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2338호 / 아주 깊숙이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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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은 거의 없다. 누가복음 1장에서 출생예고를 그의 부친 사가랴에게 알려주신 것과 엘리사벳이 잉태됨에 따라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찾아온 것 외에 특별한 내용이 거의 없다. 소녀기와 청년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세례 받기 전과 사역하기 전에 등장하여 복음을 외쳐왔다.
마태복음 3장 전체가 세례 요한의 사역 전체를 다루고 있는데 그 중에 세례 요한이 입고 먹었던 것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그 당시의 문화와 습관인 줄만 알고 넘어가기 일쑤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입었던 약대 털옷과 먹었던 메뚜기와 석청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성찰하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가버린다.
세례 요한이 입었던 약대 털옷이 아닌 다른 동물의 털옷을 입어도 되는데 왜 굳이 약대털옷을 입어야만 하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약대를 낙타 계열 동물로서 특징이나 낙타의 특성이나 습관을 언급하는 정도이다. 과연 그런 의미로 끝날 내용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히브리어 철자 중에 ג(기멜 ל)이란 단어가 바로 낙타를 의미하고 있다.
이 단어의 깊은 의미 속에 진리를 깨달음의 보상으로 진리의 개념을 실어나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단순히 동물인 낙타의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음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는 곳에 택배기사처럼 날라주는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유니폼을 입은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을 접하는 모든 독자들은 세례 요한처럼 낙타의 털옷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택배기사의 원칙은 고객의 물건을 신속하게 정확하게 전달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를 어느 무엇 하나라도 가미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되어 져야 한다.
그런데 믾은 기독교인들 중에 특히 말씀을 다루는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곡해하면서 자신의 상식과 판단과 이성과 감정 등을 섞어서 전달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과거에 이러한 잘못과 오류를 범해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얼마나 올바르게 깨닫고 있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말씀을 함부로 전하다가는 어떠한 결과가 오는지는 새삼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목회자들 가운데 과거에 깨달았던 말씀을 되풀이하면서 설교하고 있다면 과감하게 중단하고 말씀 속에 풍덩 빠져서 잘못 전했던 죄인 중에 죄인으로 살아온 것을 뼈저리게 뉘우치며 말씀의 검을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약대털옷을 입은 세례 요한이 허리띠를 동여 메었다고 한다. 허리띠가 없어도 입을 수 있는 옷이다. 그런데 왜 허리띠를 동여 매야 하는가? 에베소서 6:14 ‘진리의 허리띠를 매고’ 라는 문장이 나온다. 반드시 진리를 깨닫고 나면 동여 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을 운동하는 선수들의 모습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역도 선수가 바벨을 들기 전에 허리띠를 꽉 조여 맨다. 허리의 힘을 받아서 바벨을 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의 깨달음을 얻으면 힘을 얻어서 사역을 힘차게 해야 한다. 그리고 유도선수와 태권도 선수들도 허리띠를 꽉 졸라맨다, 정신을 가다듬고 새로운 공격을 감행하기 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원리는 운동선수뿐 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허리띠가 고장이 나서 움직이면 활동을 제대로 할 수 뿐더러 엉거주춤한 자세가 나와 민망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진리를 아무리 깨달아도 행동을 옮길 때 전혀 힘을 받쳐주지 않음으로 인해 엉성한 자세로 신앙 생활하는 분들이 자주 볼 수 있다.
진리를 깨닫고 나면 자연스럽게 힘을 솟아오르게 되어 있다. 영적 에너지를 소유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느낄 만큼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된다. 영적 파워를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주님과 연합된 것이 마치 로봇 만화영화처럼 여럿 로봇이 합체되어 위대한 힘을 폭발하는 장면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현재의 신앙인들에게 세례 요한처럼 살아가세요 하면 그 어느 누가 그런 차림으로 교회를 다닐 수가 있겠는가? 아마 한 사람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부탁한다고 할지라도 거절할 분이 태반일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엉성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여긴 것이다.
세례 요한이 먹은 메뚜기와 석청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게 되면 너무나 당황할 것이다. 한글성경에는 메뚜기로 번역되었지만 원어에서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전갈”로 되어 있다. 메뚜기를 먹었다고 하면 그래도 먹을 수 있는 곤충이라서 괜찮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전갈을 먹었다고 하면 그 어느 누구라도 거부할 것이다.
무서운 독을 쏘는 곤충으로 혐오감을 주기 때문에 전갈을 먹으라고 한다고 하면 거의 다 무서워서 도망갈 것이다. 그러면 왜 세례 요한은 전갈을 먹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갈은 사람들의 무지가 너무나 가득 차 원만한 공격을 받아도 끄떡하지 않는 치원에 있기 때문에 전갈의 꼬리에 있는 침으로 가격해야 인간의 무지가 깨어지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에게 외친 복음은 전갈처럼 아주 세게 쏘는 무서운 독침을 쏘아야 만이 그들의 무지들 깨트려버릴 수 있기 때문에 전갈을 먹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매가리가 없는 설교를 해서는 어느 누구도 사람들의 무지를 깨트릴 수 없는 것이다. 설교를 듣고 변화되기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오늘날 세례 요한처럼 톡 쏘는 무서운 전갈같이 복음을 전해야 되는 상황이 왔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오늘부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전갈을 먹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전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표현하게 되면 예수를 믿지 않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못견딜 것이다.
석청은 바위틈에서 재취한 꿀 송이를 의미하는데 모든 이들이 먹을 수 있는 거라서 전갈은 그만 두고 꿀만 먹었으면 할 것이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전갈처럼 무지를 깨트리는 복음의 독을 쏘는 자만이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쪽만 먹을 수 없으며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석청은 사역의 결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무지를 깨트리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석청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바위라는 의미를 가진 반석은 거대한 돌덩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보석이란 단어와 연관되어져 있는데 베드로(페트로스)는 반석이 아니라 작은 돌, 굴러가는 돌을 의미하며 반석(페트라)이란 단어는 보석 중의 보석이란 의미다.
그렇다면 반석에서 재취한 꿀 송이는 단순히 자연에 있는 반석이나 바위도 되지만 하나님 그 분 자체가 반석이라고 호칭한 것처럼 보석 중에 보석에서 재취한 꿀 송이를 먹는 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먹었던 석청을 의미하고 있다. 전갈을 먹은 자에게만이 얻을 수 있는 사역의 결실인 석청을 먹기를 원한다면 먼저 전갈로부터 쏘임을 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뱀으로도 오신 것처럼 우리 인간들의 무지를 깨트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갈로 오셔서 무지의 백성들을 깊숙이 찌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찔림을 받아야 하는데 찔림을 받지 않고 있다. 얼마나 무디고 무딘 상태로 마비되어 있는지 너무나 잘 알 것이다.
자신의 지식과 판단, 이성과 감정으로 쌓여 있으며 자신의 경험과 습관, 수백 년 동안 흘러왔던 전통과 문화로 휩싸여 전갈의 침의 길이가 아주 길게 뻗어 나와 깊숙이 찔림을 받아야만 된다. 아주 정확하게 매서운 침이 나의 폐부를 찔러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회개다운 회개를 할 것이다. 아주 처철하게 회개해야만 된다.
내가 갖고 있는 경험과 지식과 자존심과 나의 위신까지 완전히 깨 뭉개야 할 것이다. 아주 박살이 나서 펄펄 날리는 먼지처럼 아무런 존재와 정체성마저도 철저하게 무너져야 할 것이다. 아직도 너덜너덜 달고 있는 것들을 깡끄리 청소해야만 된다. 세례요한 앞에 있는 바리새인과 사드개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창골산 원고보내주실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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