 원래 제사를 드리는 행위로만 예배하였지 설교하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흔적이 아직도 강단 중앙에 성만찬을 위한 식탁이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 떡을 주시고 그 떡을 받아먹는 순간에 죄의 용서가 일어나는 것이 미사의 핵심이죠.

미사에 잘 참석하고 있다가도 그 떡을 받아먹는 순간에 빠졌다면 이 사람은 미사의 은혜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므로 이 미사에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다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일반 신자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오랫동안 금지시켰어요.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기록한 라틴어를 성문자라고 하며 일반인들이 성경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어요.

예배도 회중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틴어로만 하고....

가톨릭교회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오랫동안 성경을 번역하는 성서공회를 마귀들의 집단이라고 했어요.

그들은 그렇게까지 성경이 모든 신자들에게 읽혀지는 것을 꺼렸지요.

이에 비하면 기독교는 그야 말로 말씀의 종교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을 한 거예요.

루터는 "모든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하나님과 마주쳐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이런 것들이 우리 개신교 성도들이  가톨릭교회 성도들에 비해서 훨씬 개화가 더 된 특징들이어요.

이렇듯 가톨릭에선 일반 성도들에게 오랫동안 성경이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어요.

최근에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서 성모 마리아 상이 울었다고 해서 순례객이 몰려들고 난리를 쳤어요.

성모 마리아가 울었다고. 그 돌로 된 상이 울었다는 거예요.

이런 얘기를 들으며 그것에 호기심을 갖는 분들은 위험한 분들이에요.

돌이 어떻게 울어요.

순례객들이 자꾸 몰려드니까 그 지역의 주교께서 "아무래도 확실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눈물을

수거해서 정식으로 조사를 해보니까 올리브 계통의 야자 기름이라는 게 밝혀졌어요.

누군가 밤에 와서 부어두고 간 거예요.

그것을 "성모 마리아께서 울었다"고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를 연구해 보면 성모 마리아가 울었다는 전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얼마나 미신이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도 종파별로 차이가 있는데 미신이 많은 종파일수록 조금 수준이 낮은 종파에요.


가톨릭교회의 성도들이 왜 미신에 많이 빠지는가, 왜 일반적으로 개화되지 못할까요?


그것은 첫째로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가톨릭의 신앙행위는 대개는 일주일에 한번 미사를 적당한 시간에 맞춰드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의 미사에 참석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제들의 선창에 따라 복창하고 앉았다 섰다 이거 몇 번 하고 가서 떡 받아먹고 나오는 거예요.

요즘 가톨릭교회에 가보면 강론한다고 해서 한 10분 정도 설교를 합니다.

설교제도는 본래 가톨릭 미사에는 없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원래 개신교회에서의 설교의 효용성을 도입하여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은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가톨릭교회에 그 시간이 공식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는 근본적으로 제사의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말씀의 종교 아닙니까?

같은 일자무식의 두 할머니가 있어요.

한 분은 교회 안의 권사님이고, 한분은 열심히 장사하여 돈을 많이 버신 할머니입니다.

교회의 권사님은 대학을 서너 개 나온 정도로 똑똑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긴 세월 동안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서 얼마나 많이 교육을 받는지 몰라요.

주일 낮, 저녁, 수요일, 새벽, 구역예배, 부흥회... 하여간 평생을 교육받으시니 얼마나 개화가 되었겠어요.

물론 가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기도 하지요.

그래도 머리 안에 든 게 없으면 말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힌 그 사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못하고 주일날 미사에 참여해서 앉았다 섰다하고 온 사람하고를.....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가톨릭 국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부딪혔던 개신교 국가하고 얼마나 차이가 있겠느냐 그 말이에요.

이것은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에요.


종교개혁후 500년의 역사는 개신교 국가들이 한결같이 세계의 제일가는 국가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뒤늦게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중요한 것들을 배워서 고쳐 가는 과정에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되요.


두 번째로 중요한 측면은 마리아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 가보면 많은 성도들이 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그래요.

가톨릭교회에서 그들의 교리서를 통해 직접 가르치고 있는 마리아론의 핵심을 정리하면 5가지 정도가 되요


1,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다.

2,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 없는 삶을 살았다.

3, 마리아는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

4,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다.

5,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마리아의 중재성입니다.


첫째 주장을 살펴보죠.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을까요?

가톨릭교회의 마리아에 대한 기도문에 보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여"로 시작하고 있어요.

그런데 마13:5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이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여기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남자 형제만 네 분이 있어요.

그 누이들이, 이렇게 복수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여자 동생이 최소한 두 분 이상 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성경에서 이렇게 명백히 말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라고,

평생 요셉과는 아무런 성적인 관계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여기 나오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동생들은 어떻게 되느냐?

가톨릭이 공식적으로 그들은 모두 사촌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본문은 어린이들도 그들은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난 동생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이 본문을 그렇게 해석하고도 전혀 말썽없이 지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교황께서 이 본문을 그렇게 해석하셨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가톨릭교회는 최근에서야 평신도들이 성경 읽는 것을 허락했어요.

그래서 평신도들이 성경 읽는 것은 허용하지만, 아직도 일반 성도들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은 없어요.

성경해석의 권한은 전적으로 교황을 정점으로 하고 있는 교회에 속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도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이 형제들은' 은 '사촌'이다"라고 교황이 말씀하셨으면 그것은 사촌이에요.

그들은 천주교 안에서는 영원히 사촌입니다. 바꿀 수가 없습니다.

교황이 그분의 보좌에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선포하실 때에 절대적으로 무오한 거예요.


가톨릭교회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경에 오류가 없다,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가톨릭은 "교황께서 하신 말씀은 영원히 오류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그 유명한 제 1차,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교황의 말씀, 교회가 가르치는 말씀은 영원토록 오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기초로 해서 교회를 개혁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가톨릭은 위로부터의 개혁은 가능해도 아래로부터의 개혁은 불가능해요.

만약 교황이 "교회를 이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개혁하자"고 하면 교회의 잘못을 고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신학자들이, 성도들이 아무리 "이것은 고쳐야 되겠습니다" 해도 고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교황의 말씀에 오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교황의 말씀 가운데 수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어떻게 죄악된 인간의 말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할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은 교회의 이 권위 안에서 교황의 가르침을 근거로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이었다고 가르칩니다.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없는 삶을 살다가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 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다"라고 주장해요.

정확하게 얘기하면 마리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에 있어서의 육신의 어머니셨습니다.

그들은 “마리아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 즉 하나님의 어머니시다."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사과는 빨갛다. 앵두도 빨갛다. 그러니 사과는 앵두다"라는 것과 비슷한 괴상한 삼단논법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렇게하여 마리아를 영원한 하나님, 예수님의 어머니로 만든 것이예요.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그리고 교회를 보호하는 성모, 어머니가 계세요.


이렇게하여 가톨릭교회에서는 가능한 대로 마리아에게 깊이 결합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교리서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그래서 가톨릭교회에 가보면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에게 많이 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유에서 이죠.

마리아에게 기도하면 예수님께서는 아주 효성이 지극하셔서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거죠.


이에 대한 성 리구리란 분이 아주 유명한 글 <마리아의 영광>이란 책을 썼어요.

이 분은 마리아 신학자로 대단히 유명하여 가톨릭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위대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마리아의 영광>이란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환상 중에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봤습니다. 왼쪽 끝에는 예수님이 서 계시고 오른쪽 끝에는 마리아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왼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중간쯤 올라가다가 위를 보니 위에는 주님이 계시는데 너무나도 무서운 얼굴로 보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놀라서 떨어졌죠. 그 때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들려오기를 '오른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거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오른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어요. 그런데 그 오른쪽 사다리에는 성모 마리아가 있었는데 이 분이 자애롭게 맞아주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마리아가 이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에게 뭔가를 얘기하더라는 거예요."

이것이 리구리가 본 대단히 유명한 환상입니다.

그런데 이 환상은 신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들의 가슴 속에 있는 유명한 환상이에요.

이 환상이 얘기하는 핵심적은 예수님에게 가면 안 되는 것이 마리아에게 가면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환상은 예수님보다 마리아가 참으로 자애롭다하는 것을 나타내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글리고 가톨릭 교회는 이것을 가르치고 신자들은 이것을 아무 이론의 여지없이 받아들이고 있죠.


성도 여러분! 정말 마리아가 예수님보다도 자애롭겠습니까?

어떻게 한 인간이 주님보다 자애로울 수 있겠어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가톨릭 교회에서는 왜 이렇게 마리아론을 발전시켜,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이러한 마리아론을 연구하신 어떤 분들은 이 마리아론을 보면 가톨릭은 틀림없이 이단이다!

그러니까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렇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상당히 납득할 만한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가톨릭 신자들과 이단이다, 사이비다 싸우기를 원치 않아요.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도와가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가톨릭교회 안에 마리아관이 발전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원시 종교에 여신 숭배 정신이 있었는데 기독교회 안에 여신이 없기 때문에,

마리아 숭배를 통한 여신 숭배정신을 받아들여 원시종교와의 융합을 꾀한 것이라고도 말하지요.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이 제법 있는데 상당히 근거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이 잘 안 되요.

왜냐하면 마리아론을 연구해 보면 18, 19, 20세기 들어와서도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어요.

지금도 마리아 숭배론은 계속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셋째, 기독교의 가톨릭의 신앙비교


여기서 가톨릭교단의 대 사건을 들어보려해요. 바로 종교개혁이죠.

루터의 종교개혁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루터는 독일의 어거스틴파 수도원의 수도승이었어요.

이 수도원은 규율이 너무나 엄하여 보통사람들이 여기서 견뎌내질 못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루터는 그 어마어마한 규율을 다 지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 나름대로 규율을 만들어 지켰어요.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 성자가 한 분 나타나셨는데 그 분이 마르틴 루터다" 라고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루터는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보니까 성자이기는커녕 회칠한 무덤이란 사실을 잘 알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고 하는데 오히려 나는 더 위선자다.

내가 이 정욕과 죄악을 가지고 어떻게 주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 루터는 두려웠습니다.

주님이 무서웠어요.

이 때 루터에게 가장 심각한 고민이 무엇이었나 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자비하신 은총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루터가 로마서, 갈라디아서, 시편을 연구하며 마침내 너무나도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오호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믿음으로 가는 것이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도 자애로우시구나.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심으로 죄인인 이 상태 그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용납하고 계시는구나!"

루터는 하나님, 그 은총의 신, 지극한 사랑의 신, 그 자비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감격했어요.

"주님은 자비하신 분이시다, 내가 비록 죄인이지만, 주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이 상태 그대로 용납하시고 나를 사랑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분연히 일어나 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지요.

그래서 개신교회 안에서는 이 자비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비교적 잘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갑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들은 지금도 주님 앞에 가면 두려운 거예요.

루터가 주님 앞에 갔을 때 무서운 주님 앞에서 두려워했던 것처럼 지금도 가톨릭 신자들은 주님 앞에 가면 무서운 거예요.

이런 무서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상태는 자애로운 어떤 존재를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이 자애로움의 화신으로 성모 마리아를 그들은 예수의 어머니로서 자비로운 신으로 설정하게 된 거예요.

이 설정은 아까 말한 교회와, 교황의 이름으로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무오한 교리에 들게 되었죠.

이것을 수정, 보완할려면 가톨릭의 정체성을 심히 수정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어요.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이 성모 마리아교리를 더욱 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없으면 그들은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개신교회는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고 있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개신교 정신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가 영원토록 이 성경의 말씀에 따라야 된다.

원죄가 없었던 분, 자범죄가 없었던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리고 승천하신 분도 예수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에게 적용되는 중요한 교리들이 마리아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교회의 가르침이 아무리 위대해도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면 그 가르침은 그날로 고쳐야 되요.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성경보다 교황의 말씀이 무오함을 더 강조하니 한번 나온 말을 고칠수가 없어요.


저의 경험으로는 어려서부터 가톨릭신앙을 한 제법 배운 사람들도 이런 성경적 교리에는 무감각합니다.

아마 교회 자체에서 이런 것들을 피하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복음의 핵심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톨릭의 열심있는 신자들 중에 굉장히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톨릭교회의 문제는 이외에도 많이 있어요.

가톨릭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신앙적, 역사적으로 볼 때 개신교회에 비해 열등한 부분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가톨릭교회가 최근에 와서 왜 발전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약 3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이유는 사회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인구문제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산아제한을 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파가 가톨릭인데 이 이유 중의 하나로 산아제한의 문제를 꼽고 있어요.


개신교 가정들은 2명이 넘는 집이 거의 없는데, 가톨릭 가정은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4명 정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회교도들이 빨리 늘어나는 것과도 관련성이 많아요.



두 번째 문제는 가톨릭의 선교 정책과 관련이 있어요.

가톨릭교회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에 새로운 전기를 맞았어요.

이후 가톨릭교회는 포용주의적인 선교정책을 갖고 있어요.

복음의 핵심에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문화적인 여러 가지 요소들을 흡수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술·담배뿐만 아니라 제사도 허용하잖아요.

그런 문제로 고민이 되는 분들은 개신교회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회로 가게 되어 있어요.

이 선교정책이 바티칸 공의회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전 세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될 선교정책적인 어떤 문제가 걸려 있어요.


마지막 문제는 가톨릭교회의 이웃에 대한 책임, 사회 참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 안에서 가톨릭교회가 발전한 핵심적인 이유는 '가톨릭은 이웃과 함께하고 있다'는 인식입니다.

‘가톨릭이 세상의 정치, 사회, 복지에서 책임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명동성당, 김수환 추기경, 이런 이름들은 그야말로 한국에서 무언의 설교를 하는 어떤 힘을 갖고 있어요.

그 핵심이 바로 이웃사랑, 이웃과 이 세상에 대한 책임과 관련되어 있어요.

제가 볼 때 가톨릭의 거의 모든 것은 우리 개신교에 비해서 열등합니다.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엄청나게 많은 문제를 갖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의 장점 중의 하나는 이웃과 함께한다는 점입니다.

원래 가톨릭은 이웃과 함께하는 종교가 아니었으며, 그들은 인류역사 속에서 지배계층과 결탁했어요.

그런데 제 2차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해서 가톨릭교회 정신에 일대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공의회를 주도했던 교황 요한 23세는 가톨릭 지도자들에게 가난한 이웃에게 관심을 갖도록 했어요.

이 분의 정신이 가톨릭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 때부터 가톨릭은 가난한 백성들과 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가톨릭은 사회 속에서 신망을 얻게 되었어요.



원래 이 이웃과 함께 하는 정신은 가톨릭의 정신이 아니고 우리 개신교의 정신입니다.

우리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한 번 봐요.

우리 나라 일제 시대 때 누가 한국 민족의 아픔을 함께했는가? 우리 개신교 지도자들이었어요.

3. 1 독립선언문의 민족 지도자 33인 가운데 절반이 개신교 지도자들 아닙니까?

가톨릭교회는 우리보다 100년이나 먼저 선교를 했지만 33인의 가운데 가톨릭 신자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해방 이후에도 가톨릭은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일제 시대의 긴 세월을 흐르면서도 나라의 중심에는 기독교가 있었어요.

우리 민족의 아픔과 함께하고 우리 민족을 살리는 종교가 개신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다 그래요.

우리는 원래 그런 위대한 전통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시점에서부터 우리는 그 위대한 전통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전통을 지금 가톨릭교회가 가져갔다 그 말이에요.

21세기를 앞둔 한국교회는 우리의 위대한 전통을 다시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민족과 이 역사 속에 찬란하게 빛나는 개신교회를 만들어가야 할 줄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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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구름과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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